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25화
그의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화내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더불어 그에게 사랑하지 않으면 거부하는 게 당연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처음이었다.
머릿속에 상쾌한 바람이 불었다.
실제로는 빰을 맞았는데 어쩐지 그는 그 이상한 여자에게서 치유 받은 느낌이 들었다.
‘내일이 결혼식이지.’
눈을 감자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순하게 떨어진 눈꼬리 안의 갈색 눈은 강인한 붉은 빛을 머금고 있었다. 어쩐지 그녀와 함께라면 앞 일이 나쁘지 않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기분 좋은 예감. 그는 좋은 수식을 찾아내거나 뛰어난 연구 성과를 마무리 지을 때 그런 예감을 한 적은 있어도 사람을 향해 그런 감정을 품은 적은 없었다.
‘보고 싶군.’
속으로 말하고 놀랐다. 누군가를 보고 싶다고 생각하다니 내가? 생소하다.
‘방금 전의 일에 대해 묻고 싶은 걸 거야.’
그래, 그렇겠지.
다른 사람은 모두 그에게 무정하다고 말해도 그녀라면 그에게 잘했다고 당신은 나쁘지 않다고 말해 줄 것 같았다.
사람에게 매정하게 굴려 노력했지만 반면에 그만큼 가슴 속에 구멍이 뻥 뚫린듯 괴로웠다. 그는 그녀에게 위로가 받고 싶었다. 그뿐이다.
에드가는 애써 불현 듯 떠오른 감정을 그리 정리했다. 심장이 쿵쿵 뛰는 것도 갑작스러운 생각에 놀란 탓으로 돌렸다.
* * *
보석은 그 특성에 따라 관리법이 다르다. 어떤 보석은 주기적으로 수분과 기름을 먹여 줘야 하고 어떤 보석은 수분과 닿는 순간 즉시 그 광택을 잃어버린다. 적당한 온도와 습도는 보석의 아름다움을 오래 유지하는데 큰 관건이었다. 클레이모어 공작가는 가문의 긴 역사와 함께 다양한 이야기가 담긴 보석과 장신구를 보유하고 있었다. 적당히 보석함에 자물쇠를 채워 보관할 정도의 규모가 아니었다.
앤의 안내를 따라가던 루비카는 경비가 보초를 서고 있는 입구를 지나 나타난 보고의 광경에 저도 모르게 감동했다.
‘……박물관 같아.’
일찍이 본적 없는 광경이었다. 루비카는 엄청난 규모에 압도당했다. 한편으로 에드가가 말한 “공작 부인에 어울리지 않는 보석”이란 단어가 생각나 그만 웃음이 나왔다. 태어났을 때부터 이런 걸 보고 자랐다면 그런 말을 악의 없이 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아가씨, 보관이 있는 곳은 이쪽이에요.”
“응.”
루비카는 앤의 뒤를 따르며 클레이모어 공작가의 보고에 가득 찬 목걸이와 팔찌, 브로치들의 아름다움을 눈에 담았다. 클레이모어 공작가는 통치가문이었기에 여타 귀족 가문과 달리 보관을 가지고 있었다. 아주 특별한 공식 행사에서만 보관을 썼는데 결혼식은 그런 보관을 쓸 수 있는 유일한 사적인 행사였다.
“이건 제 12대, 아직 클레이모어가 후작 가문이었을 때 개발한 대포로 바나의 왕을 사로잡아 얻게 된 보관이에요.”
“가운데에 있는 물방울무늬 다이아몬드는 인어의 눈물이지?”
“어머, 어쩜!”
앤이 가리킨 보관은 루비카가 죽은 아버지의 서재에서 읽었던 보석 도감에 나올 만큼 유명한 보석이었다.
‘그 책을 읽은 지도 벌써 60년 가까이 지났어.’
하지만 루비카는 책의 내용을 바로 떠올릴 수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바로 아름다움에 대한 책이었으니까. 그런 루비카를 보고 아버지는 무역상의 딸답다고 무척 좋아했었다.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을 키울 수 있었던 건 그런 가정환경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집에 오기 전, 공작가의 역사에 대해서 따로 공부한 거로구나.’
