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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44화 (44/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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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44화

루비카가 자리에 앉자마자 시종이 바로 그녀 몫의 식전주를 가져왔다. 식전주는 톡 쏘는 스파클링에 신맛이 살짝 나 입맛을 돋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식전주를 한 모금 마시자마자 전채 요리가 바로 나왔다. 한입에 쏙 넣기 알맞은 요리 위에는 난생 처음 보는 과일이 있었다.

“이건?”

“드래곤아이입니다.”

서빙을 하던 시종이 친절한 미소로 대답했다. 루비카는 깜짝 놀라 접시를 보았다. 접시 위에는 네다섯 개 정도의 동그랗고 자그마한 자줏빛 과일이 놓여 있었다.

드래곤아이.

말로만 들었던 과일을 실제 볼 줄은, 그것도 입에 넣게 될 줄은 몰랐다. 드래곤의 기운이 깃든 권역에서만 채취할 수 있는 맛 좋은 열매. 드래곤의 기운이 서렸다고 알려진 이 열매는 드래곤의 권속들도 무척 좋아해 인간이 따는 것을 발견하면 가만두지 않는다고 들었다. 사실상 목숨을 걸고 채집해야 하는 과일이었다.

루비카는 포크로 동그란 과일을 슬쩍 건드려 보았다. 왠지 겸연쩍은 기분이다.

‘공작가의 만찬에 아무렇지 않게 올라왔으니, 수도의 국왕 전하는 이보다 더 자주 드시겠지?’

이 나라는 입으로는 사치를 몰아내야 한다, 식량 사정이 부족하다, 좀 더 좋은 무기를 개발해 밀 수입량을 늘려야 한다, 귀족들은 농한기인 겨울철을 제외하고는 무도회를 열지 말아야 한다고 노래를 부르면서도 이런 사치를 했다.

귀족의 권위와 힘을 과시해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라는 단서가 붙으면 아무도 토를 달지 않았다. 드래곤아이도 그런 류였다. 드래곤의 권속과 싸워서 그 열매를 재취할 수 있을 정도의 군사력과 자금을 갖췄다는 증명.

루비카는 포크로 동그란 드래곤아이를 포르르 굴려 보았다.

‘이 열매 하나를 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피를 흘렸을까?’

그 생각을 하니 아무리 비싼 과일이라 할지라도 입에 넣을 기분이 들지 않았다. 루비카는 포크로 빵 위에 장식된 드래곤아이를 굴려 접시 한구석으로 치워 버린 후, 삶은 호박과 드레싱 오일만 남긴 채 쿡 찍어 먹었다.

“……싫어하오?”

에드가가 루비카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질문했다. 그의 시선 끝은 접시 위에 그대로 남겨진 드래곤아이에 머물러 있었다.

“네.”

루비카의 대답에 에드가의 눈썹 한쪽이 올라갔다. 그러나 그가 뭐라 말할 새도 없이 시종이 접시를 치우고 다음 요리를 가지고 왔다.

“기사단이 오늘 사냥한 신선한 멧새요리입니다.”

구운 콩이 곁들여진 요리를 보니 아까와 달리 편안한 마음이 들었다. 루비카는 나이프로 멧새의 다리를 자르면서 힐끗 에드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뜻밖에 그와 눈이 마주쳤다.

“할 말 있으면 하지?”

루비카는 깜짝 놀라 그만 나이프를 떨어뜨릴 뻔했다. 언제 칼질을 끝냈는지 자른 고기를 우아하게 입 안에 넣는 에드가를 보며 루비카는 그가 아카데미에서 독심술을 배워 온 건지 잠깐 고민했다.

어쨌든 에드가가 먼저 운을 떼었으니 고민할 필요도 없겠다 싶어 바로 본론을 꺼냈다.

“오늘 친척들과 인사를 나누고 몇몇 분들과는 안부를 나눴어요. 그중에서 세사르 경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에드가?”

루비카는 눈에 띄게 험악해진 에드가의 표정에 깜짝 놀랐다. 책상에 앉아 우수에 찬 얼굴로 잉크를 묻힌 깃펜으로 아름다운 글이나 쓰는 게 어울릴 것 같은 남자가 이 순간만은 칼을 드는 게 어울려 보였다.

“뭐 하는 수작이지?”

수작? 수작이랄 게 있나?

