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35화
“루비카, 전령의 실수로 이리되었지만 나는 처음 청혼했을 때, 그대와 가족을 이루길 원했어.”
가족, 이란 말에 루비카의 얼굴이 미세하게 변했다. 루비카와 함께 지낸 시간은 비록 길지 않았지만 에드가는 확신했다.
그녀는 그의 뺨을 때리고 욕하고 심지어 발차기까지 한 여인이지만 마음이 약했다. 결국 그는 평생 버리지 않으리라 믿었던 자존심을 욕망 앞에서 슬쩍 내려놓았다.
“적어도 집에 돌아왔을 때 잘 왔다고 포옹해 주는 사람 한 명 정도는 있으면 좋겠어.”
루비카의 미간 사이가 좁아졌다. 사실 에드가와 그리 애틋한 가족 같은 게 되고 싶은 생각 따위는 없었다. 어쨌든 그녀는 그와 이혼하고 싶었으니까.
그러나 루비카가 마음이 약하다는 에드가의 판단은 옳았다. 루비카는 에드가가 3년 전 마차사고로 부모님과 유모를 한꺼번에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리고 앤이 에드가를 ‘에디’라고 부르며 안타까움 담긴 애정을 드러낸단 사실도…….
어쩌면 이 남자는 냉정한 척하고 있지만 외로운 게 아닐까.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루비카는 선뜻 싫다고 말하기 망설여지기 시작했다. 그 망설임을 읽은 에드가의 입이 바쁘게 움직였다.
“그게 꼭 아내의 포옹일 필요 없어. 그냥 친구에게 하듯이 해 주면 돼.”
친구……. 그래, 어쨌든 3~4년간은 바로 곁에서 함께 지낼 사람이 아닌가. 루비카는 연인으로 하는 포옹은 힘들어도 친밀한 남녀 사이에 가끔 하는 포옹 정도는 해도 될 것 같았다.
“우음…… 그래, 포옹 정도는…… 음, 해도 돼…….”
하지만 아까처럼 자는 데 껴안고 있다던가, 손이 미묘한 부위 근처에 있는 건 싫다는 상세 조건을 입에 올리기 전, 겨우겨우 수마에 버티고 있었던 루비카는 그만 쌕쌕 잠들어 버리고 말았다.
“루비카, 그리고 음……루비카?”
에드가가 몇 번 루비카의 이름을 불러 보았으나 돌아오는 건 숨소리뿐이었다. 그는 한숨을 쉬고 침대 모서리 끝에 누워 잠을 청해 보려 했다. 하지만 아무리 자려고 해도 말똥말똥 눈이 떠졌다.
아까 루비카를 폭 끌어안았을 때는 그토록 쉽게 잠들었는데…….
“루비카.”
그가 다시 조용히 루비카를 불렀다. 역시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침구를 타고 루비카의 달콤한 내음이 그를 찾아왔다. 그러자 루비카의 따뜻한 손이 생각났다. 체온이 낮은 편이었던 그는 루비카의 손을 잡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따뜻해졌다.
“……손잡는 것 정도는 괜찮다고 했었지.”
또다시 자기 합리화를 한 에드가는 꽃향기에 홀린 나비처럼 슬금슬금 루비카의 곁에 다가갔다. 그리고 루비카의 손을 잡았다. 역시 따뜻했다. 그는 한쪽 손으로 루비카의 손은 잡은 채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곤히 잠든 루비카는 그의 그런 행동에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가서 그런가 달콤한 향이 점점 진해졌다. 저기 머리에 얼굴을 가져다 대면 고소한 향이 나지. 루비카는 따스한 우윳빛 피부를 가져서 그런지 꼭 적당히 데운 우유에서 나는 고소하고 그리운 향기가 났다.
안고 싶다. 저 부드러운 머릿결 사이에 또 얼굴을 파묻고 싶다. 에드가는 잠시 망설였다. 방금 루비카는 허락 없이 자신을 껴안은 그에게 발차기라는 응징을 가했다. 하지만…….
“방금 포옹까지는 괜찮다고 허락했었어.”
그래, 아까 혼난 건 미리 허락을 구하지 않고 자고 있는 그녀에게 안아서였고 포옹까지 괜찮다고 허락을 받았으니 이젠 괜찮다. 제멋대로 결론을 내린 에드가는 심호흡 후 루비카를 자기 쪽으로 슬쩍 끌어당겼다.
