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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43화 (43/212)

# 43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43화

“왜?”

“네?”

에드가의 기분이 나빠진 이유를 찾을 수 없어 칼은 잠시 공황상태에 빠졌다. 새로운 마님과 관련되어서는 주인의 기분을 도저히 예측할 수 없다.

“내게 그걸 말할 이유가 있나?”

“비용이 너무 많이 들고……, 또 처음 시녀장이 판단하기에 이건 안살림이 아니라 연구 개발에 속하니 적어도 각하께 말씀드리는 게 옳다고 간청하셨습니다.”

에드가는 한숨을 쉬었다. 앤이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알겠다. 루비카는 이제 막 공작 부인이 되었다. 처음부터 맡은 일을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게다가 공작가의 예산은 다른 귀족집안과는 규모와 용도가 확연히 달랐다. 에드가도 처음 공작의 업무를 맡았을 때 우왕좌왕했다. 후계자 교육을 받은 그도 어려웠는데 루비카는 오죽했으랴.

하지만 이건 지나치다.

어쨌든 내부예산의 권한을 가지고 있는 건 루비카다. 사사건건 그에게 허락을 받아야 한다면 루비카가 어떻게 맘 편히 공작가에서 지낼 수 있겠는가.

“너무 간섭하는군.”

칼은 바로 에드가의 의도를 눈치챘다.

“시녀장에게 전하겠습니다. 똑똑한 분이시니 바로 뜻을 알아채실 겁니다.”

칼이 고개를 깊이 숙인 후 이만 집무실을 나가려 했다.

“잠깐.”

에드가의 부르는 소리에 칼이 고개를 돌렸다. 에드가는 입가에 꽤 성격 더러워 보이는 미소가 머물고 있었다. 그건…… 에드가가 어린 시절 재미있는 장난을 준비할 때 종종 지었던 미소였다.

너무 오랜만에 보는 미소에 칼은 가슴 한쪽이 떨렸다.

“지금은 전하지 마. 나중에 내가 따로 말하지”

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거지? 칼은 의아한 와중에도 충실히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 * *

“흐음…….”

공작 부인으로서 첫날의 업무를 그럭저럭 끝낸 루비카는 심각한 표정으로 거실 테이블에 잔뜩 쌓인 팸플렛을 한 장 한 장 읽고 있었다. 모두 공작가에 끈을 대고 싶어 하는 디자이너들이 보낸 것이다. 개중에는 저 멀리 왕성에서 주로 활동하나 루비카가 부르면 수도의 모든 사업을 접고 오겠다는 자들도 있었다.

“그림만 봐서는 알 수가 없네.”

루비카는 팸플렛에 그려진 옷들을 꼼꼼히 보았다. 어떤 그림은 유명한 오페라 가수를 모델로 썼다고 설명에 적혀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림이다. 루비카는 실제 옷이 그림과 같을지 의심스러웠다.

“아무래도 그렇지요? 역시 옷은 실물을 봐야 해요. 아마 마님이 부르면 다들 한달음에 달려올 거예요.”

“하지만 기껏 왔는데 실망스러운 소식을 안기는 것도 미안해.”

“마님, 장사치들은 걱정하지 마세요. 마님이 한 번 보시기만 해도 클레이모어 공작 부인께서 극찬한 드레스라고 다른 귀족 영애께 소개해 팔아치울 걸요?”

앤의 말에 루비카는 웃음 참았다. 그런 걸 뭐라 하더라. 그래, 그녀의 아버지는 종종 고민하는 손님의 마지막 방아쇠를 당기기 위한 ‘귀여운 사기’라고 이를 칭했었다.

루비카는 팸플릿을 다시 꼼꼼히 살폈다. 확실히 수도의 디자이너들이 다르긴 달랐다. 영지 내 디자이너들이 보낸 팸플릿은 대체로 수수했으나 수도의 디자이너들이 보낸 것은 팸플릿 겉면부터 티가 났다. 금박과 은박으로 한껏 꾸며 현란할 정도였다. 또 팸플렛 속 디자인들이 영지 내 디자이너들에 대지도 못할 정도로 화려했다.

루비카의 마음은 이미 수도로 팔랑팔랑 날아가다 못해 팸플릿을 보낸 디자이너들에게 각각 다른 스타일의 드레스를 열 벌은 주문하고도 남았다.

