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40화
이윽고 칼은 루비카에게 생소한 ‘차’라는 것의 효용에 대해서 일장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차의 유래와 효과는 물론이고 어떤 유통경로를 통하는지, 또 그 귀한 것을 어찌 구했는지 소상히 읊기 시작했다.
“이 ‘차’가 유래된 곳에서는 여러 친구들을 모아 두고 함께 향과 맛을 음미하며 하늘과 땅의 기운에 대해서 논하고 명상을 하기도 합니다.”
“하암.”
루비카는 그 앞에서 대놓고 하품을 했다. 하지만 칼은 개의치 않고 설명을 이었다. 아무래도 진짜 ‘차’를 좋아하는 건 에드가가 아니라 칼인 듯싶었다.
“이처럼 뛰어난 음료가 아직 대륙에 넓게 퍼지지 않은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사실, 차의 진정한 맛을 내기 위해서는 좀 더 전문적인 도구가 필요하지만 각하께서도 이 정도로 두통을 가라앉히기에 충분하다기에…….”
루비카는 간신히 그의 주의를 돌릴 만한 주제를 발견했다.
“두통이 있으신 건가?”
“……네, 종종 심하게 아파하십니다.”
에드가의 상태가 화제로 떠오르자 칼이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루비카는 한숨을 쉬었다. 놀고 있는 것도 아니고 일하느라 바쁜 사람을 쫓아가 따지는 건 아닌 듯했다. 게다가 두통이 있다는 사람이 그나마 고통을 달래 주는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일은 언제쯤 끝나?”
“만찬은 참석하실 겁니다. 아침을 함께 하지 못한 것을 미안하게 생각하십니다. 각하께서 매우 바쁘시다는 걸 잊지 말아 주십시오.”
“괜찮아. 그보다 칼, 두통이 있는데 집무실에만 있는 건 오히려 좋지 못하니 산책 같은 기분 전환을 가끔 하는 게 좋다고 전해 줘.”
루비카의 말에 칼이 씁쓸히 웃었다. 밝은 하늘 아래의 산책, 그것을 누구보다 원하는 것이 바로 공작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루비카의 말을 에드가에게 전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하면 에드가가 기뻐하리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 전하겠습니다. 그보다 마님.”
칼이 잠시 주저하다 말을 꺼냈다.
“오늘은 오전부터 면담 일정이 잡혀 있다고 들었습니다.”
“네, 근방의 친척들이 제게 첫 문안을 하러 왔다 들었어.”
“주제넘은 부탁이라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부디 그분들 앞에서만이라도 각하를 칭할 때 말씀을 높여 주실 수 없습니까?”
루비카의 적갈색 눈이 칼과 마주쳤다. 에드가와 루비카 사이의 일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칼이 간청했다.
“각하께 많이 화가 나신 것은 알고 있습니다. 두 분 사이에서 어떤 호칭을 쓰고 어떤 말을 쓰시던 그건 부부 사이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마님, 마님은 각하의 부인이기 전에 클레이모어 공작 부인이십니다. 마님께서 저희 사용인이나 마님의 아랫사람인 친족 앞에서 각하에게 그런 말씀을 쓰시면 이를 다른 식으로 곡해할 수 있습니다.”
“화가 나서 그랬다는 건 부정할 수 없네요.”
“네, 각하께서도 말씀은 안 하시지만 미안하게 여길 겁니다.”
루비카는 잠시 생각했다. 어쨌든 그녀는 한미한 가문 출신이었다. 마음가는대로 행동해도 주변에서 다 받아 주는 공주님이 아니었다.
지금에야 그녀에게 호의를 가진 하인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나 친척들은 달랐다. 그들은 클레이모어 가문의 일족이라는 데 큰 자긍심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웬 준남작가 출신의 여자가 그들 머리 위에 서게 되었다. 그런데 심지어 공작에게 말을 편히 하고 있었다. 휴의 성서에서는 부부사이의 말투에 대해서 정의하지 않았으나 세간의 상식은 이와 달랐다. 피로연에서조차 그녀에게 적의를 숨기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결국 루비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칼.”
“감사합니다.”
루비카의 대답에 칼이 기쁘게 웃었다. 칼은 베르너 저택에서 루비카가 보여 준 태도에 내심 그녀가 클레이모어 공작 부인으로서의 업무도 잘 처리하리라 믿었다. 그리고 그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 * *
클레이모어 본관 저택의 2층, 공작 부인의 면담실에 다다라 앤이 내민 리스트를 본 루비카는 지금 에드가와 대화를 나누는 게 문제가 아니란 사실을 깨달았다.