그녀는 이번에도 반응이 없었다. 에드가는 루비카의 어깨를 조심스레 건드려 그녀의 얼굴을 자기 가슴 위에 올렸다. 쌕쌕, 가슴 위에 루비카의 숨이 닿자 이성이 증발해 버렸다. 결국 그는 루비카를 꼭 껴안고 그녀의 머릿결에 얼굴을 묻고 루비카의 내음을 한껏 들이마셨다.
손에 닿는 감촉이 어찌나 부드러운지 꽉 끌어안으면 이대로 부서지는 게 아닐까 두려웠다. 숨소리는 그의 가슴을 간질였다. 코를 스치는 향은 아주 잠깐 떨어져 있었는데도 그리울 정도였다. 에드가는 날이 밝으면 더는 마시지 못할 루비카의 내음을 한껏 들이마셨다. 그리고 그 달콤한 내음의 끝에 묘한 향기 하나가 달라붙어 에드가의 기도를 타고 혈관을 통해 뇌에 전달되었다. 야릇한, 아주 야릇한, 부드러운 붓끝이 그의 몸을 살짝 간질이는 느낌이 났다.
순간 에드가는 자신도 모르게 깜짝 놀라 번쩍 루비카를 자신에게서 떼어냈다.
밀치지 않은 것은 그의 마지막 이성이 그러다 그녀가 깰지도 모른다고 경고했기 때문이었다. 믿기지 않아서 그는 자신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반응해서는 안 되는 그의 신체가 반응했다.
에드가는 무도회에서 춤을 출 때 종종 그의 몸에 슬쩍 기대거나 비비는 여인을 만난 적은 있어도 단 한 번도 반응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엔 반응했다. 루비카는 그에게 몸을 기대거나 비비기는커녕 그냥 잠만 자고 있는데……. 잠만 자고 있었을 뿐인데 그는 반응했다. 심지어 저 스스로 다가가 껴안고 머리에 코를 박고 향기를 음미했다.
‘미쳤구나.’
정녕 미친 게 틀림없다. 에드가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공작의 방과 공작 부인의 방을 한차례 돌았다. 다행히 차가운 공기가 피부에 닿자 흥분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는 작은 콘솔 의자를 가져와 침대 옆에 두고 앉아 잠든 루비카를 새삼 바라보았다.
평범하다. 인상이 좋긴 하지만 평범하다. 매우 평범한 여인이다. 사교계에는 이보다 세련되고 우아한 여인이 넘친다.
그래, 모든 건 우연이다. 그의 신체적 변화와 루비카 사이에는 상관관계가 있을 리 없다.
‘감기약을 물이 아니라 샴페인과 함께 마셔 일어난 현상인가?’
결혼식에서 피로연장까지 그는 칼과 미리 이야기한 바가 있어 물을 마시지 않았다. 대신 목이 마를 때마다 샴페인을 마셨다. 에드가는 아카데미의 학자에게 감기약과 샴페인을 함께 복용할 시 신체에 일어나는 부적절한 현상에 대해서 연구해 볼 것을 제의하기로 결심했다. 실험과 연구에 필요한 모든 비용을 줄 것이다. 남들이 보기에는 퍽 쓸모없는 실험일지 몰라도 에드가에게는 중요했다.
이 현상이 약과 샴페인의 부작용 때문이라고 결론 짓자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에드가는 루비카의 얼굴을 슬그머니 쓰다듬었다. 그의 손이 닿자 기분이 좋았는지 루비카의 입가가 살짝 올라갔다. 그녀의 입가를 따라 에드가의 입가도 움직였다.
이처럼 귀여운 여인을 보고 흥분하는 그런 짐승 같은 짓을 자신이 할 리 없다.
‘춥군.’
아직 밤공기가 차다. 얇은 잠옷은 차가운 공기를 막기에 적절하지 않았다. 그도 슬슬 졸음이 몰려왔다. 계속 이렇게 침대 옆에 앉아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에드가는 결국 이불 속으로 다시 들어갔다. 폭신한 백조 털과 거위의 솜털을 섞어 만든 이불이 기분 좋게 그를 감쌌다.
하지만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방금 잠 들었을 때는 무언가가 그를 꽉 채웠는데 지금은 숙면을 취하게 해 줄 결정적인 무언가가 빠진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이상하군. 이불은 적당히 덮었는데 왜 계속 허전하지? 추워서 이러는 걸까?’
문득 루비카가 걱정되었다. 자신도 이렇게 허전한 느낌이 드는데 그녀는 어떨까? 아까 처음에 자기 몸에 파고든 것도 역시 추워서 그런 게 아닐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에드가는 더는 망설일 것 없다 느꼈다. 그는 다시 루비카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겨 안았다. 그녀의 기분 좋은 향이 코끝을 간질이자……잠이 확 달아났다.