‘하지만 지금 수도의 의상실에서 옷을 주문하면 나중에 사교계 시즌에 옷을 새로 주문하기 어려울 수 있어.’

이미 수도 의상실에서 최신 유행 스타일로 옷을 주문했는데 또 주문하는 건 지나치다는 의견이 들어올 수도 있다. 루비카는 더 큰 사치를 위해 지금은 참기로 정했다. 일단 클레이모어 영지 내 디자이너들에게 최신 유행과 상관없이 좋아하는 스타일의 옷을 주문하기로 결정했다.

“그래도 역시 수도의 디자이너를 부르는 건 부담스러워. 근방에 있는 디자이너 중에 고를래.”

앤은 재빨리 팸플릿 중에 클레이모어 영지 내에서 활동하는 디자이너의 것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마님은 생각이 정말 깊으시고 현명하시네요.”

“응?”

무슨 생각이 깊다는 걸까? 들을 이유가 없는 칭찬에 루비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루비카의 표정을 앤은 다른 식으로 해석하고 다 알고 있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마음만 먹으시면 수도 디자이너들을 불러서 최신 유행에 맞춰 화려하고 값비싼 옷을 주문하실 수 있는데 그보다 영지 내 디자이너들을 챙기기로 결정하신 거잖아요.”

그게 아니다. 절대 그게 아니다.

수수하고 우아하지만 공들인 드레스도 가지고 최신 유행에 따른 화려하고 값비싼 드레스도 가지기 위해 꾀를 내었을 뿐이다.

“하, 하하하.”

하지만 루비카는 앤의 말을 부정하기보다 웃음으로 마무리 지었다. 양심이 따끔따끔 아프긴 했다. 지금 자신을 저리 대단하다는 듯 취급하는 앤이 사교계 시즌에 의상실에 옷을 주문하다 못해 잔뜩 쓸어 담는 자신을 보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안 돼, 여기서 망설이면……!’

누가 뭐라 욕하든 마음껏 사치하기로 했잖아. 루비카는 자꾸만 흔들리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눈치 보지 않고 돈 쓰는 건 생각보다 힘들다.

왜 이렇게 무얼 사거나 투자를 하겠다고 결정할 때마다 평가가 따라오는 걸까? 올해는 아직 반절도 지나지 않았고 아직 공작가의 예산에 문제가 생길 정도로 돈을 쓰지도 않았다.

그런데 세사르의 연구에 투자하기로 결정하자 그건 그릇된다는 만류가 잇따랐고 영지 내 디자이너에게 옷을 주문하겠다고 하자 현명하다는 찬사가 따랐다. 루비카는 이상하게 칭찬을 들었으나 기분이 좋지 않았다.

“마님, 시녀장님. 만찬 시간입니다.”

마침 민망함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한참 고민하고 있을 때 하녀가 문을 두드렸다. 그 말에 앤이 황급히 정리하던 팸플릿을 놓았다.

“어머,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원래 이런 걸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돼.”

루비카는 들고 있던 팸플렛을 테이블 위를 정리하는 하녀에게 넘겼다. 그럼 주방에 미리 주문한 케이크를 배 터지게 먹어 볼까? 그런 느긋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각하께서 만찬을 함께 하신다고 하셨지?”

“네.”

“제니, 마님의 머리와 화장을 다시 봐 줘.”

그리고 앤은 향수를 새로 뿌리는 게 나을지, 식사 자리에 그건 적절한 게 아닐지 한참 야단법석을 부렸다.

“이렇게까지 준비할 필요가 있을까?”

“각하께서는 원래 만찬도 집무실에서 간단히 드시는 일이 많으셨어요.”

앤이 제니가 새로 다듬은 루비카의 머리에 장식 핀을 다시 꽂으며 말했다. 그녀의 얼굴은 심각하기 짝이 없었다.

“그야…….”

아침에 했던 식사를 생각하니 루비카는 또 체할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공작 내외용의 넓은 식당 정중앙 기나긴 식탁에 루비카는 홀로 앉았다. 식당에 대기 중인 시종, 하녀 모두 루비카의 일거수일투족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조금만 표정이 흐트러져도 음식이 입맛에 안 맞는지 안절부절못했다. 루비카는 자신의 표정 하나하나에 안색이 바뀌는 주변 사람들의 모습에 에드가가 왜 그리 변화 없이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여겼다.

