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41화
“그리고 개발을 하려는 데는 이 정도 돈이 듭니다. 밭이랑 온실을 만들 설치비용이랑 실험에 필요한 종자를 살 돈, 조수를 고용할 돈, 기구를 살 돈. 모두 최소한으로 쓴 겁니다. 마님, 장담컨대 정말 아름다운 꽃을 만들 수 있을 겁니다.”
무기 하나를 개발하는 돈에 절대 뒤지지 않을 비용을 세사르가 말했다. 한 발 떨어져 앤이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앤은 루비카가 지금까지 그랬듯이 거절하리라 여겼다.
그러나 루비카는 뜻밖에도 세사르가 내민 서류를 천천히 살펴보고 그가 한 새로운 장미에 대한 스케치는 면밀히 살피기 시작했다.
‘……아름다워.’
예뻤다.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하지는 모르겠으나 다른 건 몰라도 붉은 색에서 하얀색으로 그러데이션처럼 색이 변하는 장미꽃을 꼭 보고 싶었다.
루비카는 고개를 들어 세사르를 봤다. 불쑥 결론부터 말한 사람이라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그는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벌써 얼굴에 낙담하는 기운이 흐르는 게 거절을 한두 번 당해 본 게 아닌 듯했다.
루비카는 여태껏 찾아온 방문객의 투자 권유에 모두 ‘안 사요.’라고 답했다. 돈을 신나게 쓰고 싶긴 했으나 쓸데없는데 쓰고 싶지 않았다.
“투자할게요.”
그러나 사야 한다. 다른 건 몰라도 이건 꼭 사야 한다.
뜻밖의 말에 루비카를 제외한 그 자리의 모든 사람이 놀랐다. 세사르는 불끈 주먹을 쥐었다. 지난 2년 동안 그는 클레이모어 공작은 물론 그가 아는 돈이 좀 있다 싶은 사돈의 팔촌까지 만나 투자를 권유했다. 그러나 모두 거절당했다. 오늘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공략한 클레이모어 공작 부인이 그의 청을 들어주었다.
“마님! 안 됩니다.”
그러나 세상일이라는 게 항상 뜻대로 흘러갈 리 없다. 당장 그 자리에서 앤이 반발하고 나섰다. 앤은 여태껏 잘 거절해 왔던 루비카가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도와주겠다고 나서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차라리 하즈번의 호미를 사는 게 나았다. 장미꽃 같은 게 예뻐 봤자 어디 쓸데가 있단 말인가.
“고작 장미꽃 같은 데 투자하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시녀장님, 제 장미꽃을 고작 장미꽃이라고 표현하지 말아 주십시오. 이 장미꽃은 나오자마자 식물학계에 파란을 일으킬 겁니다. 꽃 중의 하나는 공작 마님의 이름을 따 길이길이 기억되도록 할 것입니다.”
간신히 얻은 투자처를 잃어버리고 싶지 않았던 세사르가 앤에게 항변했다. 루비카는 세사르의 설득 방식에 한숨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세사르가 여태껏 투자를 받지 못할 만했다.
갑작스레 장미꽃을 안기거나, 밑도 끝도 없이 성공하니 투자하라고 말하거나 모두 상대를 어떻게 하면 설득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일절 고민하지 않은 언행이었다.
앤이 걱정하는 것은 장미꽃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가 아니었다. 지난 3년 간 안주인이 없는 클레이모어 공작가의 살림을 꾸린 앤이었다.
게다가 올해는 공작의 갑작스러운 결혼으로 의도치 않는 큰 지출이 있었다. 거기에 장미꽃 투자까지 감행하면 비록 엄청난 타격은 아닐지라도 다소 허리를 졸라매야 할지도 모른다. 앤은 쓸데없는 곳에 대한 지출을 줄이고 싶었다. 그녀는 최대한 루비카를 위해 예산을 쓰고 싶었다. 장미꽃 때문에 루비카를 위한 실내복과 임부복, 곧 태어날 아기를 위한 옷과 거즈, 장난감을 양껏 사지 못하게 될 일만은 막고 싶었다.
“하지만 세사르 님, 처음에는 각하를 찾아가셨죠? 이건 연구에 대한 투자잖아요. 마님께서 관리하시는 안살림의 영역이 아닙니다. 이건, 공작 각하께서 관리하는 예산에 속하는 부분입니다.”
