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34화
* * *
그리고 정신을 차리니 그는 이미 침대 바닥을 향해 떨어져 있었다. 그의 품에 안겨서 미소 짓던 여인은 온데간데없고 “왜! 침대가 이렇게 넓은데 굳이 옆에 와서 그런 건데?”라고 얼굴이 벌게져서 그를 노려보는 여인만 남았다.
‘당신이 먼저 내 곁에 와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막 비비고 내가 묻는 말에 웃으면서 대답했소!’
에드가는 진심으로 그리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본인이 생각해도 설득력 없는 소리다. 잠결에 한 소리를 대답을 받은 걸로 치다니……인정한다. 치졸하다.
“……추워서 그랬어.”
“추우면 옷을 껴입으면 되잖아!”
루비카는 에드가를 향해 아예 삿대질했다. 에드가는 이 말싸움을 길게 끌어가 봤자 자신에게 유리한 게 없다 여겼다. 그는 설득을 포기하고 고개를 숙였다.
“휴, 그래. 허락받지 않고 그리 한 걸 사과하지.”
그가 다소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자 루비카의 분노도 한풀 꺾였다. 그녀가 침대에 다시 앉자 에드가도 슬그머니 귀퉁이에 앉았다. 그러자 루비카가 찌릿 그를 노려보았다.
“여기 왜 앉아. 저기 당신 방에 가서 자.”
“내 방에 가서 자라니?”
원래 에드가가 씻고 나오면 바로 하려던 이야기였다. 그만 수마를 이기지 못해 잠들고 말았으니 이왕 이렇게 된 거 루비카는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기로 했다.
“여긴 공작 부인의 방 즉 내 방이고 저긴 공작의 방 즉 당신 방이잖아. 우린 형식상 부부니 꼭 같은 침대를 쓸 필요 없지. 난 여기서 잘 테니 당신은 당신 침대에서 자.”
루비카의 말에 에드가는 한숨을 쉬었다. 그도 할 수 있으면 그녀의 요구를 들어주고 싶었다.
“내 방엔 침대가 없어.”
“뭐?”
“정말이야.”
루비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에드가의 방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그리고 서재로 추정했던 방과 연결된 문이라는 문은 다 열어 보았다.
욕실, 화장실, 의자 여러 개와 작은 탁자가 놓인 회의용 방, 드레스 룸, 심지어 기도실까지 다 나왔지만 안락한 침대가 있는 방이 없었다. 그의 방에서 쉴 만한 곳이라곤 루비카의 방과 이어진 서재 같이 책상과 벽난로, 소파가 있는 방뿐이었다.
고작 공작 부인의 방이 절반 크기 정도가 되는 방이 공작의 방 전부라고? 루비카는 황당함을 넘어 이 현실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했다.
“침실은? 침실은 대체 어디 있어?”
“공작의 방에는 원래 침실이 없어.”
“그럴 리가, 내가 오기 전까지는 여기서 잤을 거 아냐. 침대는 어디로 치웠어?”
에드가는 자신을 협잡꾼 취급하는 루비카의 태도에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이건 정말이지 억울하다.
“그 방은 이 저택이 지어졌을 때부터 침대가 없었네.”
“말도 안 돼. 그럼 그동안은 어디서 잤는데!”
“공작이 된 이후부터 쭉 여기서 잤었지. 공작 부인의 방이 공작의 침실이니까.”
루비카는 이마를 짚었다. 보통 귀족가는 남편과 부인의 방을 각각 따로 가졌으며 그 방들은 서로 얼굴을 보지 않아도 생활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었다.
여인의 방에는 규방과 침실, 친밀한 손님을 따로 초대할 수 있는 응접실이 있었으며 남성의 방에는 침실과 간단히 책을 읽을 수 있는 작은 서재, 역시 내밀한 손님을 위한 면담실이 있는 게 보통이었다. 그리고 루비카가 확인한바 공작 부인의 방은 그 규칙에 충실이 따라 만들어졌다.
그런데 클레이모어 공작가는 공작의 방에 침실이 없단다. 공작 부인의 방이 바로 공작의 침실이란다. 정말이지 상식을 깨는 구조였다.
“그래, 그럼 오늘은 어쩔 수 없으니 난 여기 침대 오른쪽 끝에서 잘게. 당신은 저기 침대 왼쪽 끝에서 자. 이렇게 서로 떨어져서 자자. 그리고 아침이 되면 바로 당신 방에 침대 넣어 달라고 말할게.”
“그건 안 돼.”
에드가는 대답하면서 루비카가 눈에 너무 힘을 주어 혹 튀어나오는 건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왜 안 돼! 뭐가 안 돼!”
“초대 공작께서 그리 말했소. 부부는 한 침실에서 자야 한다. 공작의 방에는 절대 침대를 넣지 마라. 이 유언을 어겨서는 안 된다. 이 저택도 그분의 유언에 맞춰 그리 지어졌고 벌써 수백 년을 이어져 내려온 전통을 내가 깰 순 없소.”
