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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42화 (42/212)

# 42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42화

* * *

“아이스크림이랑 케이크를 만들라굽쇼?”

클레이모어 공작가의 요리사로서 오랫동안 일한 스티븐이 반문했다. 하늘같은 공작 부인이 직접 주방까지 행차한 것도 놀라운 데 그녀의 주문이 그를 더욱 당황하게 만들었다.

“마님, 그런 건 생일이나 특별한 행사가 있는 날 만드는 게 아닙니까? 오늘은 아무 일도 없는 그저 평범한 날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세리토스 왕국은 사치를 혐오했다. 비싼 설탕을 잔뜩 넣어 만드는 케이크와 아이스크림은 특별한 날이 아니면 함부로 먹을 수 없는 음식이었다. 딱히 누가 정한 건 아니었으나 다들 그리해야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다른 나라 사람들은 그냥 먹기도 한다고 들었어.’

수도원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난 루비카는 그 말을 들었을 때 충격을 받았다. 단지 기분을 좋게 하기 위해 아이스크림을 먹는 사람도 세상에는 존재했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는 귀족의 식탁에는 항시 식후에 디저트라 불리는 케이크를 비롯해 달콤한 음식이 올라온다고 들었다.

‘언젠가 나도 그래 봤으면 좋겠다.’

화려했던 지난날을 자랑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루비카는 그런 소박한 꿈을 꿨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피곤하고 울적한 영혼을 달래기 위해 그 다짐을 실행할 예정이었다.

달콤한 케이크만큼 영혼을 충전시켜 주는 건 없다. 일단 몽글몽글 구름 같은 크림을 바른 겉모습만 봐도 기분이 너그러워지고 사르르 입안에서 사라지는 부드러운 단맛은 마음을 촉촉하게 만들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충실한 세리토스의 왕국민인 주방장이었다. 그는 특별한 날이 아닌데 왜 굳이 케이크를 만들어야 하냐고 계속 반문했다. 물론 공작 부인의 권력으로 그냥 닥치고 케이크를 만들라고 할 수는 있었다.

‘……그럼 맛없는 케이크가 나올 거야.’

무슨 일을 하든 동기가 없으면 사람은 대충하기 마련이다. 맛있는 요리를 먹기 위해서는 주방장의 기분을 맞춰 주는 것은 물론 동기부여를 해 주는 게 중요하다.

“오늘은, 내가 각하와 결혼하고 맞이한 첫 번째 날이자 공작 부인으로서 업무를 시작한 첫날인 무척 특별한 날이야.”

특별한 날이 아니면 특별한 날을 만들어 주면 되지. 루비카의 말에 주방장이 두 눈을 껌뻑였다.

“첫날이요?”

“첫 번째 날이라는 건 충분히 기념할 만하다고 생각해. 클레이모어 공작 부인으로서의 첫 번째 날을 기념하고자 하는데…….”

스티븐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루비카의 말에 이해는 했으나 망설이는 눈치였다. 루비카는 별수 없이 또다시 신의 이름을 팔기로 마음먹었다.

“신께서 대륙을 만든 첫 번째 날, 이를 기념하기 위해 꿀과 우유가 들어간 빵을 먹으라고 말씀하셨지. 이렇듯 첫 번째 날이라는 것은 신께서도 기념할 만하다고 여긴 거지. 생일 케이크를 먹는 이유도 그래서야. 세상과 마주한 첫 번째 날이니 신의 말씀에 따라 꿀과 우유가 들어간 빵의 일종인 케이크를 먹는 거야.”

“아, 그런……, 그렇군요. 그건 몰랐습니다. 생일에 케이크를 먹는 건 세상과 마주한 첫 번째 날이란 이유였군요. 세상에, 생일을 챙기는 건 신의 은총을 기리고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군요.”

그리고 주방장은 대부분의 세리토스 왕국민이 그렇듯 매우 독실한 신자였다. 스티븐은 납득을 떠나서 자신이 미처 놓친 신의 뜻을 알려 준 루비카에게 감격했다.

“확실히 그리 말씀하셨지요. 그래요, 첫 번째 날이라는 건 정말 기념할 만합니다! 마님께서 클레이모어 공작 부인으로서 맞이한 첫 번째 날을 기념하는 것은 신의 남긴 말과 일치하군요. 저는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요? 제 배움이 짧았습니다. 신의 뜻을 따르는 건 참 많은 공부와 노력이 필요한 일이로군요.”

기다렸던 대답이다. 루비카는 싱긋 웃었다.