루비카 영문을 알 수 없어 침을 꼴깍 삼켰다. 갑작스러운 에드가의 말에 놀란 것은 그녀뿐만 아니었다. 대기하고 있던 시종과 하녀들도 그 자리에서 굳었다. 마치 폭탄이 터질 것 같은 분위기에 도화선을 당길까 그들은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이런 일에 나서야 하는 건 자신인가…….

루비카는 더는 평범함 속에 자신을 숨길 수 없는 신분이 된 걸 탓하며 입을 열었다.

“수작이라니요?”

그 말에 에드가는 더 기분 나쁜 표정이 되어 들고 있던 나이프와 포크를 아예 놓아 버렸다. 루비카는 영문을 모르다 못해 답답할 지경이 되었다. 걸릴 거라곤 없다. 평범한 대화였고 심지어 칼의 의견도 받아들여 평범하게 말을 높였다.

거기다 한발 나아가 각하라고 비꼬아 부르지도 않고 에드가라고 불렀다. 화낼 여지가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그가 바라던 결과였다.

“소름 돋아.”

“네?”

“누가 당신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라고 면박이라도 줬나?”

“에드가.”

루비카가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낮게 이름을 불렀다. 식당에서 시끄럽게 그와 말싸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에드가는 루비카의 그런 부름을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아니면 내게 그런 시답잖은 말투를 써서까지 세사르 경과의 이야기를 성사시키고 싶었나?”

루비카는 그제야 에드가가 어느 지점에서 화내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에드가, 반말은 당신도 싫다고 했잖아.”

“싫어.”

“그래서 이제 당신도 원하는 대로 존댓말을 사용하려 하는데…….”

“소름 돋아.”

루비카는 ‘요.’라는 말을 입안에서 우물우물 삼켰다. 셔츠 소매 아래에 살짝 드러난 에드가의 팔목에는 정말 닭살이 돋아 있었다. 언제는 반말이 싫다고 하더니 존댓말을 하니 소름 돋는다고 한다. 정말 어느 장단에 맞추란 말인가.

“갑자기 왜 이래.”

“내가 말 했을 때는 신경 쓰지 않던 당신이 갑자기 태도를 바꾼 게 기분 나빠. 앤, 오늘 루비카에게 말투를 바꾸라고 했나?”

“각하, 제가 어찌 마님에게 그런 말을 함부로 올릴 수 있겠습니까?”

앤이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에드가의 표정은 풀어지기는커녕 더욱 험악해졌다.

“그럼 고작 장미꽃 때문에 그런 소름 돋는 말투를 사용하는 거라고?”

“각하!”

결국 분위기가 가라앉으면 천천히 설명하려던 칼이 나섰다.

“저 때문입니다. 제가 마님께 부탁했습니다.”

에드가가 분노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이렇게까지 차가울 수 있을까 싶은 눈으로 칼을 바라보았다. 그 차가운 눈에 칼은 바로 무릎을 꿇었다.

“지나친 참견이었습니다. 각하, 무슨 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밥 먹다 말고 이게 무슨 희극인가. 집사는 왜 이런 일로 무릎까지 꿇는단 말인가. 루비카는 차라리 아침에 모두의 시선을 받고 홀로 밥을 먹는 게 나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칼, 자네!”

에드가가 칼을 향해 일어나 검지를 뻗어 소리쳤을 때 루비카는 더는 견딜 수 없어 그의 팔목을 잡았다.

“에드가. 그만, 그만해.”

잡은 팔목 너머로 그의 떨림이 전해졌다. 이게 이렇게 화낼 정도의 일인가. 얼음장처럼 차가운 에드가의 체온에 루비카는 깜짝 놀랐다. 그녀의 손에서 나온 따뜻한 온기가 에드가의 떨림을 조금이나마 잦아들게 했다.

에드가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루비카를 바라보았다.

“칼은 당신과 나를 무시했어.”

아니, 그게 또 왜 무시한 일이 되는 건가. 루비카는 정말 에드가의 속을 알 수가 없었다.

“칼은 집사로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인 충고를 했을 뿐이야. 그리고 나는 그 충고가 정당하다고 생각해서 받아들인 것뿐이고.”

“나는?”

“응?”

“내가 말했을 때는 듣지 않고 칼의 말을 들은 이유는 뭐지?”

루비카는 어이가 없어 팔목을 잡은 손을 놓았다. 에드가가 지금 이렇게 화를 낸 건 자신이 말했을 때는 듣지 않고 다른 사람이 한 말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다른 사람의 요구한 바와 자신이 요구한 바가 똑같았는데도!

