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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27화 (27/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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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27화

한 걸음 뗄 때마다 아름다운 새 한 마리가 하늘로 날아가는 듯한 잔상이 자수의 움직임과 함께 남았다. 얼굴은 금빛 안개에 휩싸여 마치 꿈속에 있는 듯했다. 어디선가 날아온 바람이 신비한 금빛 안개를 살짝 쓰다듬고 지나가자 흩어진 안개 너머에서 아주 잠깐이지만 매혹적으로 붉고 도톰한 입술을 모습을 드러냈다.

하얀 꽃 사이로 핀 단 하나의 붉고 화려한 꽃.

마치 이 공간의 모든 것이 루비카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에드가는 뒤늦게 입안이 바짝 말랐음을 깨달았다. 가슴 아래에서 어떤 액체 같은 것이 두둥실 떠올라 머리 위까지 차고 오르는 게 느껴졌다. 이 감각은 그가 채 다섯 살이 되기 전 아버지의 어깨에 목말을 탄 채 밤하늘을 수놓은 화려한 폭죽을 본 이후 처음이었다.

세간에서는 이 감각을 ‘감동’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는 매일 남들이 감동할 만한 얼굴을 거울로 보는 사내였다. 그는 어지간해서는 무언가의 아름다움에 감동한 적이 없었다. 에드가는 제자리에 붙박이처럼 서 이 생소한 감정을 뭐라 정의해야 할지 한참 고민했다. 등에서는 식은땀이 났고 얼굴에 열이 올랐다.

그래, 이건 틀림없이,

‘감기몸살인가 보군.’

근래 삼 일간 왕성에서 베르너 저택, 그리고 다시 왕성에서 휴의 사원까지 강행군을 했다. 몸살에 걸려도 이상할 것 없는 일정이었다.

‘아무래도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약을 준비하라고 칼에게 일러야겠군.’

에드가는 자신의 증상에 대해서 간단히 판결을 내리고 루비카를 에스코트하기 위해서 한 걸음 한 걸음 그녀에게 다가갔다. 가까이서 보니 신비한 금빛 안개처럼 보였던 것은 섬세하게 짠 금빛 베일이었다. 얇은 레이스 너머 루비카의 적갈색 눈이 그를 똑바로 올려다보자 갑자기 귀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쿵, 쿵, 쿵.

한 삼 일 정도 잠도 자지 못하고도 의사가 처방해 준 약을 먹고 서류를 처리할 때 종종 들리곤 했던 소리였다.

‘이상하군, 이렇게 피곤할 리 없는데…….’

몸은 가뿐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루비카를 에스코트하기 위해 손을 뻗을 때 꼭 그의 몸이 그의 것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온몸이 뻣뻣하니 굳었다.

‘이상하군. 해가 졌어. 이럴 리 없어.’

그때 루비카의 따뜻한 손이 에드가의 손 위에 올라왔다. 그러자 마치 봄 같은 따뜻한 기운이 손에 흐르는 혈관을 타고 온몸 구석구석 퍼져나갔다. 에드가는 뻣뻣했던 몸이 부드럽게 이완됨을 느꼈다. 그는 루비카의 손을 잡고 성큼성큼 사제가 있는 곳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저기, 빨라요.”

황급히 드레스 자락을 잡고 루비카가 속삭이듯 외쳤다. 에드가는 그제야 루비카가 넘어질 뻔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하네.”

이번엔 루비카가 식은땀을 흘릴 차례였다.

이 남자가 지금 나한테 미안하다고 한 거 맞아?

흘끗 곁눈질로 에드가의 표정을 확인 보려 했으나 베일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다. 결혼 서약을 위해 사제에게로 가는 도중 에드가는 타는 입안을 축이고 간신히 입을 열었다.

“당신 꽤……”

“꽤?”

“나쁘지 않군.”

뜬금없이 이게 무슨 소리인가. 루비카는 잠시 고민했으나 일단 별거 아닌 일로 치부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그보다 점점 사제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는 사실이 신경 쓰였다.

‘휴 신 앞에서 감히 거짓된 맹세를 하게 되다니.’

다른 신은 몰라도 사랑의 신 휴는 루비카에게 각별했다. 루비카에게 부족하나마 안락한 보금자리와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한 의지를 준 신이었다.

