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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39화 (39/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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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39화

저주와 축복은 종이 한 장 차이라고 했었나. 에드가는 주변에서 칭송해 마지않는 자신의 얼굴이 미웠다. 사랑이란 핑계로 자신에게 강요되는 모든 애정이 귀찮고 고통스러웠다.

그만, 그만 자신을 좋아하지 말라고 외치고 싶었다.

어머니는 원망스럽지 않았다. 아니, 그녀가 그동안 보여 준 애정을 생각하면 에드가는 마지막에 자신을 바라본 그녀의 무감정한 눈동자가 오히려 아팠다. 얼마나 상처받았기에, 얼마나 고통스러웠기에 그런 저주를 자신에게 내렸던 걸까.

차라리 발에서부터 시작된 마비가 빨리 심장까지 올라와 이 지긋지긋한 삶이 끝나기를 빌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삶을 포기하지 못했고 반지를 자신에게서 떼어 내지 못했다.

오히려 반지보관함이 반질반질해질 정도로 이를 들여다보았다.

-저주를 풀어요. 그게 왕녀님을 위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유모가 남긴 그 한마디 때문이었다. 에드가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음이라는 기쁨 속에 자신을 내던지지 않은 것 오직 그 한마디 때문이었다.

그 말은 대체 무슨 의미였을까?

물거품이 되어 버린 어머니를 아뮬렛에 담아가면서 그녀가 죽었냐는 말에 대답해 주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거기에 카렌이 말을 하다 말고 고개를 흔든 부분이 걸렸다. 그녀는 그가 영생을 살 수도 있었다고 말했다.

대체 무엇이, 어떤 조건이 그리 할 수 있게 만들기에 그런 말을 꺼낸 것일까.

그리고 어쩌면……, 어쩌면 자신의 저주를 풀면 물거품이 된 그의 어머니가 되살아날 수도 있지 않을까?

그것이 에드가가 차마 놓을 수 없는 희망의 끈이었다. 에드가는 일하는 와중 틈틈이 님프에 대한 기록과 연구 자료를 찾았다. 그 중 유의미한 것도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님프가 대륙에 출몰한 일을 드물었으며 대부분의 이야기는 구전되는 와중에 많이 각색된 상태였다.

그의 어머니는 대체 어떤 님프였을까? 님프와 혼혈이라지만 저주스러울 정도로 지나치게 아름다운 외모 외에는 어떤 힘도 가지지 못한 에드가는 망망대해 위에 떠 있었다.

그렇게 3년이 흘렀다.

그 사이에 무릎까지 마비가 올라왔다. 마비가 심장까지 올라오는 데는 앞으로 채 10년이 걸리지 않을 것 같았다. 국왕은 이대로 클레이모어 공작가의 명맥이 끊길까 노심초사하였다. 그때, 반지가 사라지고 ‘루비카 베르너’라는 이름이 적힌 쪽지가 반지보관함에 나타났다.

에드가는 바로 그녀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혹, 그녀가 님프와 어떤 연결고리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내심 기대했다. 그러나 올라온 보고서에 그런 내용은 없었다. 다만 그녀는 비극이 일어났던 그때의 자신과 똑같은 스물두 살이었다.

혹시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혹, 혹여나…….

그러나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누군가를 사랑해 삶의 기회를 대신 주었으리라고 짐작하기는 어려웠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할 거라고? 아무리 먼 미래라 할지라도 그건 불가능했다. 그는 애정이라든가, 사랑이라든가, 그런 단어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끔찍했으니까.

그녀는 아마 먼 미래의 자신이 보낸 단서일 것이다. 에드가는 어떤 애정이 없음에도 루비카에게 청혼했다. 그리고 그녀를 만나러 가는 동안 내심 먼저 미래의 자신에 관해 이야기를 꺼내 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루비카는 그와의 결혼을 원하지 않을 수준이 아니라 도망치려 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는 어떤 그리움도 찾을 수 없었다.

‘혐오’라는 감정이 읽히긴 하였으나 그건 결코 아는 사람을 바라보는 눈이 아니었다. 게다가 루비카는 ‘아르망’이란 사내를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녀가 가지고 있던 물건 중에는 푸른 반지도 없었다.

