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36화
“각하, 언제나처럼 일하는 중에 아무도 오지 말라고 단단히 명령해 두었습니다.”
“식사는 자네가 가지고 오는 것 잊지 말게.”
“네, 만찬은 해가 진 이후이니 식당에 가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마님도 이상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래. 지나치게 피하면 모두 의심할 테지.”
“잘 처리할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은 두 사람뿐이다. 하나는 황제,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집사 칼. 그 둘은 에드가가 사람을 대면하는 모든 일이 해가 진 이후에만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했다.
“오늘 처리해야 할 서류는?”
“책상 위에 모두 올려 두었습니다.”
“좋아. 칼. 그럼 다른 하인들에게는 내가 일이 많아 일찍 집무실에 나온 것으로 이야기해 둬.”
“네, 곧 아침 식사를 가지고 오겠습니다.”
그의 명령을 받은 칼이 고개를 숙인 뒤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곧이어 바깥에서 열쇠로 집무실 문을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 칼 이외에 어떤 자도 집무실에 들어오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에드가는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이나 비참한 자기 행색을 비웃으며 휠체어를 밀어 집무실 한가운데 은은한 장미향이 나는 넓은 책상으로 향했다. 클레이모어 가문이 칼을 휘두르는 기사가문도, 정치를 전문적으로 하는 가문도 아닌 집무실에 콕 틀어박혀 연구만 하면 되는 가문인 게 천만다행이었다.
에드가는 잠시 그가 처리해야 하는 서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책상의 첫 번째 서랍을 열쇠로 열어 작은 보석함을 꺼냈다. 에드가는 길고 흰 손가락으로 보석함의 모서리를 매만졌다.
얼마나 많이 열어 보고 만졌는지 보석함은 모서리가 반들반들했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휙 보석함을 열었다. 그 안에는 한 여인의 이름이 쓰인 종이쪽지가 들어 있었다.
일주일 전이었다. 갑작스레 푸른 반지가 사라지고 그 안에 종이쪽지가 나타난 건……. 도둑맞은 건가 잠깐 의심했지만 그럴 리 없었다. 에드가는 이 보석함을 항상 자신 곁에 두었다.
게다가 쪽지의 필체는……놀랍게도 자신의 것이었다.
“루비카 베르너.”
에드가는 그 쪽지에 적힌 여인의 이름을 음미하듯 불렀다. 그리고 기억을 돌이켜 보았다.
3년하고 3일 전, 그러니까 그가 스물두 살 때의 일이었다.
* * *
완벽, 그 단어처럼 에드가 테일러 클레이드 윈드모어를 수식하기에 적절한 말이 또 있을까?
그는 태어날 때부터 완벽했다. 완벽한 외모, 완벽한 두뇌, 그리고 완벽한 부모까지. 그는 결핍이 결핍된 자였다. 그의 주변은 풍요가 가득했으며 항상 찬란한 햇빛이 드리운 듯했다.
그리고 그런 에드가가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의 부모님이었다. 12살, 세리토스 왕국을 떠나 아론의 아카데미에 입학하며 아버지의 명성에 떨어지지 않도록 열심히 공부하고 또 공부했다.
“역시 클레이모어군.”
그의 완전무결한 답안지를 받아든 교수들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그리 말했다.
에드가는 입학 이후 단 한 번도 수석을 놓친 적이 없었고 월반의 월반을 거듭하다 10대 후반에 이미 아카데미를 조기 졸업하고 스무 살 무렵에는 아카데미의 정식 회원이 되기 위해 논문을 준비할 지경에 이르게 된다. 다른 사람은 빨라도 서른 즈음에다 이루는 일을 그는 스무 살 초반에 이룬 것이다.
“에디.”
에드가의 마지막 논문 심사 일을 앞두고 저 멀리 세리토스 왕국에서 클레이모어 공작 부인이 왔다. 금발머리에 에드가처럼 마치 보석을 박아 넣은 듯한 푸른 눈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사로잡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공작 부인은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매끈한 피부를 자랑했다. 아카데미의 분위기를 해칠까 최대한 수수하게 차려입은 옷이 마치 무도회의 복장같이 느껴질 정도로 그녀는 아름다웠다.