휴의 수도원이 없었다면 루비카는 아르망을 만날 수 있었을까? 그런 신 앞에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두고 결혼 서약을 하게 되다니 양심이 따끔 아파졌다.

“보기 좋은 신랑 신부로군요.”

그런 루비카의 속도 모르고 의식을 집전하는 대사제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덕담을 하였다. 대사제 안드레는 그가 집전하는 모든 의식 중에서 이 결혼의식을 가장 좋아했다. 그가 수많은 신 중 휴의 사제가 되길 선택한 이유 중 하나가 결혼식 주례일 정도였다.

휴 신 앞에서 하는 진실한 사랑의 맹세는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속설 때문에 아주 깊은 밤 그의 침실 문을 두드리는 존재들이 종종 있었다. 가끔은 키가 그의 무릎 아래에 올 정도로 작은 고블린이 왔고 어떨 때는 목소리만 들릴 뿐 모습이 보이지 않는 존재가 왔다. 그럴 때 보통 사람이라면 응당 두려움에 떨어야 했으나 안드레는 그러지 않았다.

그 대단한 드래곤마저도 벌벌 떠는 것은 번개도, 황금도, 강렬한 불꽃도 아닌 ‘사랑’이었다. 이 아무것도 아닌 듯 대단한 힘을 가진 무형의 ‘감정’을 주관하는 휴의 사제는 어딜 가든 환영받았다.

안드레는 사랑의 맹세를 하고자 그를 찾아온 존재라면 설사 마물이라 할지라도 기꺼이 축복을 내렸다. ‘원수를 이웃처럼 사랑하라.’ 그것이 휴의 가르침이었다. 사랑에 어떤 차별도 있어서는 안 된다.

게다가 이번 결혼식은 제국을 호령하는 클레이모어 공작과 그의 마음을 한순간에 사로잡은 여인을 위한 것이 아닌가. 안드레는 결혼식 주례를 부탁받았을 때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다음 방문을 닫고,

‘감사합니다! 휴 신이여, 이처럼 귀한 결혼식의 주례를 맡게 되다니 이 맛에 대사제 합니다.’

하고 한동안 춤을 췄었다.

“아름다움과 진실한 사랑의 수호자인 휴 신의 가르침에 따라…….”

대사제의 굵고 깊은 목소리가 결혼식장을 넉넉히 채웠다. 루비카는 그가 휴의 성서에 나온 대로 맹세의 말을 시작하는 순간 부케 아래에 숨긴 왼손의 검지와 중지를 재빨리 교차했다. 그 손동작은 신 앞에서 어쩔 수 없이 거짓된 맹세를 할 때 이를 미리 고하는 제스쳐였다.

‘신이여, 거짓된 맹세를 하는 저를 용서해 주세요.’

은밀히 취한 그 손동작은 그 자리에 있는 대사제 안드레도, 증인도 보지 못하였으나 바로 옆에 있는 에드가는 보고 말았다. 이를 눈치채지 못한 루비카는 대사제의 주례에 맞춰 자신만의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어떤 불행과 천재지변이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아도……서로 믿고 의지하며…….”

‘설사 지금 아르망을 만날 수 없다 하더라도 제 사랑은 고작 이런 시련에 으스러질 정도로 작은 것이 아닙니다. 운명의 수레바퀴가 잘못 돌아가 평생 만나지 못한다 해도 저는 이 사랑을 간직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평생 만나지 못한다는 것은 좀 너무 했다.

‘아니, 제발 아르망을 다시 만나게 해 주세요. 사랑의 신이신 당신은 무엇보다 연인들의 아름다운 사랑을 수호한다고 들었습니다. 제 사랑은 아직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아르망에게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만 할 수 있게 해 주세요. 그럴 수만 있다면 어떤 고뇌와 고난도 감수하겠습니다. 제발, 당신의 딸을 시험하지 말고 도와주세요.’

“그럼, 루비카 베르너 양에게 묻겠습니다. 휴 신 앞에서 진실한 사랑을 맹세 하겠습니까?”

결혼 맹세를 다 읊조린 대사제가 신부인 루비카에게 맹세의 의사를 물었다. 눈을 내리깔고 줄곧 신에게 남몰래 기도하고 있었던 루비카가 눈을 똑바로 떴다.

그리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 그러나 이 대답은 클레이모어 공작과의 결혼맹세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휴 신 앞에서 아르망에 대한 사랑의 진실함을 맹세하는 것이었다.