루비카의 아름다움에 대한 열정을 모르는 앤은 그녀가 에드가와 결혼하기에 앞서 공작가의 역사에 대해 공부한 거라고 생각했다. 단번에 앤 안에서 루비카에 대한 평가가 치솟았다. 물론 이미 더 오를 데도 없이 높았지만.
“보관은 이걸로 하는 게 어떤가요?”
“……응.”
루비카는 앤이 가리킨 금색의 화려한 보관을 흘끗 보았다. 드레스에 가장 잘 어울리는 보관을 앤이 바로 찾아내었다고 생각하면서도 여섯 개의 보관 중 맨 끝에 있는 것에 향하는 시선을 숨길 수 없었다.
금빛의 찬란한 다른 보관과 달리 은백색의 보관은 그에 꼭 맞는 진주와 투명한 다이아몬드로 꾸며 섬세한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었다.
“……저건?”
“돌아가신 선대 공작 부인께서 시집 올 때 가지고 오신 보관이랍니다.”
앤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분명 선대 공작 부인은 바다 건너 먼 나라에서 온 왕녀라고 그랬지. 루비카는 아픈 과거를 건드린 것 같아 빨리 화제를 전환했다.
“보관은 앤이 골란 준 거로 하면 될 것 같고 여기에 어떤 귀걸이랑 목걸이가 어울릴까?”
“어머, 마침 이 보관에 딱 어울리는 세트가 있답니다. 제게 맡겨 주세요.”
앤이 바로 환히 웃으며 바로 루비카가 원하는 곳으로 안내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한참 이야기를 나누며 웨딩드레스에 갖춰 입을 장신구를 골랐다. 필요한 물건을 다 골랐을 때는 어느새 지하로 난 창에 어둑어둑 땅거미가 지기 시작했다. 입구를 지키고 있던 병사가 조심하라고 양초를 가지고 왔을 정도였다.
“이제 다 정했으니, 이만 돌아갈까요?”
앤이 마지막으로 리스트를 정리하고 루비카에게 물었다. 슬슬 배가 고파왔기에 루비카는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팔짱을 끼고 그만 밖으로 나가려 할 때였다.
‘……누군가 날 보고 있어.’
자신을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는 시선을 느낀 루비카가 멈칫 걸음을 멈췄다.
“아가씨?”
고개를 돌려 바라본 곳에는 푸른 제복을 입은 남자가 있었다. 매우 큰 키에 떡 벌어진 어깨, 그리고 강인해 보이는 턱을 가진 그는 루비카와 눈을 마주치고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낯선 듯 익숙한 얼굴이었다.
‘동공에 가까워질수록 푸른 느낌이 드는 갈색 눈동자.’
루비카는 뒤늦게 그가 베르너 저택에서 마주친 스테판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저분은 호위대장이신 스테판 경이십니다.”
둘이 구면이란 사실을 알 리 없는 앤이 소개했다.
“이미 베르너저택에서 만나 뵈었습니다. 시녀장님.”
루비카가 망설이는 사이 스테판이 앤에게 먼저 웃음을 띠며 말을 걸었다. 웃음을 띤 얼굴과 달리 눈은 맹수처럼 루비카를 주시하고 있었다. 루비카는 어쩐지 긴장되어 온몸이 뻣뻣해지는 기분이었다.
“스테판 경은 항상 각하를 가장 가까이에서 호위하시지 않나요? 오늘은 어찌한 일로 저택에 남아 계셨습니까?”
“각하의 명을 수행 중입니다.”
“명이라면?”
“……시녀장님에게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순식간에 소름이 쫙 돋았다. 루비카는 스테판의 갈색 눈에서 경고를 읽었다.
‘도망칠 생각 하지 마.’
이상하게 그가 그리 말을 거는 느낌이 들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쭉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던 걸까? 루비카는 지나친 억측이라고 떨리는 마음을 달래려 노력했으나 쉽지 않았다.
‘날 못 믿을 만해……’
짐을 싸서 달아나려 했었다. 에드가가 안전장치를 이중으로 해 놓는 게 어찌 보면 당연했다. 하지만 그래도 섬뜩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어쨌든 마차 안에서 두 사람은 합의를 보았고 루비카는 그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럼에도 에드가는 그녀를 믿지 않았다.
‘내 의견 따위는 밤하늘의 먼지 수준으로 생각하는구나. 그럼 나와 한 약속도 그 정도 수준으로 생각할 거야. 역시 그자를 믿어선 안 돼.’
