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37화
“네.”
“저런 놈들은 바퀴벌레처럼 나타나니 지겨울 정도입니다.”
“에드가.”
공작 부인이 달래듯 에드가의 뺨을 어루만졌다. 자신만큼 길고 차가운 손가락. 에드가는 새삼 어머니를 바라봤다. 햇빛을 받아 찬란히 반짝이는 금발과 삼라만상을 담은 듯한 눈. 세월의 흔적이 비껴간 듯한 창백하지만 밝은 피부.
“이해하렴. 우리는 지나치게 아름다운 존재니까.”
공작 부인의 말에 에드가가 설핏 웃었다.
“다른 사람이 하면 자만으로 들릴 소리이나, 어머니가 하니 그냥 사실이군요.”
“후후.”
공작 부인이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그녀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에드가의 팔목을 잡았다.
“지나친 아름다움은 때때로 독이 되지. 어떤 자들은 그저 과시의 수단으로 쓰려 하고 어떤 자들은 이쪽의 마음 따위는 무시하고 사랑을 받아 달라고 하지. 세상에는 욕망과 사랑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이 있어. 에드가, 나는 걱정스럽구나. 네가 진실로 너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지.”
그가 철이 들기 시작한 무렵부터 종종 했던 말이다. 에드가는 그의 팔목에 올라온 공작 부인의 손을 툭툭 쳤다.
“걱정 마십시오. 어머니, 어머니가 아버지를 만났듯 저도 그런 사람을 만날 테니.”
공작 부인이 환히 웃었다.
“그래. 내가 그이를 만났으니 휴 신의 은총 아래 너도 반드시 진실한 사랑을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럼 어서 빨리 아버지를 만나러 가지요.”
에드가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공작 부인이 마차에 올라탔다. 아론의 아카데미에서 클레이모어 영지까지는 마석마차를 이용해도 한 달가량 걸렸다.
가는 도중 항구에서 배를 갈아타야 했기 때문이다. 대륙에서 세리토스 왕국으로 가는 길목에 욕심 많은 드래곤 이아스의 권역이 있었고 동쪽의 세리스 산맥에는 이베르의 권역이 있었다. 두 드래곤의 권역 때문에 세리토스 왕국은 사실상 섬이나 다름없었다.
* * *
“마님, 도련님. 이리 일찍 오실 줄이야! 어머, 에디의 얼굴이 반쪽이 되었네. 아카데미는 학생의 식사를 대체 어떤 식으로 챙기는 거죠?”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시녀장 앤이 공작 부인과 에드가를 반겼다. 시녀장의 여전한 수다에 에드가와 유모 카렌이 간신히 웃음을 참았다.
“앤, 에드가의 논문이 올해의 논문 후보가 되었어.”
공작 부인의 말에 앤의 회색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곧 시녀장으로서의 체통도 다 집어던지고 에드가를 꽉 껴안았다.
“세상에! 내 그럴 줄 알았어요. 역시 에디는 클레이모어의 보물이에요.”
에드가의 얼굴이 붉어졌다. 하지만 그는 이 부산스러운 시녀장을 밀치지 않았다. 그에게 황소처럼 돌진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앤이 돌진하는 느낌은 그들과 조금 달랐다.
“앤, 그이는?”
누구보다 그들을 반길 공작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공작 부인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아이고 참, 각하께서 연구가 막히셨다고 코르드 언덕에 있는 별장으로 가셨습니다.”
“별장에?”
“네. 한 달 전쯤에 가셨어요. 그곳이 조용해서 집중하기 좋다고 하시더군요. 시끄러운 게 싫다시면서 다른 시종도 모두 물리치고 칼만 데리고 가셨어요. 가끔 그러신답니다.”
공작 부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가 있을 때도 공작의 연구가 종종 막힐 때가 있었다. 그럼 그는 머리를 부여잡고 서재에 틀어박히긴 했어도 별장을 가는 일이 없었다.
“이상하네. 내가 있을 때는 코르드 별장에 가는 일이 없었는데…….”
