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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38화 (38/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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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38화

카렌은 에드가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그를 가볍게 뿌리쳤다. 평소였으면 그에게 아무런 영향도 못 끼칠 힘이었으나 다리가 불편한 에드가는 바로 무너지듯 쓰러졌다. 펜듈럼을 가지고 그 자리에서 미련 없이 떠나려던 카렌은 문득 문 앞에서 뒤돌아보았다.

“그녀를 원망하나요?”

에드가는 고개를 저었다.

“원망하려면 아버지를 원망하겠어.”

진심이었다. 비록 자신에게 저주를 걸었으나 에드가는 어머니를 원망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녀가 느낀 분노와 배신감, 그리고 고독. 에드가는 그녀와 조금 다르지만 비슷한 걸 아버지의 치부를 목격했을 때 느꼈다.

얼마나 절망스러웠으면 자신에게 저주를 걸었을까?

그의 몸의 반쪽이 저 더러운 남자에게서 유래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에디.”

카렌이 쓰러져 있는 에드가에게 돌아왔다. 만약 그의 입에서 그녀의 왕녀를 원망하는 말이 나왔다면 미련 없이 이 자리를 떠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카렌이 에드가의 발을 가리켰다.

“저주를 풀지 않으면 여기에서 시작된 마비는 점점 몸을 타고 올라갈 거예요. 그래서 심장까지 다다르면 그대는 목숨을 잃게 되겠죠.”

“그 전에 잃을 수도 있겠지.”

에드가가 씁쓸히 대꾸했다. 님프의 저주를 받은 자신을 세상이 살려 둘 것 같지 않았다.

“당신의 몸의 절반에는 님프의 피가 흐르고 있어요. 만약 왕녀님의…….”

거기까지 말한 카렌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말을 꺼낸 걸 후회하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원래대로라면 당신은 영생을 살 수도 있었어요. 그러나 아버지의 죄로 영생은커녕 그대는 바람 앞의 등불이 되었습니다.”

카렌이 주머니 속에서 보석함을 꺼내 열었다. 거기에는 하늘을 쪼개 만든 듯한 푸른 반지가 들어 있었다.

“영생을 살지 못하는 당신에게 대신 기회를 한 번 드릴게요. 생명이 다하려 할 때, 이 반지를 가슴 위에 올리고 이름을 말하세요. 그럼 이때로 돌아올 겁니다.”

“기왕이면 아버지가 불륜을 저지르기 전으로 돌려보내 주면 안 되나?”

“그건 제 능력 밖입니다.”

씁쓸한 표정의 카렌이 에드가를 뺨을 다정히 쓰다듬었다.

“에디, 저주를 풀어요. 그게 왕녀님을 위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에드가는 물거품이 된 어머니를 담은 펜듈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주는 어떻게 해야 풀 수 있나?”

“그건 스스로 찾아야 합니다. 섣불리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는……. 에디,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군요. 저주와 축복은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걸 잊지 말아요.”

그 말을 끝으로 카렌이 에드가 앞으로 툭 쓰러졌다. 그녀의 몸에서 인간의 온기가 빠져나갔다. 곧이어 물거품을 담은 펜듈럼이 천천히 유영하듯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그건 무슨 존재였을까? 님프였을까, 아니면 님프를 수호하는 것이었을까? 그도 아니면……. 에드가는 카렌이 남기고 간 푸른 반지를 바라보았다. 삶을 다시 살게 해 준단다.

그러나 오늘의 비극을 막지 못한다면 그가 삶을 다시 살 이유가 있을까?

* * *

“도련님!”

뒤늦게 칼이 몸을 묶던 끈을 풀고 에드가에게 왔다. 에드가는 그가 자신을 건드리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언제부터 아버지의 이 더러운 짓거리를 도왔지?”

서릿발 같은 물음이었다. 칼은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이 판국에 거짓말을 하는 건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클레이모어 공작이 죽은 지금, 그가 앞으로 섬겨야 할 사람은 이제 에드가였다.

“……10년 전부터였습니다.”

“하.”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10년 전은 그가 아카데미에 입학했던 시기였다. 아들이 걱정된 공작 부인은 종종 긴 여행을 무릅쓰고 아론의 아카데미로 왔다. 공작은 항상 그럴 때마다 일이 바빠 가지 못한다고 사과하며 대신 이왕 가는 거 마음껏 놀다 오라고 여행자금을 넉넉히 주었다. 모두 그런 아버지를 가리켜 마음이 너그럽다고 말했다. 어느 남자가 부인에게 그러냐고 그랬다.