루비카는 이 자리에서 다시금 제대로 사치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스테판과 병사에게 인사를 한 뒤 보고를 나와 응접실에 들어선 순간, 앤에게 말을 걸었다.
“앤.”
“네, 아가씨.”
“부탁할 게 있는데…….”
“무엇이든 말씀해 주세요.”
루비카는 싱글싱글 웃으며, 영문은 모르겠지만 일단 자신의 열렬한 추종자인 앤을 바라봤다.
“결혼식장 준비는 어떻게 되고 있어?”
“네, 그날 하루 휴의 사원을 방문객 없이 비우기로 했답니다.”
생각지도 못한 소식에 루비카는 깜짝 놀랐다.
“사원을 비운다고?”
“네, 각하께서 조용히 열고 싶다고 하셔서…… 혹 근방에 구경 오는 사람들로 인해 아가씨께서 불쾌한 일을 당하실까 봐 염려되어서 그리 배려하신 듯합니다. 적절한 성금 덕에 사원에서도 흔쾌히 수락해 주셨어요.”
루비카의 고개가 오른쪽으로 살짝 기울어졌다. 어쩐지 에드가는 주변 사람들의 관심을 극도로 꺼리는 느낌이 들었다. 왜 그렇게까지 하는지 영문을 모르겠으나 루비카는 이왕 이렇게 된 거 자기 생각대로 밀고 나가기로 결심했다.
“결혼식장을 아름답게 꾸미고 싶은데…….”
“어머, 그거 좋은 생각이네요.”
“고작 네다섯 명만 참석한 결혼식장이라……그래도 될지…….”
루비카는 일부러 눈을 내리깔고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스스로 이런 연기를 하는 자신이 가증스러웠으나 앤을 설득하기에 이보다 좋은 방법이 없었다. 역시 앤은 루비카의 그런 표정에 자기 가슴이 다 아프다는 듯 반응했다.
“아가씨, 그런 말씀 마세요. 결혼식은 아가씨가 원하는 대로 다 맞출 거예요.”
“하지만 각하가 좋아할지…….”
루비카의 말에 앤의 눈가에 핏줄이 섰다.
“에디가, 아니 각하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나요?”
“그렇진 않고.”
“결혼식에 돈을 아끼는 좀생이 같은 남자는 만날 필요 없어요.”
루비카는 앤의 단호한 말에 오히려 당황해 눈을 깜빡였다. 앤은 이 자리에 에드가가 있었다면 당장 따져 파혼이라도 시킬 것 같은 무시무시한 얼굴이었다.
“그런 좀생이들은 결혼하고 나서도 꼭 필요한 물건에도 토를 달기 마련이죠. 그리고 자기가 입을 예복은 번듯하게 준비하려 해요. 마차는 또 어떻고요. 대여마차는 절대 안 된다며 형편에 상관없이 장만하려 들어요. 말 먹이에는 금화를 아끼지 않으면서 부인이 먹는 데는 한 푼이라도 아끼려 하는 놈들! 그럴 시간에 튀어나온 배나…….”
앤은 너무 흥분한 것 같아 황급히 말을 흐렸다. 그리고 슬쩍 루비카의 눈치를 보았다. 루비카는 그저 애매한 웃음을 흘리기만 했다. 이 광경이 낯설지 않았다. 원래 쓸모없는 남편 흉보기란 유부녀의 즐거움 중 하나 아닌가.
“흠흠, 어쨌든 각하께서 만약 기분 나쁜 소리를 한마디라도 한다면 제게 말씀해 주세요. 제가 단단히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열을 내는 앤의 모습에 오히려 루비카는 에드가가 눈치 없이 재수 없는 말을 내뱉기를 바랄 지경이 되었다. 이 사람 좋고 허물없는 시녀장에게 혼나는 에드가의 모습이라니 평생에 한 번쯤 보고 싶을 광경이었다.
“결혼식장을 예쁜 꽃과 양초로 꾸미고 싶어. 마침 일몰 때에 열린다고 하니, 촛불의 은은한 빛이 자수를 좀 더 아름답게 보이게 할 거야.”
루비카의 말에 앤이 환히 미소 지었다. 마침 계절은 따스한 4월을 향해 가고 있어서 봄꽃이 한창 피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