루비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베개를 퍽 쳤다.
“빌어먹을 클레이모어!”
“당신도 이제 클레이모어야.”
루비카를 달래기 위해 한 에드가의 말에 그녀의 얼굴이 더욱 달아올랐다. 그의 말이 그녀의 화를 돋워 버린 것이다. 그는 도저히 종잡을 수 없었다. 루비카의 기분을 누그러뜨리려면 대체 뭘 어찌하는 게 좋을지.
“나도 선대의 유언에 유감을 표하지. 하지만 안심해. 당신과 한 약속을 지킬 테니……”
“자고 있는 사이에 몰래 껴안은 당신의 뭘 믿고!”
‘당신이 먼저 내 품에 들어왔다고!’
에드가는 그리 외치고 싶었으나 참았다. 그런 말을 했다간 루비카는 당장 침대를 두 쪽 낼 기세였다. 또 루비카가 잠결에 한 대답을 자기 멋대로 해석해서 껴안은 건 그가 생각해도 잘못된 행동이었다.
대체 자신이 왜 그랬는지……. 그도 모른다. 오히려 루비카에게 자신에게 뭘 한 거냐고 묻고 싶은 기분마저 들었다.
“오늘은 첫날밤이니 어쩔 수 없이 여기서 밤을 보내야 하지만 내일부터는 12시까지만 이 방에 있다 집무실 옆에 있는 휴식처에 가서 잘게. 거기에 내가 눕고도 남을 만한 소파가 있어.”
“정말? 그거 좋은 생각이네.”
그의 말에 루비카의 얼굴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그녀의 기분은 누그러뜨리다 못해 좋아지게 만들었는데 이번엔 그의 기분이 미묘해졌다.
이게 그렇게 좋아할 일인가? 내가 자기 옆에서 자는 게 그렇게 기분 나쁜 일인가?
“그런데 꼭 12시까지 여기 있다 가야하나……. 바로 거기 가서 자면 안 돼?”
루비카가 한술 더 떠서 그를 기분 나쁘게 만들었다. 에드가의 얼굴은 속절없이 무너졌으나 침실에 불이 꺼진 지 한참 뒤라 루비카는 눈치채지 못했다.
“결혼한 다음 날 바로 그런 행동을 하면 사람들이 어찌 생각할까?”
“싸웠겠구나 하겠지.”
루비카의 태평한 대답에 에드가는 가슴이 절로 답답해 가슴을 쾅쾅 치고 싶었다. 어쩜 이 여자는 만사가 이리 느긋할까.
“육 개월 간, 딱 육 개월만 그럴게. 그 뒤로는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지.”
“…….”
루비카는 잠시 생각했다. 당장 에드가와의 관계를 파탄 내고 싶었으나 아무리 봐도 에드가는 그럴 눈치가 아니었다. 결혼 다음 날 바로 공작이 자신의 방이 아니라 집무실에서 자기 시작한다면 지나치게 사람들의 흥미를 끌 요소가 있었다.
인사하러 온 친척이 연유를 알고 싶어서 끝까지 꼬치꼬치 캐묻겠지. 생각만 해도 귀찮다. 차라리 조금 번거롭더라도 육 개월 뒤에 자연스레 사이가 소원해지는 것처럼 보이는 게 낫겠다.
“좋아. 육 개월만 그렇게 하는 거로 하자.”
“그런데 정말 앞으로 계속 반말을 할 거야?”
루비카가 고개를 끄덕이며 하품을 했다. 에드가는 바로 물을 한 잔 떠와 루비카에게 내밀었다.
목마른 걸 어떻게 눈치챈 걸까? 루비카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에드가가 내민 잔을 받아 마셨다.
“루비카, 네가 계속 내게 그렇게 말하면 사람들이 날 어떻게 보겠어.”
“좋게 보던데, 피로연에서도 다들 좋아 보인다고 말하던데……“
“당신에게는 그렇게 말했겠지!”
에드가가 부글부글 끓는 얼굴로 루비카를 노려보았다. 루비카는 슬쩍 모른 척 하며 이불을 덮었다. 중간에 잘 자다 깨서 더 그런가? 잠이 너무 온다.
“그럼 각하라고 부르고 존댓말을 할까요?”
“그건 안 돼.”
“그럼, 지금처럼 말할래. 에드가, 정 존댓말과 함께 에드가라고 불리고 싶으면 ‘각하’라는 호칭을 ‘에드가’라고 바꿔 달라고 국왕 전하께 건의하는 걸 추천해.”
에드가는 기가 차서 루비카를 바라봤다. 거의 잠꼬대나 다름없는 소리를 이 여인이 하고 있다. 그는 간신히 눈만 뜬 루비카의 모습에 한숨을 쉬었다.
“……그냥 에드가라 불러.”
“알았어. 에드가.”