또 반응이 왔다.
‘이건 감기약과 샴페인의 부작용이야. 그녀와는 상관없어. 여기서 내가 떨어지면 추워서 악몽이라도 꿀 지 몰라.’
에드가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녀가 몸을 뒤척일 때면 화들짝 놀라 어디 불편한 곳은 없는지 살피며 틈틈이 손가락을 살살 만지며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럴 때마다 아래에서 거센 반응이 일어났지만 그는 모든 것을 감기약 탓으로 돌리고 루비카 옆에 딱 붙어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 * *
창문 너머 새파란 햇살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에드가는 새벽녘의 푸른빛에 물든 루비카의 얼굴을 졸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결국 한숨도 자지 못했다. 그에 반해 자기 옆의 여자는 쿨쿨 잘도 자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어쩐지 억울했다.
‘다그락, 다그락.’
그때 저 멀리서 무언가가 굴러오는 소리가 들렸다.
‘칼이로군.’
그 소리의 정체를 알고 있는 에드가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만 루비카의 곁에서 떨어져야 한다. 이렇게 밤을 함께 보내는 건 오늘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단 생각에 아쉬움과 미련이 뚝뚝 떨어졌다.
에드가는 잘 움직여지지 않는 몸을 일으켜 세워 팔 힘을 이용해 침대 모서리 끝까지 갔다. 그가 바닥에 발을 내렸을 때쯤 문을 ‘똑똑.’ 간격을 두고 세 번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확실히 칼이다.
이윽고 그의 집사는 다 알고 있다는 듯 대답이 없음에도 기다리지 않고 열쇠 꾸러미를 꺼내 문을 열었다. 동시에 에드가는 침대 밖에 나온 발에 힘을 줘 일어서려 했다. 그러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속절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당황하지 않았다. 언제나 그러했다. 다만 아주 조금 남아 있던 기대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날아가 버렸다.
“각하!”
칼이 다급히 그를 부르며 휠체어를 방 안으로 밀고 들어오려 했다.
“그 끔찍한 물건! 여기까지 가지고 오지 마.”
바닥에 비참하게 쓰러져 있던 에드가가 고개를 들어 참고 있던 분노를 터트렸다. 칼은 조용히 휠체어를 문 옆에 두고 어떻게든 일어서려 하는 에드가의 곁으로 왔다. 그리고 황급히 그의 팔을 잡아 부축했다.
“마비가 이제 무릎까지 올라왔군요.”
에드가는 칼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한 걸음, 한 걸음 힘겹게 발을 떼기 시작했다. 칼은 그런 에드가의 모습에 한없는 안타까움을 느꼈다. 원래 제 주인은 자유롭게 걷고 뛸 수 있는 사람이었다.
“역시 결혼으로는 저주가 풀리지 않는 모양입니다. 각하.”
“……처음부터 그리 간단히 풀릴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어.”
문 앞에 다다른 뒤 에드가는 칼의 부축을 받아 휠체어에 탔다. 문밖을 지키고 있던 시종은 반쯤 쓰러져 입을 벌리고 숫제 코를 골았다. 평소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피로연에 제공된 물에 수면제를 탄 덕에 모두 곤히 자고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네 일 처리는 언제나처럼 완벽하군.”
칼은 마지막으로 에드가가 지나온 자리와 이불을 정리한 다음 문을 닫았다. 닫히는 문틈으로 에드가는 잠시 씁쓸한 표정으로 루비카를 바라봤다.
제 남편이 이런 저주를 받은 괴물이라는 걸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럼 가시지요. 각하. 오는 동안 아무도 깨지 않은 걸 확인했습니다.”
에드가가 고개를 끄덕이자 칼이 휠체어를 밀기 시작했다. 공작의 방에서 일하는 동안 그 누구도 들어오지 말라고 명한 그의 집무실까지. 긴 복도에 새파랗게 들어오기 시작한 햇살을 바라보며 에드가는 씁쓸히 웃었다.
밝은 낮에 이 복도를 지나가는 게 대체 얼마만 만인가…….
그는 새벽녘의 공기를 음미하며 눈을 감았다. 그러자 귓가에 그를 이리 만들었던 저주가 환청처럼 들렸다. 마치 어제 있었던 일처럼 선명하다.
-햇살 아래, 너는 두 번 다시 걷지 못하리라.
한때 그가 어머니라 불렀던 님프가 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