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26화
“드레스를 생각하면 붉은 꽃보다 하얀 꽃이 좋겠죠? 넓은 물그릇 위에 작은 초가 떠다니게 하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자수가 노을빛이랑 초에서 나는 은은한 빛을 받으면 정말 아름답게 반짝일 거예요.”
연륜 있는 시녀장답게 여러 행사를 주최해 본 적 있는 앤은 바로 루비카가 원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즉석에서 아이디어를 냈다. 하객 없는 결혼식장을 그리 꾸미는 것도 사치라면 사치였다. 하지만 앤의 입장에서 공작가의 결혼식에 그 정도 돈이 드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에게 식장에 꾸미는데 사용한 꽃과 양초를 나눠 주었으면 해.”
루비카의 진짜 목적은 그거였다.
“……네?”
“페트라 왕국은 결혼식에 참석한 하객에게 식장을 장식한 꽃을 나눠 주는 풍습이 있어. 결혼식을 구경 못하는 아쉬움을 그렇게라도 달래 주는 게 어떨까?”
꽃을 나눠 주는 풍습이 있되 값비싼 밀랍 양초까지 나눠 주는 풍습까지는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루비카는 야금야금 돈을 더 쓰고 싶었다. 루비카는 공작가의 예산도 조금이나마 더 낭비하고 영지민들은 비싼 밀랍 양초가 생기고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게 이런 일이 아닐까.
“어쩜 그런 풍습이 있었다니, 아가씨는 모르시는 게 없네요.”
앤은 감동했다. 사실 영지민들에게 공작의 결혼식이란 좋은 구경거리 중 하나였다. 가끔 결혼식에 참가한 귀족이 던지는 동전이나 먹거리는 그들에게 빼앗기기 싫은 큰 즐거움이었다. 이렇게 은밀한 결혼식을치르면 불만이 터져 나오기 마련이었다. 이 때문에 공작가의 평판이 깎이지나 않을까 하고 걱정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루비카는 아예 적선하듯 주지 말고 당당히 기쁨을 나눠 주자고 제안한 것이었다. 비록 세리토스 왕국에 그런 풍습이 없다 할지라도 멀리 남쪽 페트라 왕국에 있는 풍습이라 핑계를 대면 영 말이 안 되는 일도 아닌 듯했다.
루비카의 제안대로 하면 공작가의 평판이 깍이기는커녕 칭송을 받겠지. 신이 난 앤은 내친김에 아이디어를 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축하쿠키를 잔뜩 구워서 함께 나눠 주는 건 어떨까요?”
“어머, 그거 정말 좋은 생각이네.”
루비카로서는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아니 쌍수 들어 환영할 일이었다. 마음씨 좋게 웃는 루비카의 모습을 보며 앤은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어쩜 이렇게 마음도 고울까……’
공작가의 예산을 탈탈 털어 탕진하겠다는 루비카의 속마음을 앤이 알 리 없다. 그녀는 그저 루비카가 공작가의 평판 따위를 발끝에 차이는 돌멩이만큼도 고려치 않는 에드가를 대신해 할 일을 한다고 여겼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일 년 정도 준비하는 결혼식만큼 돈을 쓰게 될 것 같은데…….’
원래 가랑비에 옷 젖듯이 나가는 돈이 크기 마련이었다. 앤은 근방의 영지민들에게 넉넉히 빵과 쿠키를 돌리려면 대단한 신분의 하객들을 맞이해 값비싼 재료로 요리를 할 때만큼의 돈이 든다는 걸 뒤늦게 눈치챘다.
‘뭐, 어차피 좋은 일에 쓰는 거니 상관없겠지. 아직 예산은 넉넉하고…….’
분위기에 취하긴 했으나 일단 자신이 낸 아이디어였다. 살짝 떠오르는 불안을 뒤로하고 앤은 쿠키의 틀은 결혼을 하는 행복한 신랑신부의 모습으로 하는 게 좋을지, 클레이모어 공작저의 모습으로 하는 게 좋을지에 대한 고민이나 하기로 했다.
* * *
다음 날 아침, 로사가 가지고 온 웨딩드레스는 상상 이상이었다. 앤을 비롯해 그 자리에 있던 하녀들도 손뼉을 치며 좋아할 정도였다. 루비카 또한 그처럼 꼼꼼하고 섬세한 자수는 처음 보았다.