백기를 든 그의 모습에 루비카가 싱긋 웃었다. 그러자 에드가의 가슴 한쪽이 간질거렸다. 분명 루비카는 그를 쭉 무시하는 언동을 하고 있는데 왜 기분이 나쁘기는커녕 꼭 볕 잘 드는 언덕 위에 누워 낮잠을 잘 때나 느낄 수 있는 기분에 빠지는 걸까.
“그런데 루비카, 내게 반말을 하는 건 그렇다고 하지. 왜 앤과 칼, 심지어 하녀에게까지 존댓말을 쓰는 거지?”
“그 사람들은 내게 존댓말을 하니까.”
한쪽 눈을 비비며 루비카가 대답했다.
“그들은 당신보다 신분이 낮은데?”
“신분이 어쨌든 그들은 내게 존댓말을 하잖아. 난 그냥 상대가 한 만큼 하는 것뿐이야. 날 존중하고 공손히 말하는 사람에게는 그에 맞게 존댓말을 하고. 나를 존중하기는커녕 비꼬고 놀리고 비난하며 자기 멋대로 군 당신은 그에 맞는 대우를 할 거야.”
“멋대로 군 건 루비카 당신도……”
“내가 당신 의사도 묻지 않고 키스했어? 자고 있는데 허락도 안 받고 몰래 껴안았어?”
에드가가 입을 닫았다. 할 말이 없다. 말발이라면 그도 지지 않았다. 심지어 루비카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그녀를 완벽히 설득했다. 하지만 에드가는 도저히 그녀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자칫 억지로 들릴 수 있는 말이었으나 일견 일리가 있었다. 심지어 공평하기까지 했다.
물론 남편의 권위나 공작으로서의 권위를 내세워 루비카를 윽박지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루비카는 그런 말에 굴복할 사람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에드가는 그 순간 루비카가 짓게 될 표정을 보는 게 너무나도 두려웠다.
‘……두렵다고? 내가?’
에드가는 이불 너머 루비카를 바라봤다. 불가사의하다. 이 아무것도 아닌 여자가 뭐길래 나는 대체 뭘 두려워하고 있나.
“루비카, 이왕 말 나온 김에 우리 신체접촉의 범위를 정하지.”
그리고 내 입은 왜 이렇게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나.
“안 돼, 다 안 돼. 전부 다 안 돼.”
루비카가 이불 속에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지만 사람들 앞에서 손잡았지 않나. 심지어 팔짱은 그대가 먼저 끼었어.”
“그건…….”
루비카는 이불 속에서 수마와 싸우며 잠시 생각했다.
“돼.”
에드가는 자신도 모르게 오른쪽 주먹을 꾹 쥐었다. 일단 하나는 통과다.
“키스는……”
“안 돼! 절대 안 돼!”
“결혼식장에서 한 키스 같은 걸 말하는 게 아니야. 신년이나 추수절 날 행사 때 사제에게 받은 축복을 나눠주기 위해서 이마나 뺨에 키스할 때가 종종 있잖아. 그것까지 안 된다고 하면 좀 곤란해. 여러 행사 때, 서로 냉랭한 부부도 가문에 문제가 없음을 알리기 위해 서로 이마에 키스는 종종 해. 그리고…….”
술렁술렁 에드가의 말이 루비카의 귀에 굴러 들어왔다. 그럭저럭 논리가 있었다. 추수절 날 기쁨을 나누기 위해 가족끼리 이마에 입을 맞추는 건 루비카도 종종 했던 일이다.
어쨌든 가족이니 마틴 베르너 삼촌도 루비카의 이마에 입을 맞췄고 루비카는 안젤라에게 축복을 나눠주기 위해 이마에 꾹 입술을 눌렀었다.
“좋아, 그럼 이마나, 뺨…… 같은 데는…….”
루비카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자 에드가가 황급히 덧붙였다.
“손등도!”
“……응. 입술은 안 돼.”
여기까지는 어떻게든 설득했다. 다음 설득을 하기 위해 에드가는 입술을 축였다. 제발, 루비카가 자신의 말에 넘어가 주길 그는 떨리는 마음을 감추기 위해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꺼냈다.
“그리고 포옹 말인데.”
“안 되는데……, 흐아암…….”
“하지만 서로 연인이 아닌 남녀도 친구 사이면 어깨에 손을 올리거나 포옹 정도는 기꺼이 해.”
“……그렇긴 하지.”
“어쨌든 우리는 결혼했고 이제 가족이잖아? 오래 저택을 비우고 돌아왔을 때 반가움에 서로 포옹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미 반쯤 잠이 든 루비카가 웅얼거리듯 말했다.
“우리 그냥 어쩔 수 없이 결혼하기로 한 거잖아. 참, 그거 안 물었……네. 왜 나한테……청혼 했어?”
“그건……언젠가 말해 줄게.”
“흐음, 그럼 포옹은 안 돼.”
에드가는 침을 꿀꺽 삼켰다. 짧은 찰나 그의 머릿속과 가슴에는 많은 단어와 감정이 섞여 휘몰아쳤다. 거짓과 진실, 자존심과 간절함, 이성과 욕망. 그중 욕망이 가장 강하게 그를 지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