대체 미래의 자신은 무슨 이유로 ‘루비카 베르너’라는 쪽지를 자신에게 남긴 걸까? 그녀는 단서가 맞긴 한 걸까? 하지만 에드가는 그녀를 놓을 수 없었다.

루비카는 그가 망망대해 속에서 잡은 유일한 지푸라기였다. 심지어 그 지푸라기는 자신의 아름다움에 얼굴을 붉히면서도 그를 거부했다. 그가 아는 모든 사람이, 심지어 연인이 있었던 이들조차 그와 어떤 연결고리가 생기면 사랑을 버리기 일쑤였었는데 루비카는 그러지 않았다.

그의 생애 처음으로 시기심이 일어났다. 한편으로 루비카가 얼마나 그의 유혹에 버틸지 궁금했다. 그래서 도발했다.

-당신이 내가 안아 주길 원하면 모른 척하지 않겠소.

자신 있었다. 그의 아름다움에 넘어오지 않은 사람은 여태까지 없었다. 그는 루비카가 얼굴을 붉히며 흔들리라 예상했다. 실제로 그의 미소 하나에 과거의 연인을 손쉽게 버리는 이들이 넘쳐 났다.

그러나 루비카는 그의 도발에 넘어오기는커녕

-상대가 원해도 사랑하지 않으면 해선 안 되는 거야! 이 걸레 같은 놈아!

그리 외치고 뺨을 때렸다.

에드가는 충격을 받았다. 그저 뺨을 맞았기 때문에도, 루비카가 그의 유혹을 거부했기 때문도 아니었다. 여태까지 그의 주위 사람은 사랑을 받아 주지 않은 그가 냉정하다고 말했다. 상대에게 조금만 친절해지라고 말했다.

그럴 때마다 에드가의 마음에 황량한 바람이 불어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들에게 그럼 아버지가 한 일이 과연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느냐고 소리 지르고 싶었다. 그러나 루비카는 상대편이 원한다고 해도 사랑하지 않으면 해선 안 되는 일이라고 일갈했다.

긴 암흑 속에서 한 줄기 빛이 내려왔다.

* * *

“이런 참, 모두 늦잠을 자 버렸다니. 어쩜!”

“보초 서는 시종마저 졸아 버렸대요. 집사님이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이럴 때가 아니야! 빨리 마님께 가도록 하자. 첫날부터 실망하게 할 수 없어!”

앤의 외침에 하녀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평소보다 늦은 아침에 혹 루비카가 먼저 일어나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그렇다고 준비를 소홀히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제니, 루비카님은 마차에서 올리브비누를 쓰셨다고 했지?”

“네. 맞춰서 준비했습니다.”

“물 온도는?”

“지금 살짝 뜨거운 게 마님의 방에 도착할 때쯤 적당한 온도가 될 듯합니다.”

“좋아.”

앤을 선두로 다섯 명의 시중 하녀들이 공작 부인의 방으로 갔다. 그들은 가는 내내 혹 자신들이 너무 늦은 게 아닐지 시종일관 걱정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루비카는 그들이 도착하고 나서야 침대 위에서 간신히 일어났다.

“늦잠을 자 버렸네요.”

루비카는 자신이 깨길 기다리다 그들이 세숫물을 가지고 온 줄 알고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잠옷을 입은 채로 대야에 손을 담갔다. 루비카가 움직일 때마다 하녀들은 아주 익숙한, 하지만 이 저택에서 단 한 사람 밖에 사용하지 않는 향기를 맡았다.

‘각하께서 주무실 때 쓰는 향수야.’

어쩜 이렇게까지 향기가 나려면 얼마나 오랫동안 붙어 있어야 하는 걸까. 앤을 비롯한 하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루비카가 오기 전 그들은 여색을 멀리하는 공작에 대해 내심 걱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쩌면 그는 그들의 상상 이상으로 절륜한 건지도 모른다.

“피곤하시진 않으신가요?”

“조금?”

질문의 의도를 채 파악하지 못하고 루비카는 손을 씻으며 대답했다.