“그럼, 만찬 마지막에 꿀이 잔뜩 들어간 아이스크림이랑 딸기 케이크를 내어 줄래?”

“걱정 마십시오!”

물론 루비카는 그 다음 날도, 그 다음다음 날도 특별한 날로 만들 예정이었다. 주방을 나온 그녀는 당장 앤을 찾아가 설탕, 아몬드 가루, 초콜릿 같은 걸을 추가 주문하라고 명령했다.

“갑자기 이런 건 왜 주문하시나요?”

“앞으로 쓸 일이 많을 것 같아서…….”

고개를 갸웃하던 앤이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단 게 자꾸 드시고 싶으신가요?”

“응? 아, 그렇다고 해야 할까.”

“신 과일 같은 건 안 드시고 싶으세요?”

앤의 저의를 알 수 없어서 루비카는 잠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갑자기 신 과일 같은 걸 먹고 싶으냐는 말을 꺼내는 걸까?

‘미리 입맛 같은 걸 알아내서 챙겨 주려는 걸까?’

원래 달고 새콤한 과일을 좋아하기도 했다. 단 케이크 같은 걸 먹을 때 신선한 과일이 곁들여지면 좋을 것 같았다.

“자두를 좋아하긴 하는데 아직, 철이 아니잖아.”

“절임 같은 건 구할 수 있을 거예요. 그렇군요. 자두랑 단 게 드시고 싶으시군요.”

앤이 루비카의 배를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루비카는 잠시 시녀장이 자신에게 몸매 관리를 하라고 신호를 보낸 건가 고민했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표정이 너무 부드러웠다.

“걱정 마세요. 잔뜩 주문하겠습니다.”

세사르와의 일 때문에 앤이 또 불필요한데 돈을 쓴다고 간언할까 봐 걱정하였는데 설득이란 것을 할 일도 없이 일이 너무 쉽게 흘러갔다. 루비카는 조금 찝찝한 기분이 들기는 했으나,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 * *

언제나와 똑같은 날이다. 집무실 창 너머로 들어오는 햇살도 똑같았고 공기가 품은 기운마저 똑같았다. 책상도, 종이도, 잉크도, 펜도 모두 똑같았다.

그러나 에드가의 마음은 이상하게 요동쳤다. 그는 집무실의 일을 처리하는 내내 수시로 창밖 너머 정원을 바라보았다. 알 수 없는 조급함이 그의 눈동자를 계속 움직이게 했다. 자신이 뭘 찾는지도 모른 채 그는 정원수 아래, 암석 위에 핀 이끼를 훑어보았다.

“각하.”

결재를 끝마치고 잠시 창밖 풍경을 보며 한숨 돌리고 있을 때 칼이 때마침 간단한 과일과 물을 가지고 왔다. 칼은 마치 집사를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그에게 필요한 것이 무언인지 알았다.

그리고 에드가는 그를 보자 내내 머릿속에 떠돌고 있었던 불유쾌한 것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건 궁금증이었다.

“루비카는 잘하고 있나?”

그리고 그 궁금증이 향한 곳은 루비카였다. 그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가 과연 속이 시커먼 클레이모어 식구들에게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에드가는 내심 걱정스러웠다.

그런데 대체 뭐가 걱정스러운 거지? 에드가는 잠시 미간을 좁혔다.

‘공작 부인으로서 기강을 잡지 못하면 곤란해.’

루비카가 기강을 잡지 못하면 그는 대체 뭐가 곤란해지는 걸까.

‘부인이 무시당하면 남편도 우습게 보이기 마련이지.’

그런 판단을 내리자 좁혀졌던 미간이 펴졌다. 루비카가 공작가에 적응하지 못하는 건 에드가의 자존심과 관련된 문제이니 그는 그녀를 마음껏 걱정해도 된다.

“앤의 말에 의하면 안부 인사를 하러 온 사람들의 부탁을 적절할 말로 잘 물리치셨다고 합니다.”

“부탁? 무슨 부탁을 했지?”

“자기가 개발한 물건을 대량 구매해 달라거나, 마님의 상류층 사교계 적응을 위한 가정교사가 필요할 테니 자신을 고용하라고 하거나, 겨우내 쓸 비료 구입을 본인에게 맡겨야 한다는 따위의 것입니다.”

펴졌던 에드가의 미간이 다시 좁혀졌다. 그가 전체적인 예산을 지정하고 시녀장 앤이 안살림을 도맡았을 때는 들어오지 않았던 청원이었다. 칼만 안 들었다 뿐이지 그의 친척들은 사실상 도적 떼였다.