‘정말 화는 내가 내고 싶네. 그런 거만한 태도로 말하지 말고 좀 더 좋은 말로 날 설득하지 그랬어.’

루비카는 이걸 치기 어린 행동이라고 표현해야 할지, 융통성이 없다고 표현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어쨌든 루비카는 에드가와 유치한 말싸움을 더 하고 싶지 않았다. 침실 안에서면 몰라도 여기는 시종과 하녀들이 다 보는 식당이었다.

“에드가, 내가 공손한 말투를 쓰길 원하면 그리할게요.”

“소름 돋아. 하지 마.”

루비카는 한숨을 참았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그녀는 그를 각하로 꼬박꼬박 부르며 공손한 말투를 썼다. 에드가는 목에 부목이라도 댄 것처럼 고개를 높이 쳐들고 아무렇지 않게 그 말을 들었다.

그런데 오늘 그게 너무 소름 돋는단다. 정말 지난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자고 일어나니 온몸에 그의 향수 냄새가 났던 것부터 시작해 루비카는 따질 게 많았다.

거기에 에드가가 변명의 말을 찾아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루비카는 나중을 위해서 지금은 참자고 속으로 세 번 외웠다.

“그럼 지금처럼 말해?”

“싫어.”

아, 그럼 어쩌라고! 루비카는 그리 외치고 싶은 걸 간신히 참고 에드가를 바라봤다.

‘응?’

루비카의 눈에 에드가의 붉게 변한 귓바퀴가 들어왔다. 화를 내는 와중에도 그의 낯빛은 색 하나 바뀌지 않았다. 그런데 의아할 정도로 귀가 붉었다. 루비카가 관찰한 결과 에드가는 화를 내서 얼굴색이 변할 때도 귓가는 변하지 않았다.

‘……설마 부끄러워하는 건가?’

루비카가 말없이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자 에드가의 귀 끝이 더욱 터질 듯이 붉어졌다. 그러자 마차에서 샴페인을 마셨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 에드가의 눈가와 귓가가 살짝 붉었었다.

설마 그때 취한 게 아니라 부끄러웠던 걸까? 혹 싫다는 건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부탁을 받아 말투를 바꾼 그 자체가 싫다는 건가.

‘정말 왜 이러는 걸까. 이 사람.’

그러나 그저 부끄러워서 그러는 거라 여기니 마음에 안정이 찾아왔다. 저렇게 화내는 이유를 아예 모르는 것보다는 나았다. 루비카는 따졌다간 괜히 상황을 악화시킬 것 같아 목소리를 부드럽게 했다.

“그렇게 말하면 당신이 뭘 원하는 건지 모르겠어.”

“……내가 원하는 대로 해 줄 건가?”

에드가의 목소리가 누그러졌다. 루비카는 정말 밥 먹다가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꿀밤이라도 때려 주고 싶은 걸 참고 미소했다.

“그럴게.”

“그럼…….”

에드가가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릴 때마다 만들어 내는 잔상이 마치 별빛 같았다. 루비카는 그의 아름다움을 보고 있노라면 가끔 울컥울컥 치미는 짜증이 잊혔다. 정말 예쁜 게 최고다.

“당신 편한 대로 해.”

결국 나 편한 대로 하라고 할 거면서 이 난리를 피웠단 말이야? 루비카는 그의 예쁜 속눈썹 때문에 사라졌던 짜증이 다시 치밀어 오르는 걸 간신히 눌렀다.

“난 지금처럼 말하는 게 좋아.”

“그럼 그렇게 해. 단, 아무리 화가 나도 각하라는 그런 표현을 쓰지 마.”

그리고 에드가가 루비카의 손을 꾹 잡았다. 남자의 강인한 힘이 느껴지는 손. 루비카는 또 심장이 반사적으로 뛰어오르는 걸 간신히 눌렀다. 에드가는 루비카의 손을 잡은 채로 하인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 아내가 내게 쓰는 말투는 나와 아내 사이의 일이다. 이후로 누구든 간섭하면 용서치 않겠다.”

식사 중에 별일도 아닌 걸로 소동이 일어나 하인들도 얼마나 짜증이 났을까. 루비카는 앤이 ‘공작 각하가 제발 식당으로 자주 내려와 식사할 수 있게 해 주세요.’라고 간청했던 게 기억났다.

이래서는 자주 식사는커녕 에드가가 식당 근처에 얼씬도 안 할 노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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