“오늘 별도로 말씀을 나누실 분들은 총 스무 명 정도입니다.”
“스무 명? 방금 1층 응접실에서 서른 명 정도 되는 분과 인사를 나눴는데…….”
“네, 그분들과는 간단히 환담을 나누셨고 지금부터 만나실 분들은 8촌 이내의 가까운 친척분을 비롯해 마님께 공작가의 내부 살림에 대해 말씀을 올리고 싶다고 하신 분들입니다.”
이쯤 되면 단순히 안부를 나누는 게 아니었다. 일종의 업무라면 업무랄까.
‘그래, 수도원에서도 레페나 님이 청원하러 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걸 종종 도왔었지. 그거랑 비슷할 거야.’
그리고 첫 번째 면담자와 만나자마자 루비카는 그게 아니란 사실을 깨달았다.
“마님, 지금 클레이모어 영지 내에서 농민들이 쓰는 호미 말입니다. 무척 좋지 않습니다. 세로스 산맥의 철은 불순물이 많아요. 금방 녹슬어 버릴 겁니다. 이래서는 영지 내의 곡물 생산량이 현저히 떨어질 것입니다.”
허즈번 부인의 말에 루비카가 당황하며 앤에게 장부를 요청해 호미의 구입이력을 확인했다.
“하지만 호미는 고작 이주 전에 구입했는데…….”
게다가 그것도 허즈번 부인의 추천이었다는 사실을 채 지적하기 전에 허즈번씨가 말을 잘랐다.
“언제 샀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결국 그 호미는 금방 녹슬어 버릴 테니까요. 그에 반해! 제가 이번에 개발한 호미는 에난 산맥에서 나는 질 좋은 철을 썼습니다. 이 호미를 쓰면 클레이모어 영지 내 생산량이 눈에 띄게 좋아질 겁니다.”
“클레이모어를 위해서라도 제 남편이 개발한 호미를 사시는 게 좋을 겁니다.”
허즈번 부인이 단호히 대답했다. 그녀 옆에 남편도 배를 내밀고 으쓱거리며 팔짱을 꼈다. 그들은 호미를 구입하지 않는 루비카는 클레이모어를 생각하지 않는 사람인 것처럼 몰고 갔다.
루비카는 곧 감을 잡았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억울함을 호소하거나, 마음의 위안을 얻고 루비카와 친해지기 위해서 온 그런 자들이 아니라, 멋모르는 호구 하나 잡아 한몫 단단히 벌어 보려는 잡상인이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잡상인들의 바람과 달리 루비카는 호구가 아니었다. 그녀는 수도원에서 이런 잡상인들을 질리도록 만나 봤다. 이 경우 그녀가 해야 할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앤에게 받은 장부를 본 결과 호미는 지금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판단했네.”
안 사요.
“마님, 이 호미는 다른 호미랑 달라요. 당장 가을이 되면 생산량이 엄청 늘 겁니다.”
“생산량이 늘어나는 것보다 호미를 사는데 드는 비용이 더 많은 것 같은데. 구입은 불가능하네.”
그래도 안 사.
“하지만…….”
“내년에 지금 쓰던 호미가 녹슬면 그때 구매를 고려해 보지.”
그러나 싱글싱글 웃는 루비카의 표정은 구매를 고려해 보겠다고 했지 꼭 사겠다고 말하지는 않았다고 외치고 있었다. 결국 허즈번 부부는 기대와 달리 공작 부인이 만만치 않은 상대가 아니라는 것만 확인하고 물러났다.
물론 루비카는 공작가의 돈을 파산할 정도로 신나게 쓰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돈을 즐겁게 쓰고 싶지 호구 잡히고 싶진 않았다. 저런 사람들의 원을 들어주면 앞에서는 감사하다고 고개를 조아리고는 면담실을 나가자마자 새로운 클레이모어 공작 부인은 어리바리하고 세상 물정 몰라 속이기 딱 좋은 바보라고 소문내기 십상이었다.
왜 내가 돈을 쓰면서 바보 같다는 소리까지 들어야 하는가.
“마님, 정말 잘 하고 계세요.”
열아홉 번째 면담자라 쓰고 잡상인이라 읽을 자를 내쫓았을 때 앤이 따뜻한 커피를 내밀었다. 마침 머리가 아파왔다. 루비카는 이러니 에드가가 두통을 달고 살지. 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커피를 마셨다.
“하아.”