“어머니, 여기까지 어쩐 일입니까?”
심사를 기다리느라 초조했던 에드가는 어머니의 등장에 내심 기쁘면서도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아들의 그런 성정을 아는 공작 부인은 부드러이 미소 지었다.
“네가 곧 집에 돌아올지 모른다고 생각하지 영 기다릴 수 없어서 말이지.”
“어머니, 아직 논문은 통과되지 않았습니다.”
“네가 통과되지 않을 리가 없잖니. 그렇지? 카렌.”
“네, 마님. 저는 처음 논문을 내는 사람 중 제일 뛰어난 사람에게 주는 <새로운 시각>상을 타지 않으면 외려 실망스러울 것 같습니다.”
아론의 아카데미에서 내내 그의 시중을 줄곧 도왔던 유모 카렌이 한술 더 떠 대답했다. 공작 부인은 집안의 다른 어떤 사람보다 카렌을 믿었다. 카렌은 그녀가 클레이모어 공작가로 시집오기 전 바다 너머 고향에서 데려온 유일한 사람이었다.
“두 분, 너무 일찍 축포를 터트리지 마세요.”
그리 말하는 에드가의 입가에도 웃음이 머물러 있었다. 지금의 냉정한 미소와는 전혀 다른 부드러운 미소였다. 그때에도 에드가의 주변에는 그를 노리는 벌 떼 같은 사람이 있었다. 가끔, 방학 때 참가하는 수도의 사교계의 소녀 떼와 중매쟁이 떼는 물론 아카데미에서 영원히 뼈를 묻을 것을 은근슬쩍 권유하는 교수 떼, 클레이모어 공작가의 연구자로 일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는 취업지망자 떼.
그런 메뚜기 떼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에드가가 마음의 여유를 잃지 않은 것은 순전히 그의 부모님 덕이었다. 이 아름다운 클레이모어 공작 부인은 그보다 심한 메뚜기 떼에도 항상 의연히 대처했다.
“그런데 아버지는요? 역시 바쁘십니까?”
“어머, 에디. 역시 아닌 척하면서 우리가 오길 기다렸구나.”
“아, 아닙니다.”
클레이모어 공작 부인은 부끄러워하는 에드가의 볼을 쿡 찔렀다. 벌써 그녀의 키를 20센티 가량 추월한 에드가를 그녀는 아기 취급했다.
“아버지는 국왕 전하께서 부탁한 대포의 마지막 점검을 위해 저택에서 골머리를 부여잡고 계신단다.”
“그렇군요.”
에드가의 목소리에는 아쉬움이 살짝 묻어났다. 공작 부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환히 웃었다. 그녀의 아들은 아카데미에서 공부한 이래 학자들의 영향으로 냉정한 척하며 감정을 숨기고 있지만 사실은 따뜻하기 이를 데 없는 청년이었다.
“대신 돌아갈 때 샤르망 왕국에 실컷 놀다 오라고 배려해 주셨단다. 너도 이제 내년부터 아버지 옆에서 골머리를 앓겠지? 이번이 마지막이니 신나게 즐기자꾸나. 샤르망의 연극도 보고 쇼핑도 하고……. 거기에 요새 특이한 물건들이 많이 들어왔다더구나. 따뜻한 물에 넣으면 신비한 향을 내는 것도 있다 들었어.”
“한동안 막혀 있던 사막 교역로가 뚫려 무역이 다시 활기차졌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그 드래곤 때문에…….”
공작 부인의 얼굴에 살짝 어두운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곧 그녀는 활기찬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이때 아니면 언제 마음껏 쇼핑하겠니? 세리토스에서 그러는 건 너무 눈치가 보여.”
“어머니, 목적은 결국 그것이었군요.”
“어머, 너야말로 재료상에 가면 누구보다 열심히 돈을 쓸 것 아니니? 집에 백 개나 있는 제도용 자를 또 산 게 어디의 누구였더라.”
“그 자는 신상품이었어요. 눈금의 정확도가 다른 어떤 자보다 뛰어났다고요.”