그것도 자신이 이길 수 없다 싶은 상대인 에드가는 쏙쏙 피하고 갓 공작가의 부인이 되어 물정 모르는 루비카를 노리는 게 악질이었다.

“감히……!”

“마님께서 적절히 거절하셨으니 내일부터는 줄어들 것입니다. 아!”

에드가의 노기를 달래던 칼이 무언가 생각나는 표정을 지었다 입을 닫았다.

“아?”

“죄송합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쾅!’ 에드가가 책상을 내리쳤다. 운을 떼었다 입을 닫아 버리는 게 제대로 그의 신경을 거슬렸다. 에드가는 자신을 속이는 걸 극도로 싫어했다. 트라우마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칼은 자신의 실수에 혀를 찼다.

“말해.”

“마님께서 직접 이야기하실 겁니다. 직접 들으시는 게 두 분 사이에…….”

“칼!”

칼은 잠시 문밖으로 줄행랑을 칠까 고민했다. 그러나 역시 그에게 최우선은 공작 부인이 아닌 공작이었다. 칼은 자신이 도망치면 에드가가 업무에 집중하지 못할 걸 알았다.

아니, 사실 그건 핑계이고 칼은 그냥 에드가에게 더는 나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세사르 님의 장미꽃 개발에 투자하기로 하셨답니다.”

“장미꽃?”

에드가가 반문했다. 친척인 세사르 경의 꽃에 대한 열정을 알고 있었다. 그는 에드가에게 찾아와서도 한참을 투자를 권유했다.

다른 친척들은 그의 입에서 부정의 말이 한 톨이라도 나오면 눈치를 보며 꽁무니를 빼기 바빴지만 세사르는 달랐다. 어찌나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는지 에드가는 그만 밤을 새다 못해 창밖에 햇살이 들어오려는 데 기겁해 허락할 뻔했었다.

“귀찮게 달라붙어서 못 견디게 만들어 그리 결정한 건가.”

“아닙니다. 세사르 님이 말을 꺼내자마자 바로 결정하셨다고 합니다.”

“이유는?”

“……정원을 장미꽃으로 꾸미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정원을?”

에드가는 들고 있던 펜을 돌렸다. 정말 정원을 장미꽃으로 꾸미고 싶은 걸까? 곡예처럼 펜을 열 번쯤 돌렸을 때쯤 그는 펜을 거칠게 책상 위에 던지다시피 놓고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영문을 모르겠군.”

이상했다. 앞서 다른 친척들의 요청은 모두 물리치고 왜 뜬금없이 장미꽃인가. 세사르 경의 끈질김이야 끝내 준다만 정황을 들으니 끈질김에 굴복한 것도 아니었다.

“……시녀장은 마님의 결정에 부정적이었지만 저는 나쁘지 않은 결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집사의 말에 에드가가 미간을 좁혔다.

“앤이?”

“마님께서 새로운 장미꽃을 외국에 수출하시고 그 이익을 세사르 님과 나누기로 하셨습니다. 제 사견을 보태자면 수익성이 있다고 봅니다. 정말 세사르 님께서 개발에 성공하신다면 절대 손해 보는 일은 아닙니다.”

칼은 루비카를 변호하는 자신의 말에도 에드가의 미간이 펴지기는커녕 더더욱 좁혀지자 땀을 뻘뻘 흘렸다.

무엇이 공작의 기분을 상하게 한 걸까? 솔직히 칼은 앤에게 전해 들은 루비카의 말에 깜짝 놀랐었다. 그저 한 열정 넘치는 괴짜 식물학자의 얼토당토않은 일에 루비카가 수익성을 발견한 것이다.

“자네…….”

“네.”

“뜸 들인 것 치고 너무할 정도로 다 부는군.”

에드가의 지적에 칼의 얼굴이 푸르게 변했다. 그는 즉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됐네.”

“그…….”

칼은 잠시 침으로 목을 축였다. 여기까지 말해야 하나 싶지만 그는 이미 너무 많이 실토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아는 데까지 다 말하는 게 나을 듯했다. 또 그편이 공작 내외의 사이에 좋을 것 같았다.

“시녀장께서 각하께 말씀드리길 청했으니 기다리시면 마님께서 먼저 말을 꺼내실 겁니다.”

덧붙이는 칼의 말에 에드가의 안색이 눈에 띄게 나빠졌다. 그는 아까부터 이야기에 종종 등장하는 앤의 행동이 거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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