자신의 표정 하나에 안절부절못하는 열 명 가까이나 되는 사람의 시선을 받으며 홀로 밥을 먹느니 차라리 집무실에서 간단하게 빵이나 먹는 게 더 속 편할 것 같았다.

“넓은 식당에서 혼자 먹기 불편했을 거야.”

“네, 하지만 저희가 겸상을 할 수도 없고……. 칼이 챙긴다고 챙겼지만 일이 바쁘시면 그조차 거르셨어요.”

앤이 루비카의 손을 잡고 간절한 표정으로 애원하다시피 했다.

“마님이 오신 덕에 드디어 만찬 시간이나마 식당에 나오시게 됐습니다. 마님, 정말 감사합니다.”

루비카는 잠시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뜸을 들였다. 앤의 표정은 간절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냥 첫날이니까 그 사람도 그냥 내 체면이 구겨지지 않게 구색을 갖춰 주는 것뿐일 텐데…….’

정확히는 에드가가 부인을 홀대한다는 평을 들을까 두려운 거겠지. 그러나 루비카는 앤 앞에서 차마 그런 시니컬한 소리를 할 수 없었다.

“앤, 감사 인사까지 할 필요는 없어. 앞으로 자주 식당에 내려와서 식사하라고 잘 이야기해 둘게.”

물론 그런 이야기를 하면 에드가가 벌컥 짜증을 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집무실에서 대충대충 먹었다간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른다. 지금이야 젊은 기운에 어떻게든 버티고 있으나 늙으면 훅 가는 수가 있다. 루비카는 경험으로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정말 감사합니다. 마님.”

“당연히 해야 할 말인걸.”

루비카의 말에 앤의 환히 웃었다.

“네, 역시 각하를 누구보다 아끼고 걱정하는 건 마님뿐이군요.”

앤의 비약에 루비카는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그 사람을 걱정한다고? 그럴 리 없어.’

루비카는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말을 간신히 삼켰다.

* * *

식당에 내려가 보니 놀랍게도 낮 동안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던 에드가는 먼저 자리 잡고 있었다. 루비카는 결혼식 날 보았던 예복도, 베르너 저택에서 본 격식을 차린 차림도 아닌 편안한 실내복을 입은 에드가의 모습에 숨을 삼켰다.

목단추를 금욕적일 정도로 꽉 잠그고 크라바트를 했던 여태까지의 모습과 달리 편안한 셔츠에 두세 개 정도 풀린 단추 너머로 보이는 쇄골이 색정적이었다.

물론 잠옷 차림도 보았지만 그때는 불이 다 꺼져 있어서 그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마치 낮처럼 찬란한 마석램프 아래에서 드러난 쇄골을 보니 어쩐지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늦었군.”

식전주를 마시며 에드가가 나른히 말했다. 검고 긴 속눈썹 아래 빛나는 투명한 푸른 눈이 그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 찰랑거리는 검은 머릿결이나 눈매는 퇴폐적인 분위기가 흐르는데 이상하게 눈동자는 마치 소년처럼 맑았다. 둘이 어우러지자 이지적인 느낌마저 났다. 아무리 봐도 적응이 안 될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였다.

“죄송합니다. 각하, 제가 마님을 붙잡는 바람에…….”

앤이 대신 사과했다. 에드가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시종이 의자 하나를 빼내어 공손히 손짓하였다. 에드가는 긴 식탁의 끝에 앉아 있었고 루비카의 자리는 바로 옆 ‘ㄱ’ 자로 꺾어진 곳이었다.

‘저어기 반대편 끝으로 안내해 주지.’

이 넓은 식당에서 혼자서 수많은 하녀의 시중을 받으며 식사를 했을 때와는 다른 거북함이 있었다. 루비카는 역시 에드가가 껄끄러웠다. 그와 한 공간에 있으면 불편했다. 게다가 어떤 말을 꺼낼지 종잡을 수 없어 내내 긴장해야 하는 것도 싫었다. 하지만 눈은 그럼 마음을 배신하고 에드가의 아름다움을 열심히 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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