베테랑인 앤은 금방 명분을 찾았다. 저택의 관리를 갓 맡은 루비카의 입장을 고려하자면 무턱대고 안 된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대번 세사르의 얼굴에 먹구름이 끼었다. 이 식물밖에 모르는 학자는 사람을 설득하는 방법 같은 건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루비카는 달랐다. 그녀는 앤을 설득하려면 어찌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앤, 세사르 님이 정원을 꾸밀 꽃을 개발하는 걸로 치면 안살림의 영역이 아닐까?”
“오! 그 생각을 못했군요. 마님, 제가 개발에 성공하면 공작가의 정원을 장미나무로 꽉꽉 채우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화색이 돈 세사르가 루비카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앤은 그 기세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그렇다 쳐도 비용이 너무 많이 듭니다. 마님.”
“투자하는 형식이 되어도? 앤, 지금 남은 예산이 어느 정도 되는지 서류를 줄래요?”
“네.”
루비카는 앤에게 서류를 받아 남은 예산을 체크했다. 확실히 세사르가 요구한 비용이 많긴 했다. 그에게 투자하면 정말 앞으로 1년간 공작가의 살림이 빠듯해질 것 같았다.
보통의 귀부인이었다면 여기서 멈췄겠지만 루비카는 달랐다. 그녀는 탕진을 향해 달리는, 멈출 줄 모르는 폭주 마차였다.
‘가을까지 예산을 다 써야 해.’
겨울이 되면 수도 사교계 시즌이 된다. 루비카는 그때 무슨 핑계를 대서든 수도로 올라갈 생각이었다. 그럼 공작가의 예산을 다 쓴 상태라 할지라도 클레이모어 공작가는 공작 부인의 체면을 고려해 없는 지갑을 만들어서 라도 드레스 주문을 비롯한 각종 비용을 댈 것이다. 이 예산을 사교계 시즌 전까지 다 쓰려면 정말 열심히 써야 한다.
“아직 괜찮은 것 같은데, 정 불안하면 장미꽃을 팔 때 일정비율 이상의 이익금을 클레이모어 공작가의 앞으로 하는 건 어때? 세사르 님, 올 여름까지는 개발이 가능할까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구체적인 돈 이야기가 나오자 앤이 남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투자나 개발비 회수 같은 건 어느 정도 신분 있는 여인이 입에 올리기에 부끄러운 단어로 여겨졌다.
“하지만 이런 꽃 같은 걸 누가 살까요.”
“그야 우리나라 사람은 좋아하지 않지. 꽃은 사치스럽다며 그것보다 훨씬 비싼 암석으로 정원을 꾸미는 걸 좋아하잖아.”
“네, 맞아요. 마님, 그러니 부디 말씀을 거두어 주세요.”
무역상의 딸이었던 루비카는 돈을 입에 올리는 것이 부끄럽지 않았다. 또 수도원에서의 생활로 그녀는 상대방을 설득하는데 ‘돈’만큼 중요한 게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오늘 온 면담자들도 대부분 루비카에게서 ‘돈’을 뜯어내기 위해 온 자들이 아닌가. 루비카는 아버지가 투자자들을 설득했을 때 자주 썼던 수법을 떠올리며 자그마한 입술을 바지런히 움직였다.
“하지만 다른 나라는 정원에 꽃 심는 걸 좋아해. 게다가 장미는 묘목이니까 수출하는데도 큰 지장이 없어. 이런 독특하고 예쁜 장미는 충분히 사치품으로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허, 그 생각을 못했네요.”
생각보다 자신의 연구가 사업성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세사르가 눈을 끔뻑거렸다. 연구 열정에 불타오르던 그는 그저 식물을 연구하고 도감을 만드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새로운 식물을 이 세상에 탄생시키고자 하는 욕망에 따랐다. 이 예쁜 꽃이 얼마나 사업적인 가치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사실 루비카는 그냥 되는 대로 이야기한 것이었다. 희귀한 꽃이 비싼 값에 팔리기는 하나 그렇게 큰 시장은 아니었다. 어차피 세사르에게 투자금 이상의 돈을 버는 것을 기대하지도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 이상 벌어 오는 게 더 곤란하다.
루비카는 그저 공작가의 예산을 낭비할 겸 겸사겸사 아름다운 꽃이 세상에 탄생하는 것을 보고 싶었을 뿐이다.
“이런 예쁜 꽃이 클레이모어 공작가의 이름을 달고 세상에 나온다면 분명 가치가 있는 일일거야.”