이 사실을 모르는 대사제는 루비카의 대답에 흐뭇한 표정을 짓고 이번엔 신랑인 에드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의 공식 이름을 부르기 위해 서류에 눈을 돌렸다.

‘……정말 길구나.’

세간에 알려진 에드가 테일러 클레이드 윈드모어도 사실 그의 기나긴 이름을 축약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대사제는 의식을 집전하는 동안 물 한잔 할 수 없는 현실에 개탄하여 입 아프게 에드가의 이름을 읊었다.

“……, 휴 신 앞에서 진실한 사랑을 맹세 하겠습니까?”

에드가는 잠시 자신도 루비카와 같은 손 모양을 해야 하나 고민했다. 그러나 부케로 손을 가릴 수 있는 루비카와 달리 그는 어떤 가림막도 없었다.

게다가 그는 딱히 신 앞에 켕기는 것도 없었다.

다른 여인을 사랑한 것도 아니고 어쨌든 루비카와 결혼한 이상 자신의 의무를 소홀히 하는 건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이었다.

‘왜 결혼을 맹세한다고 하지 않고 굳이 진실한 사랑이란 단어를 쓰는 건지.’

에드가는 속으로 혀를 차면서도 대답했다.

“하겠소.”

에드가의 답변에 루비카는 깜짝 놀랐다. 신 앞에서 ‘네’가 아니라 ‘하겠소.’라고 대답하다니, 뭐 이런 황당한 작자가 다 있어.

그러나 루비카의 이런 감상은 오래가지 않았다. 사제의 다음 말로 머릿속이 하얘졌기 때문이었다.

“신 앞에서 이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맹세의 키스를 할 시간입니다.”

키스?

키스를 하라고?

세상에 그걸 어떻게 까마득히 잊고 있을 수 있었지?

루비카는 자신의 어리석음에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예쁜 웨딩드레스와 그에 딱 어울리는 식장을 꾸미는 데 정신이 팔려 정작 중요한 걸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어느 날 님프가 인간에게 전한 휴의 성서에 따르면 신 앞에서 하는 결혼 서약은 반드시 맹세의 키스로 끝맺음하라고 되어 있었다. 상황이 급해 결혼을 약식으로 하든, 거창하게 하든,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이는 반드시 지켜야 할 사항이었다.

“그럼……”

사제의 신호에 에드가가 먼저 몸을 돌려 루비카를 바라보았다. 루비카는 자신 또한 에드가처럼 몸을 돌려야 한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몸이 목석처럼 굳어 그럴 수 없었다.

머리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니 그냥 빨리 해치우고 말자고 말하고 있었으나 몸은 그렇지 않았다.

“신부가 부끄러워하는 군요.”

루비카의 주저를 대사제가 다른 식으로 해석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기 위해 말했다. 더 지체하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차마 용기가 나지 않던 그 순간, 에드가가 불쑥 팔을 내밀어 루비카의 허리를 잡았다.

그리고 재빨리 루비카를 자신을 향해 돌렸다.

루비카는 자신의 허리를 꽉 잡은 에드가의 손에서 불길이 일어나는 줄 알았다. 그의 손은 언제나 차가웠으나 이번만은 아니었다.

곧이어 줄곧 앞을 가리고 있던 금빛 베일이 걷어졌다. 그러자 계속 뿌옇게 보였던 에드가의 얼굴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괜찮아. 아무리 아름다워도 몇 번 봤어. 익숙해졌을 거야.’

그러나 심장은 그런 루비카의 의사를 무시하고 또다시 쿵쿵 뛰기 시작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번은 지난 마주침과 또 달랐다.

‘가까워!’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얼굴이 가깝다. 이렇게 가까운데 잡티를 발견할 수 없었다. 자신이 쓴 보관에서 나오는 빛이 반사하는 푸른 눈은 마치 햇살을 반사하는 맑은 바다 같았다.

어떤 미사여구로 치장해도 부족한 시리도록 푸른 눈이 루비카를 주시했다. 루비카는 마치 독사에게 물린 듯 몸을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얼굴이 점점 루비카 쪽으로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세상에!’

루비카는 이런 행위에 면역이 없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건 아름다운 남녀가 서로 사랑을 속삭이는 장면을 멀리서 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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