“목욕을…… 하실 건가요?”

앤이 일단 먼저 말을 꺼냈다. 나이도 있고 결혼 경험이 있는 자신이 질문하는 게 적절하다 여겼기 때문이다.

“목욕?”

“그, 음. 각하의 향이 강해, 가볍게 씻으시는 게…….”

그제야 루비카가 자신의 몸을 감싼 향을 눈치챘다. 순식간에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아무 일도 없었어!”

외치고 후회했다. 대체 이 자리의 누가 그 말을 믿어 줄까? 오히려 분위기를 더욱 어색하고 낯 부끄럽게 만들 뿐이었다.

“아, …… 네.”

앤과 제니가 민망한 듯 시선을 피했다. 그들은 분명 무슨 일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게 틀림없었다.

몸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에드가는 약속대로 그녀를 건드리지는 않은 듯했다. 하지만 그녀도 맡을 수 있을 정도로 진동하는 그의 향수는 밤새 에드가가 그녀를 껴안고 잤음을 바보라도 알 수 있게 만들었다.

‘잠이 쏟아지는 바람에 잘 때 포옹하는 건 안 된다는 소리는 못했지.’

미꾸라지처럼 쏙쏙 잘도 빠져나가는 술수에 역시 클레이모어 공작 각하라고 박수를 쳐야 할지. 루비카는 분노를 참으며 결국 아침부터 목욕을 했다.

* * *

“칼!”

집사를 부른 루비카는 손님을 맞이하기에 부족함 없는 드레스를 입고 머리와 얼굴의 단장을 완벽하게 마친 상태였다. 마음 같아서야 그녀는 샤워를 마치자마자 에드가를 찾아가 그의 멱살을 잡고 싶었다. 그러나 앤과 하녀는 아침 단장을 마치기 전까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마님, 무슨 일이십니까?”

“에드가는 어디 있어?”

“각하 말씀입니까? 집무실에 계십니다.”

“당장 집무실에 가자!”

올 것이 왔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라 여겼으나 바로 결혼 다음 날 일 줄은 몰랐다. 칼은 마음을 다잡고 루비카를 바라보았다.

“안 됩니다. 마님, 각하께서는 일하는 동안 무척 예민하십니다. 저 이외의 그 누구도 집무실에 들어오지 말라 명하셨습니다.”

칼의 목소리가 무척 단호해 루비카는 깜짝 놀랐다.

“나도 안 되는 건가?”

“안 됩니다. 지금 특히 예민하신 시기입니다.”

아무래도 정말 안 될 것 같다. 루비카는 칼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그가 쟁반을 들고 있단 사실을 깨달았다.

“그건 뭐지?”

“각하께서 자주 드시는 정신을 맑게 깨우는 음료입니다.”

“아, 커피구나. 커피는 내리는 방법은 나도 알아. 잠깐 음식을 놓고 나오는 일 정도는 내가 대신 해도 되겠지?”

루비카의 속셈을 읽은 칼이 빙그레 웃었다.

“커피가 아닙니다. 마님, 각하는 예민하셔서 커피를 드시지 못합니다. 이건 저 먼 사막을 거쳐 온 매우 희귀한 나뭇잎을 말린 것의 일종입니다.”

“나뭇잎?”

쟁반 안의 작은 접시에 담긴 것들은 나뭇잎을 말렸다고 믿기에는 너무 작고 색이 짙었다.

“나뭇잎으로 무슨 음료를 만든다는 거야?”

“커피처럼 물에 우려 드십니다.”

“그럼 나도 만들 수 있겠네.”

실제로 쟁반에는 작은 컵과, 주전자, 스푼 등 커피를 우릴 때와 비슷해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안 됩니다. 이 ‘차’라 불리는 것은 아주 섬세합니다. 우릴 때의 물의 온도와 공기의 습도에 따라서 전혀 다른 맛을 냅니다.”

“차?”

“네, 차나무에서 생산되어 그리 불립니다. 심신을 안정시키고 기억력 향상에도 무척 도움이 됩니다. 무엇보다 커피처럼 자극적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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