“이런, 이런. 이것 보렴.”
에드가는 결국 어머니 앞에 어린아이처럼 웃고 말았다. 클레이모어 공작 부인은 정말 신비한 사람이었다. 누구든 그녀와 단 십분 이야기하면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녀의 온화한 눈빛은 봄 햇살 같았으며 미소는 여름의 신선한 풀잎에 매달린 이슬 같았다.
에드가는 가끔 그처럼 아름다운 어머니와 자신이 닮았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았다.
그런 어머니가 옆에 있었기 때문일까. 에드가는 심사 기간 내내 교수들의 추가 질문에도 긴장하지 않고 또박또박 대답할 수 있었다. 그가 지난 십여 년 간 배운 지식을 모두 쏟아부었다.
결국 에드가는 <새로운 시각>상을 수상자로 내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올해의 논문> 후보 중 하나로 결정되었다.
“세상에!”
그 소식을 누구보다 기뻐한 건 공작 부인이었다.
“올해의 논문은 아직 그이도 받지 못했어. 언젠가 그 상을 꼭 받을 거라고 그렇게 말하고 다녔는데 네가 먼저 받게 생겼구나.”
“아버지가 싫어하시지 않을까요?”
“그럴 리가. 네가 자신보다 뛰어난 걸 누구보다 자랑스러워하는 사람이잖니.”
공작 부인은 넘치는 기쁨을 참을 수 없는지 에드가의 좁은 숙소 안을 요리조리 오락가락했다. 물론 좁은 숙소는 어디까지나 클레이모어 공작가 기준으로, 그의 방은 아카데미 기숙사에서 교수의 방 다음으로 컸다.
“안 되겠구나. 샤르망으로 가기로 한 건 취소하자꾸나. 이 소식을 누구보다 빨리 그이에게 전해 주고 싶어.”
결국 참다못한 공작 부인이 그렇게 외쳤을 때 에드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는 기쁜 일이 있으면 항상 아버지와 나눴다.
그림같이 아름다운 부부. 그건 그의 부모님을 수식하고도 남는 단어였다.
* * *
“부인, 참 아름다우시군요. 나이가 믿어지지 않습니다.”
“칭찬은 감사합니다만, 경. 저는 바쁩니다.”
은사와 길고 긴 인사를 나누고 마석마차로 온 에드가의 눈에 아름다운 어머니에게 지분거리는 한 기사가 들어왔다.
공작 부인은 곤란한 표정으로 그에게 관심이 없음을 계속 주지시켰으나 기사는 무슨 자신감인지 떨어지지 않았다. 심지어 공작 부인의 가녀린 손을 꽉 잡고 있었다. 에드가는 모든 일을 제쳐 두고 마차 곁으로 다가갔다.
“세드릭 경, 내 어머니에게는 무슨 볼일이지?”
“아.”
세드릭은 에드가가 다가와서야 황급히 떨어졌다.
“공작 부인께 인사를 올렸을 뿐이네.”
“그럼 인사하고 가면 되지 손은 왜 잡으셨소?”
그는 에드가의 냉랭한 답변에 어쩔 줄 몰라 했다.
“그저 나는 친분의 표시로…….”
“3분.”
“응?”
“친분의 표시로 손을 잡고 손등에 키스하는 시간은 3분으로 충분하네. 그 이상은 무례네.”
세드릭의 귀에 ‘그리고 그 무례의 대가로 당신의 손목을 자르겠소.’라는 환청이 들렸다. 그는 황급히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 꼭 죽일 듯이 자신을 노려보는 에드가에게 고개를 숙였다.
“무례를 사과하지.”
“내가 아니라 클레이모어 공작 부인께 사과하십시오.”
“……사죄합니다. 부인.”
그리고 세드릭은 공작 부인의 답변이 채 돌아오기 전에 꽁무니를 빼었다.
“벌레 같은 놈.”
공작 부인이 흥분한 에드가의 팔을 잡았다. 그녀는 괜찮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세드릭의 손이 닿았던 장갑을 벗어 카렌에게 건넸다.
“카렌, 이건 버리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