커피에서는 여태 맡아 본 적 없는 기분 좋은 향기가 났다. 약간의 과일 향과 아몬드 향? 분명 루비카는 여태 먹어 본 적 없는 값비싼 커피일 것이다. 루비카는 향을 음미하며 머릿속의 골치를 씻어 냈다.
“이제 마지막으로 세사르님만 만나시면 됩니다.”
“그 분은 어떤 분이지?”
혹 피로연장에서 만난 요정은 아닐까 두근거렸던 루비카의 마음은 앤이 내민 서류를 보자 구겨졌다. 웬 나이든 할아버지가 서류에 있었다.
“마님과 6촌쯤 되시는 분으로……좀 괴짜이십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잘 하셨으니 문제없으실 거예요.”
앤이 노골적으로 ‘안 사요.’라 말해 주길 바라는 티를 냈다. 루비카는 향긋한 커피 향을 맡으며 마저 서류를 보았다.
직업은 식물학자. 본인의 재산을 다 쓰다시피 해 세로스 산맥의 식물도감을 만든 업적 덕분에 아론의 아카데미의 정식 회원이 되었다. 군수 물자와 관련된 업종에서 주로 일하는 클레이모어 공작가치고는 특이한 이력이었다. 게다가 식물도감 때문에 전 재산을 다 날리다니……. 좀 이상한 사람인 건 사실이었다.
“내일도 방문객이 있을까?”
“앞으로 한 삼사일 정도는 쭉 오실 예정입니다.”
앤의 말에 루비카는 내심 안도했다. 아마 오늘 온 방문객 대부분은 클레이모어 공작 내외의 웃어른뻘 되는 8촌 이내거나 중요한 사업과 관련된 친척일 것이다. 면담 순서를 주먹구구식으로 잡았을 리 없다.
루비카의 요정과 같은 객식구는 안타깝게도 순서가 한참 뒤에 잡혔을 것이다. 루비카는 인내심을 가지고 요정을 기다리기로 했다.
“그럼, 앤. 다과를 따로 내고 세사르 님에게 준비되었다고 전해 줘.”
“네.”
루비카의 말에 하녀들이 테이블 위를 정리하고 시원한 물 한 잔과 커피 한 잔, 간단한 과자를 내왔다. 루비카는 마지막 면담자를 해치우고 이 지루한 시간을 끝내기로 마음먹었다.
“클레이모어 공작마님!”
곧이어 면담실의 문이 열리고 수염이 어깨까지 내려오는 식물학자 세사르가 들어왔다. 그는 이날을 위해 옷에 제법 신경을 쓴 듯했으나 하얀 수염 끝에 미처 털지 못한 흙가루가 남아 있었다. 하인 하나가 그가 가지고 온 무거운 자료를 보조 테이블로 날랐다. 하인은 이 괴짜에게 잡혀 아까운 시간을 날려 버리게 될 루비카를 퍽 안쓰럽다는 듯 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가 버렸다.
세사르는 여태 면담한 친척들과 확실히 좀 달랐다. 루비카는 그가 자기 앞에 불쑥 내민 붉고 하얀 탐스러운 장미꽃에 미소 지었다. 그녀는 바로 가까운 하녀를 불러 장미꽃을 넘겼다.
“화병에 꽂아 줘.”
“아니, 아닙니다. 마님, 그건 앞으로 말씀드릴 이야기의 중요한 자료입니다.”
“네?”
“에드가 그놈……, 아니 각하는 제 이야기를 도통 들어 주지 않아서 말입니다.”
루비카는 다소 독특한 억양으로 말하는 세사르를 당황스런 기분으로 바라봤다. 곧이어 그는 서론, 본론 다 집어던지고 결론부터 말했다.
“장미꽃 개발에 투자해 주십시오!”
“네?”
“이건 반드시 성공합니다!”
“무슨?”
“이 하얀 장미와 붉은 장미를 이용해 새로운 종을 만들려 합니다. 여기, 제가 직접 한 스케치입니다. 가운데는 붉고 가장자리는 하얗게 번지는 장미꽃, 또는 하얀 바탕에 붉은 얼룩무늬를 품은 장미꽃을 만들려합니다. 아, 물론 원하시면 붉은 바탕에 하얀 무늬 장미꽃도 개발해 보도록 하지요.”
루비카는 멍한 눈으로 세사르를 바라봤다. 다짜고짜 결론부터 말한 세사르는 어찌 그것이 가능한지에 대해서 전문적인 용어를 써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너무 어려운 단어를 써서 오히려 이해하기 힘들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