로사는 한술 더 떠 드레스와 세트로 보관 아래에 쓸 베일까지 만들어 왔다. 금사로 섬세하게 짠 베일을 쓰자 마치 금빛 안개가 얼굴 주위에 낀 것처럼 아름다웠다.
“각하의 의상도 여기에 맞춰 세트로 준비했습니다.”
“……하지만 각하는 이런 붉은 색이 안 어울릴 거야.”
로사는 루비카의 말을 예상했다는 듯 바로 대답했다.
“같은 붉은 계열이지만 좀 더 어둡고 창백한 붉은 정장이 있답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로사의 말에 루비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드가는 싫지만 어쨌든 그는 짜증 날 정도로 잘생겼다. 그런 천상의 피조물이 어울리지 않은 옷을 입고 미가 윤색되는 것은 보고 싶지 않다.
‘어떤 옷을 입든 결국 얼굴 때문에 근사한 옷으로 보이겠지만.’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그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처럼 아름다운 사람은 성격이 더럽든 어쨌든 찬양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할 수만 있다면 박제해서 대대로 내려 주고 싶은 ‘미’였다.
“후후후.”
옷을 갈아입히고 화장을 도와주는 하녀 중 하나가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흘렸다. 그러자 다른 하녀들과 로사, 심지어 앤마저도 비슷한 웃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루비카만 영문을 몰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가씨는 각하를 정말 사랑하시는구나.’
루비카를 제외한 사람들의 눈이 동시에 허공에서 마주쳤다. 그들은 그렇게 눈빛를 교환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보기에 루비카의 모습은 에드가의 옷 하나하나 신경 쓰는 사랑에 빠진 여인, 그 자체였다.
“자자, 이럴 시간 없어요. 우리 빨리 아가씨를 꾸며요."
마지막으로 모든 준비를 마무리하고 베일 위에 보관을 썼을 때 어느덧 해는 서쪽으로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화장을 조금 진하게 하길 잘 한 것 같네요.”
“맞아. 베일 때문에 희미하게 보일 테니.”
제니는 이번에도 자신을 믿고 맡겨 준 루비카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조금 도발적인 붉은 색을 입술에 칠하였으나 베일을 쓰자 계산대로 모든 것이 안개에 쌓인 것처럼 보여 아름다움을 연출했다.
“그럼 어서 사원으로 출발해요. 아마 한 시간 정도 뒤쯤에 하객들이 속속 도착할 텐데 안내는…….”
“앤, 칼이 모든 준비를 끝냈으니 너무 걱정 마.”
로사의 말에도 조급한 마음이 달래지지 않는지 앤이 입을 내밀었다.
“영 믿을 수가 있어야지.”
바깥에서 보기에 냉철하기 그지없게 일을 처리하는 집사 칼이 앤에게는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처럼 느껴졌다. 특히 결혼식 준비의 초반부에 보여 준 성의 없는 모습이 걸렸다.
“아, 안 되겠어. 피로연 음식 목록을 다시 한 번 확인…….”
“그럼 늦어요. 앤, 당신이 아니면 누가 아가씨를 보살피겠어요.”
“내 정신 좀 봐.”
루비카는 자신보다 더 긴장해 횡설수설하는 앤의 모습에 웃음이 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이 저택의 주인인 각하께서 계시지 않은 채로 아가씨를 다른 분들께 소개시킬 수가 없어요. 지금은 홀로 출발하시지만 도착하면 많은 하객이 꽃을 뿌려 줄 거예요.”
식장을 꾸밀 꽃과 하객이 뿌릴 꽃을 구하기 위해 마치 전쟁터를 지휘하는 장군처럼 집사 칼이 고군분투했다는 사실을 앤은 루비카에게 알리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상냥한 미소를 띤 채 루비카를 마석마차 안으로 안내했다.
“지금 출발하면 딱 적당히 일몰 때가 되겠군요. 돌아오실 때는 말이 모는 꽃마차를 타실 거예요. 구경하는 영지민들이 환호하면 손 흔드는 거 잊지 마세요.”
앤에게 공작가의 결혼식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녀는 햇병아리 시녀 시절에 선대 공작 부부의 결혼식을 준비하는 과정을 어깨너머에서 구경했다.