“시녀장님, 수익의 80%를 투자자인 클레이모어 공작가 앞으로 하겠습니다!”
앤의 머리가 팽팽 돌았다. 그동안 주어진 예산으로 공작가의 살림을 챙기긴 했으나 투자니, 무역이니 하는 건 그녀의 영역 밖이었다. 결국 앤은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네, 마님이 그리 말씀하시니 알겠습니다. 다만, 이번은 큰 결정이니 각하께도 알리셔야 합니다.”
결국 앤의 허락이 떨어졌다. 루비카와 세사르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루비카는 즉시 세사르가 가져온 스케치로 시선을 돌리고 말을 건넸다.
“혹시 이 꽃들 말고 다른 꽃도 개발할 수 있는가?”
“원하는 게 있습니까? 식물 도감을 완성하면서 왕국 내 모든 꽃에 대한 정보를 정리했습니다. 토양과 기온에 따라 꽃의 색과 모양이 달라지신다는 거 아십니까? 아이디어를 주시고 연구비용만 대 주시면 됩니다.”
“그럼, 연보라색 같은 건…….”
앤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흔들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꽃이 가득한 정원이라……. 거기에 뛰노는 귀여운 에드가 2세를 생각해 보니 나쁘지 않을 듯했다. 루비카에게 완곡하게 거절해 달라고 요청했던 앤은 세사르의 열정을 알고 있었다. 저 괴짜의 연구자가 드디어 빛을 볼 거라고 생각하니 왜 괜스레 마음이 뜨뜻해지고 눈가가 시큰해질까.
‘그래, 지금까지 모든 말도 안 되는 요청을 거절하신 마님이야. 분명, 이유가 있을 거야. 마님의 돌아가신 아버님이 무역상이라고 하셨지. 어쩜 정말 마님의 말대로 저 장미꽃이 진짜 투자 가치가 있는 걸지도 몰라.’
앤의 추측은 틀렸다. 루비카는 이득을 볼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녀는 그저 아름다운 꽃이 보고 싶어서 그리 결정했을 뿐이다. 그러나 머지않아 루비카는 자신의 선택이 틀렸음을 깨닫는다. 그녀의 이 결정은 후일 세리토스 왕국을 비롯해 대륙 전체에 커다란 파란을 불러일으킨다.
모두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한 인간의 열정으로부터 비롯된 일이었다.
* * *
지겨운 면담 시간 끝에 찾아온 세사르와의 즐거운 시간은 오히려 루비카를 피곤하게 만들었다. 앤과 하녀들은 루비카가 편히 쉴 수 있도록 그녀를 공작 부인의 방으로 안내한 뒤 모두 물러갔다. 루비카는 잠시 소파에 반쯤 누웠다.
‘시녀도 새로 뽑아야 하고 침모도 뽑아야 하고 앞으로 주변에 어느 디자이너를 주로 이용할지도 정해야 하고. 아, 다음 주부터는 결혼식 기념 초상화도 준비해야 한다고 했었나.’
하품인지 한숨인지 알 수 없는 소리가 입술에서 새어 나왔다. 누가 귀부인은 팔자 좋게 남편이 벌어다 준 돈을 쓰기만 하면 된다고 했었나. 살림을 꾸리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기력을 소모했다. 게다가 이처럼 큰살림을 꾸리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돈이 적어도 문제고 많아도 문제였다. 그나마 수도원의 살림을 도운 경험이 있어 다행이었다. 정말 멋모르는……. 진짜 스물두 살인 자신이 클레이모어의 살림을 맡는 상황을 가정하자 머릿속이 아찔해졌다. 아마 끝없이 숫자가 늘어나는 장부에 기겁하고 아까 허즈번 부부 같은 사람들의 윽박에 눈치를 보며 결국 쓸모도 없는 호미를 샀겠지.
태산 같은 일을 생각하자 기분이 급격히 나빠졌다.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하다. 게다가 이런 살림은 잘하면 응당 그래야 하는 것이 되고 못하면 어떻게 이런 것도 못하냐는 소리를 듣기 쉬웠다.
‘기분 전환, 기분 전환이 필요해!’
두통에 시달리는 에드가가 희귀한 음료에서 마음의 위안을 찾는 것처럼 지금 루비카도 영혼을 충전할 시간이 필요했다. 루비카는 소파에서 쓱 일어나 그녀의 영혼이 이끄는 대로 걸어갔다.
영혼이 향한 곳은 주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