“마님이 저택에 계실 때는 떨어지기 싫으셨나 보죠. 각하께서 종종 그리 말씀하셨잖아요. 세상의 모든 근심도 마님을 보는 순간 다 잊게 된다고요.”
앤은 언제나 적절히 공작 부인을 기쁘게 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공작 부인은 마치 소녀처럼 얼굴을 붉히더니 망토와 모자를 가져가려는 하녀들에게 손짓했다.
“다시 입혀 주렴. 에디, 우리 이러지 말고 별장으로 바로 가자.”
에드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이미 장갑을 다시 꼈다. 그는 훌쩍 마차 문을 열고 공작 부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버지를 깜짝 놀라게 해 주죠.”
마치 아이와 같은 미소가 에드가와 공작 부인의 얼굴에 서렸다. 그들은 공작이 누구보다 자신들을 보고 기뻐하리라 여겼다. 시녀장에게 미리 알리지 마라 단단히 이르고 공작 부인과 에드가, 그리고 유모 카렌이 탄 마차가 별장을 향했다.
그것이 행복했던 그들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고 파멸을 안겨 주는 길임을 당시에 에드가는 몰랐다.
* * *
“마님, 도련님. 어쩐 일로…….”
이른 아침 별장에 도착하자 그들을 반긴 건 집사 칼의 당황한 표정이었다. 에드가는 본능적으로 뭔가 일이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그이는?”
“잠깐 산책하러 나가셨습니다. 잠시 기다리시면 됩니다.”
칼이 응접실로 공작 부인을 안내하려 했다. 그러나 공작 부인은 그의 안내에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움직이지 않았다.
“칼, 그이가 산책 중 이라면 거기로 날 안내해야지.”
“네? 그게…….”
“응접실은 손님을 안내하는 곳이잖아. 나를 거기로 안내하면 안 돼.”
공작 부인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누구보다 그녀를 받들어 모시던 칼이 자신에게 이런 무례를 저질렀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그가 공작 내외를 모시는 가장 기본적인 예의를 잊었을 리 없다.
그때 에드가가 현관 옆 옷걸이에 걸린 한 망토를 발견했다. 새하얀 담비 털로 만든 그 망토는 결코 남성의 것이 아니었다. 에드가는 어머니 또한 망토를 발견했음을 눈치챘다. 어머니의 얼굴에 혼란과 당혹, 그리고 의심이 깃드는 순간을 에드가는 놓치지 않았다.
그는 집사 칼을 붙잡았다. 유모는 바로 칼을 묶기 위한 끈을 찾아왔다.
“어머니, 아버지의 방으로 가세요!”
에드가가 아버지를 의심했냐면 그건 결코 아니었다. 그럴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누구보다 어머니를 사랑한다. 어머니는 그의 아버지 때문에 저 멀리 대양을 넘어 세리토스 왕국으로 왔다.
그녀는 이 세상 것이라 믿기 힘든 보관을 들고 와 자신이 저 먼 나라의 왕녀임을 증명해 결국 결혼했다. 공작 부인은 세상의 그 누구보다 아름답다.
그런 어머니를 두고?
그럴 리 없다. 분명 그냥 일 관계로 온 손님일 것이다. 에드가가 집사 칼을 잡은 것은 의심이란 씨앗을 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완벽하게 아름다운 세계에 살고 있었다.
독을 품은 씨앗이 그 세계에 뿌리를 뻗어 자라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거칠게 반항하는 집사를 유모와 함께 끈으로 묶으면서도 그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칼의 반항은 그 손님이 이렇게 별장에 와서 내밀히 만나야 할 정도로 중요한 손님이라 그런 것이라 여겼다. 어쩌면 국왕이 알아서는 안 되는, 오직 클레이모어의 이익만을 위한 만남일지도 모른다.
“꺄아아아아!”
곧이어 별장을 뒤흔든 비명은 어머니의 것이 아니었다. 이윽고 칼은 모든 걸 체념한 듯 반항을 멈추었다. 에드가는 뭔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간다 느꼈다. 그는 유모 카렌과 함께 소리가 나는 방향을 향해 정신없이 뛰어갔다.