하지만 공작 부인은 에드가의 곁에서 종종 외로운 얼굴을 했었다.

-이건 네 아버지에게 가져가면 좋아하겠구나.

이국의 특별한 물건을 발견할 때마다 그리 말했다. 여행할 때마다 꼭 공방에 들어 새로운 만년필은 없는지, 좀 더 다루기 좋은 잉크는 없는지 항상 꼼꼼히 챙겼었다. 떨어져 있어도 어머니는 항상 아버지를 생각했다.

그런데 그때 아버지는 일을 핑계로 이 별장에서……. 에드가는 그 뒤를 떠올리기도 싫었다.

“어머니에게 말하기 그랬다면 적어도 앤이나 내게 말해 도움을 요청해 막아 보지 그랬나.”

“제발 도와 달라고 하셨습니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에드가가 느낀 고통이란 차마 말로 정의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이제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었다.

“클레이모어는 이제 다 끝났군. 님프의 저주를 받은 나 같은 건.”

“아닙니다, 각하. 카렌이 한 말을 들었습니다. 저주를 풀면 됩니다. 그녀가 도련님에게 반지를 남긴 것도 저주를 풀 기회를 한 번 더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칼! 이 방의 광경을 봐. 이걸 누구에게 어떻게 설명할 건가.”

“사고로 위장하면 됩니다. 돌아오는 길에 마차 사고가 있었다고 하지요. 어차피 목격자는 저와 각하뿐입니다.”

집사의 눈이 기묘하게 반짝였다. 에드가는 이 충실한 집사에게서 일종의 광기를 보았다.

“도련님, 저희 가문은 대대로 클레이모어 공작 각하를 섬겼습니다. 이제 도련님이 공작이십니다. 저는 절대 각하께서 위험에 처하는 일은 만들지 않을 것입니다.”

에드가는 칼의 얼굴에 침을 뱉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그러나 에드가는 겨우 걸음마를 했을 때부터 클레이모어 공작가의 후계자로 키워진 사람이었다. 클레이모어 공작가의 이름으로 진행되고 있는 연구, 거기에 달린 돈과 사업이 어느 정도였더라.

단순히 돈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거기에 걸린 수많은 사람의 일자리……. 연구가 성공적으로 진행되지 않으면 당장 수많은 사람이 길거리에 나앉게 된다.

세리토스 왕국은 전쟁 무기를 수출해 부족한 식량 사정을 메꾸고 있었다. 에드가는 자신의 누리는 모든 것의 책임을 통감하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야 에드가는 아버지의 더러운 짓을 도운 칼을 죽이고 그의 삶도 끝내고 싶었다. 그러나 그에게 죽음이란, 그리 쉽게 허락된 것이 아니었다.

* * *

밤이 되자 거짓말처럼 발의 마비가 풀렸다. 에드가는 욕지기를 삼키며 아버지에게 옷을 입혔다. 칼은 불륜을 저지른 여인의 신원을 알아볼 수 없도록 얼굴에 처리한 뒤 공작 부인의 옷을 입혔다.

그리고 공작과 공작 부인으로 위장한 여인, 카렌의 시신을 마차에 태웠다. 에드가는 점점 그의 마음 깊은 곳의 따뜻한 무언가가 사라져 가는 것을 느꼈다. 칼은 아무 말 없이 이 일을 도왔다.

에드가는 그런 칼에게서 끝없는 구역질과 혐오를 느꼈다. 그러나 그는 칼의 도움을 받았다. 칼을 증오함에도 현실적으로 그가 내린 판단이 옳다고 에드가의 이성은 판단을 내렸다.

혼란 속에서 에드가는 별장 근처 절벽으로 마차를 밀어 버렸다. 절벽에 톡 튀어나온 바위에 몇 번이나 부딪친 마차는 이윽고 까마득한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쾅!’

마차가 부서지는 소리가 절벽에 부딪히고 부딪쳐 메아리가 되어 에드가에게 닿았다. 그날, 마차와 함께 에드가가 그나마 믿고 있었던 사랑이란 것에 대한 믿음도 부서졌다.