이번은 그 경험이 제대로 힘을 발휘할 때였다. 사원에 가는 내내 앤은 루비카에게 쉴 새 없이 조언을 빙자한 수다를 떨었다. 정말 앤의 말대로 마차는 정확히 해가 서산에 맞닿았을 무렵에 도착했다.
일몰이 진 사원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루비카는 당장 자신이 부탁한 대로 식장이 꾸며졌는지 확인하고 싶었으나 안타깝게도 에드가의 마차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일단 대기실에서 각하를 함께 기다려요.”
앤은 이 작은 결혼식이 혹 루비카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내내 작은 것에도 감탄하며 그녀의 마음을 북돋아 주려 했다.
“어머, 증인들이 탄 마차가 도착했네요. 사제도 결혼식을 위한 제복으로 갈아입었어요.”
“앤, 식장이 궁금해.”
“제가 먼저 확인하고 올까요?”
루비카가 고개를 끄덕거리자 앤은 기다렸다는 듯이 식장으로 뛰어 들어가 살짝 열린 틈으로 몰래 구경한 다음 돌아왔다.
“완벽해요. 미리 말한 대로 꾸며졌어요. 노을빛 때문에 꽃이 훨씬 더 아름다운 거 있죠.”
그래, 모든 준비가 끝났다. 딱 하나 신랑만 없었다. 짧은 일몰 시간이 지나가고 서서히 땅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해도 에드가는 오지 않았다. 바깥이 점점 어두워지자 앤의 얼굴에도 검은 기운이 슬슬 서리기 시작했다.
“……회의가 길어지셨나 보네요.”
“응.”
“분명 국왕 전하께서 잡으셔서 어쩔 수 없으셨을 거예요.”
“괜찮아, 앤.”
“……아가씨.”
애타는 앤과 달리 루비카는 태평하게 그리 생각했다.
국왕의 잘못 때문에 결혼식이 제대로 치러지지 못하면 혹 미안한 마음에라도 결혼을 무효로 해 주지 않을까?
‘그거 좋네. 차라리 안 왔으면…….’
그러나 루비카의 기도와 달리 하늘에 달이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내었을 때쯤, 에드가의 마차가 사원에 도착했단 소식이 들렸다.
‘에이, 좋다 말았네.’
* * *
에드가의 마차가 사원에 도착하자마자 시종이 바쁘게 그가 옷을 입는 것을 도왔다. 루비카가 웨딩드레스를 입기 위해 반나절을 소모한 것과 달리 그는 고작 십여 분을 소모했을 뿐이었다.
삼 일간 마차 안에서 생활한 거나 다름없음에도 에드가의 피부는 거칠어지기는커녕 여전히 대리석처럼 고왔다. 그저 물 몇 방울 뿌린 것뿐인데 고급 오일을 바른 것처럼 멋진 모양새를 갖춘 머리칼에 시종은 몰래 혀를 내둘렀다.
“칼은?”
“저택에서 피로연을 준비 중입니다.”
에드가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시종은 제가 무슨 실수라도 한 게 아닌지 몸을 움츠렸다.
“신부는?”
“한참 전에 준비를 끝냈습니다. 사제님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시종은 탓하는 것으로 들리지 않도록 말투에 유의하며 에드가의 머리 위에 조심스레 보관을 올렸다. 휘황찬란한 보관 아래에서 에드가의 푸른 눈은 그 아름다움을 잃기는커녕 반사되는 빛으로 인해 묘한 이채를 띠기 시작했다. 에드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마지막으로 커프스의 단추를 점검한 다음 성큼성큼 걸어 식장을 향했다.
이제나저제나 그를 기다리고 있던 하위 사제가 반가운 웃음을 지으며 식장 문을 열었다. 곧이어 두 눈에 들어온 광경은 에드가도 놀랄만한 것이었다.
‘……이걸 하루 만에?’
칼과 앤이 뛰어난 집사와 시녀장이라는 건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토록 완벽하게 준비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어두운 식장 안 사제에게 가는 길 옆에는 물 위에 띄운 초가 은은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
드문드문 보이는 양초 아래 하얀 꽃은 식장 안의 분위기를 환상적으로 만들어 마치 다른 세계에 온 것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었다. 이윽고 루비카가 식장 안에 들어섰다. 어둠 속에 숨은 드레스의 실루엣 위로 금빛 자수가 촛불의 빛을 받아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