그리고 보았다. 침대 위에 나뒹굴고 있었던 아버지와 웬 여자. 얼음처럼 굳어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어머니. 모든 것이 비현실적이었다. 에드가는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아버지 옆의 반라의 여자는 제 어머니와 견주어 보자면 결코 아름답지 않았다. 왜 아버지의 옆에 그런 여인이 누워 있었는지 그는 지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무엇이, 대체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나.
“여보,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요?”
찰나였으나 억겁처럼 느껴졌던 시간이 지나고 공작 부인이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질문했다. 공작은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칼은? 칼은 어디 있지?”
“말 돌리지 말아요!”
공작 부인의 비명 같은 외침에 공작이 입술을 깨물었다. 공작 부인은 천천히 그의 옆에 있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두려운 표정으로 공작의 팔을 꼭 잡고 있었다.
“저분을 사랑하나요?”
“아, 아니요. 절대 아니오. 소피에게는 아무 마음 없소. 그저, 내가 좋다 길래……. 내가 안아 주지 않으면 죽을 것 같다고 매달리기에 불쌍한 마음에 그런 것뿐이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에드가는 아버지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다. 방의 상태를 보았을 때 둘의 만남은 단발성이 아니었다. 앤이 그러지 않았나, 별장에 틀어박힌 지 한 달이 넘었다고……. 공작 부인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사랑하지 않는다고요?”
“그렇소, 그냥……. 그냥 내가 만나 주지 않으면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들다고 하기에 불쌍해서 만나 준 것이오. 내가 사랑하는 건 그대뿐이오.”
공작이 침대에서 일어나 공작 부인에게 다가가려 했다.
“더러워!”
공작 부인이 외쳤다. 그 외침은 비명이 되어 저택을 뒤흔들었다. 그리고 사라져야 할 소리가 계속 공명하여 귀가 찢어질 듯 울렸다. 그건 착각이나 그런 느낌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귀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곧이어 공작 부인의 허물이 벗겨졌다. 그리고 그 안에서 눈부시게 아름다운 존재가 나왔다. 바닥까지 닿는 새하얀 머리카락은 스스로 빛이 났으며 백옥 같은 피부는 마치 공기 같았다.
그리고 그녀의 등 뒤에는 찬란한 날개가 돋아나 있었다.
‘……님프.’
그런 존재가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저 멀리 대양 너머 자기들만의 섬에서 사는 영생의 존재. 그러나 님프가 대륙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은 건 백 년이 넘어선다. 에드가는 이 현실을 믿을 수 없었다. 그 말도 안 되는 상황 속에 공작과 유모는 침착했다.
“여보, 이건 실수……”
공작은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앞으로도 영영 할 수 없을 것이다. 님프가 손을 들어 그를 가리킨 순간 공작의 영혼이 그의 몸을 떠났다. 그 옆의 여인도 마찬가지였다.
님프의 분노에 용서란 없었다.
한때 자신의 남편이었던 자와 그를 유혹한 여인의 영혼을 육체에서 떠나게 한 님프가 에드가를 바라보았다. 감정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눈이었다. 이윽고 님프의 손가락이 에드가를 향했다.
“햇살 아래 너는 두 번 다시 걷지 못하리라.”
말이 끝나는 순간 에드가는 발목 아래에 격렬한 통증을 느끼고 쓰러졌다. 그리고 천천히 발의 감각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때는 무릎까지 마비되지 않았다. 하지만 발이 마비되는 것만으로도 정상적으로 걷는 건 충분히 힘들어졌다. 에드가는 절뚝거리며 님프를 향했다.
“……어머니.”
무슨 말이 하고 싶었던 건지는 에드가도 모른다. 어쨌거나 그 말이 님프에게 전해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님프는 그 자리에서 바로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으니까.
“왕녀님, 그러게 인간을 사랑하지 마시라고 누누이 말했건만…….”
그때 유모 카렌이 혀를 차며 품속의 펜듈럼의 뚜껑을 열어 물거품을 담았다. 어머니의 고향에서 함께 온 유모. 에드가는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카렌을 잡았다.
“카렌, 어머니는? 어머니는 어디로 간 거지? 살아 계신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