“저주와 축복은 종이 한 장의 차이지.”

그의 삶이 그랬다. 모두 그에게 축복받았다고 말했다. 좋은 신분, 엄청난 부, 완벽한 두뇌 그리고 아름다운 외모. 그러나 에드가에게 그것은 저주였다.

그의 주변에는 그가 가진 달콤한 내음에 꼬인 사람들로 넘쳐 났다. 그들은 질척거릴 정도로 에드가를 갈구하고 욕망했다. 하지만 에드가는 그들의 욕망 서린 눈에서 자신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들이 진실로 욕망하는 것은 에드가가 가진 것이었다. 그들은 에드가 그 자체에는 관심이 없었다. 에드가를 제 손아귀에 넣은 자신을 욕망할 뿐이었다.

-너는 정말 자랑스러운 내 아들이다. 존재만으로도 내게 기쁨을 주는구나.

그동안 에드가는 아버지의 그 말에 얼마나 안심했던가. 심지어 그는 에드가가 뛰어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그가 완벽하지 않아도 그를 자식으로서 사랑한다고 말했었다.

-에디, 네 지나친 아름다움 때문에 잠시 이성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너무 미워하지 말렴.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아름다움을 지닌 그의 어머니는 그가 가진 고통을 유일하게 이해해 주는 사람이었다. 어느 누가 이해해 줄까. 자신에게 애정을 퍼붓는 사람 때문에 곤란과 고통을 느낀다고 말하면 모두 복에 겨운 소리를 한다고 말할 뿐이었다.

지난날, 그를 둘러싼 욕망 속에서 에드가의 버팀목이 되어 준 것은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어린 시절부터 그를 보아온 클레이모어 식구 몇몇뿐이었다.

에드가는 적어도 그들의 애정과 사랑은 믿었다. 그러나 오늘 모든 것이 모래로 만든 탑처럼 부서졌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그는 아버지에게 묻고 싶었다. 어머니를 진정으로 사랑하였냐고.

그는 아버지와 마석마차 앞에서 싫어하는 어머니의 의사를 무시하고 지분거리던 기사와의 차이점을 찾을 수 없었다. 이제 그의 옆에 남아 있는 건 광기에 가까운 클레이모어에 향한 사랑을 가진 집사뿐이었다.

아니, 그걸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에드가는 칼에게 그리 말하고 싶었다. 진정으로 그의 아버지를 아꼈다면 그를 말리고 주변에 도움을 청했어야 한다고. 칼은 그저 클레이모어 공작가를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 최우선으로 두는 자신에게 취해 있을 뿐이었다.

지긋지긋했다.

모두 비틀렸다. 그의 주위를 감싼 것은 비틀린 애정뿐이었다. 그의 어머니의 말이 맞았다. 지나친 아름다움을 독이다. 이 세상에는 사랑과 욕망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 넘쳐 났다. 그들은 원하지 않는 애정을 퍼붓고 돌려주지 않는다고 원망했다.

‘너무 하는군요. 엘리가 당신을 좋아하는 걸 알고 있지 않나요? 그냥 한번 웃어 주기만 하면 되잖아요.’

‘당신은 쓸데없이 냉정하군요.’

‘펠릭스는 그저 그대와 친구가 되고자 할 뿐이었는데 꼭 그래야 했소?’

모두 그가 나쁘다고 말했다. 애정을 돌려주지 않는 그가 냉정하다고 말했다. 늦은 밤의 회의가 끝나고 짧게 들린 커피하우스나 시가 보관실에서 남자들은 그리 말했다. 여인의 사랑에 보답 한번 해 주는 게 뭐가 그리 어렵냐고 아주 잠시 도덕을 내려놓고 서로에게 즐거움을 주고 헤어지면 그뿐 아니냐고.

그리해 봤자 그가 잃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조언했다.

그럴 때마다 에드가는 아버지가 떠올랐다. 여인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매달려서 어쩔 수 없이 그리했다는 아버지.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그의 아버지는 에드가보다 더 따뜻하며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그런 게 사랑일까?

그런 게 애정일까?

그를 둘러싼 주변에는 애정이 넘쳐 났으나 그의 마음은 공허했다. 그의 외부는 마치 꿀을 바른 듯 질척거렸으나 그의 내부는 광활한 사막과 같았다.

‘지나친 아름다움은 독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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