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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24화 (24/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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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24화

* * *

서산에 해가 떨어졌을 무렵, 왕성에 화려한 마석마차 두 대가 미끄러지듯 도착했다. 그 중 작은 마차에서 먼저 내린 집사 칼이 에드가의 마차 문을 열었다. 칼은 공작의 시중을 왕궁 내관이 들게 두지 않았다.

“각하, 괜찮으십니까?”

에드가는 대답없이 길고 탄탄한 다리를 움직여 마차에서 내렸다.

“회의는?"

“마침 저녁 식사 시간이여서 한 시간 정도 쉬게 되었습니다.”

“일찍 도착했군."

“각하께서도 만찬에 참석 하시겠습니까?”

왕궁 내관의 권유에 에드가는 고개를 저었다. 사람이 많은 곳에 가 봤자 피곤할 뿐이다.

“그럼 휴식처로 안내 하겠습니다.”

내관은 간단한 다과와 소파가 준비된 휴식처로 그를 안내했다. 만찬은 한 시간 정도 걸리니 그동안 휴식처를 홀로 쓸 수 있을 듯 했다.

“각하, 간단히 요기할 것을 가지고 올까요?”

“됐어.”

소파에 앉은 에드가가 긴다리를 길게 쭉 뻗었다. 그리고 머리를 젖혀 천장을 보았다. 곧 있을 회의 때문에 머리가 복잡했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역시 칼이다. 그는 눈치 좋게 에드가가 홀로 있을 수 있도록 휴식처를 나갔다. 에드가는 창문에 비치는 별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올해 개발한 포가 모험단을 통해 실험을 완료한 후 판매하는 시점이…….’

달칵-

문 열리는 소리가 정적을 깼다. 칼이 나간 정문 쪽이 아니다. 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예쁜 드레스를 입은 한 여인이 있었다. 여인이 있던 쪽에는 문이 보이지 않았다.

‘비밀 문인가.’

오랜 왕궁이다. 비밀 통로 하나쯤 있어도 이상할 게 없다.

“각하.”

누구냐고 말을 내뱉기도 전 여인이 훌쩍 뛰어와 에드가를 안았다. 갑작스런 촉감에 그는 기겁했다.

“이거 놔!”

거칠게 여인을 뿌리쳤다. 여인은 힘없이 뒤로 물러났다. 여인의 녹색 눈에서는 눈물이 또르르 흘러 내렸다. 제법 미인인 그녀는 어찌하면 가련하게 눈물 흘릴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에드가에게는 아무런 감흥도 일으킬 수 없었다.

“이런 깊은 밤 과년한 처자가 남자와 단 둘이 있으면 명예에 누가 되니 이만 물러나시오.”

사람을 부를까 했던 에드가는 서로를 위해 일을 조용히 처리하고자 했다. 그때 눈물을 흘리던 그녀의 눈이 위험하게 번뜩였다.

“그럼 저와 결혼해 주실 건가요?”

“뭐라?”

“제 명예를 더럽히시면 책임 져 주셔야지요.”

머리가 지끈 아파 왔다.

“내가 뭘 했다고. 난 그쪽 이름도 모르는데…….”

잠시 낙담했던 여인은 곧 당당히 고개를 들었다.

“헬레나 레오폴드입니다.”

레오폴드 후작가. 자신감의 원천은 그것이었군. 하지만 헬레나? 몇 번째 딸이지? 들어 본 적 없는데?

에드가는 고개를 갸웃거리자 답답했는지 그녀가 먼저 말을 꺼냈다.

“올해 신년 무도회에 함께 춤을 추었잖아요.”

그래도 기억 나지 않았다.

‘무도회에서 같이 춤춘 사람이 좀 많아야지.’

사람 좋은 국왕이 불쌍한 처녀들이 상사병으로 죽게 생겼으니 비싸게 굴지말고 춤 좀 추라고 성화를 부리는 통에 그는 매해 사교계 시즌 마다 많은 여인들과 춤을 추었다. 에드가 정도 위치라면 무도회 참석을 거부하고 멋대로 굴 수 있었으나 국왕이 그의 비밀을 쥐고 있는 통에 어쩔 수 없었다.

“각하께서 저보고 예쁘다고 칭찬하신 것 기억하나요?”

“글쎄.”

기억 안 난다. 신년 무도회 때는 기분이 퍽 나빴었다. 아마 그가 한 칭찬은 죄다 비꼬는 말이었을 거다.

“제 마음을 가져가시고 결혼하시다니요. 이럴 수는 없어요.”

국왕에서 결혼 허가증을 받은지 얼마 되지 않았다. 벌써 소문이 났나? 하긴 레오폴드 후작 정도 되는 실력자라면 이 정도 소식을 손에 넣는 건 일도 아니겠지.

“난 가져 간 적 없네. 제 멋대로 굴지 말게.”

그러나 헬레나는 에드가가 뭐라 하든 제 할 말을 시작했다.

“그것도 고작 준남작가 정도 밖에 안 되는 여식이라면서요? 각하의 힘이 커지는 걸 걱정한 국왕 전하의 계략인거죠? 그런 한미한 가문 출신이 제대로 배우지 못해서 각하를 보필할 수 없어요. 사교계에 나가도 웃음거리가 될 거라고요.”

말이 안 통한다. 에드가는 낮게 한숨 쉬었다.

“내 일이다. 상관하지 마.”

헬레나가 에드가의 바지를 잡았다.

“저 잘할 수 있어요. 지참금도 많아요.”

돈은 나도 넘치게 많다는 말을 그는 간신히 삼켰다.

“자수도 잘 놓고요. 장부도 잘 봐요. 무척 건강해서 아이도 잘 낳을 수 있을 거예요. 귀찮게 하지 않을게요. 각하께서 어떤 여자와 놀아나시든 신경 쓰지 않을 자신 있어요.”

이렇게 밤에 몰래 찾아와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귀찮게 하지 않을 거라니. 에드가는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괜한 소동 일으키지 말자.

“레오폴드 양, 정신 차려.”

“국왕전하의 특별허가증 때문에 망설이시는 거라면 괜찮아요. 각하께서 제 명예를 더럽혔다고 소문이 나면…….”

“더 두고 들을 수가 없군. 나보고 지금 파렴치한이 되라는 건가? 이름도 기억 안 나는 당신을 위해?”

결국 에드가는 폭발하고 말았다. 그러자 방금까지 가련한 표정을 짓고 있던 헬레나가 팽하니 일어섰다.

그리고 그녀가 입고 있던 옷에 숨겨진 끈을 잡았다. 오늘 그녀가 입고 온 옷은 수도에서 유명한 디자이너 크리스토퍼가 만든 것이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드레스였으나 연인들을 은밀한 만남을 위해 제작 되어 허리에 숨겨진 끈 하나만 당겨도 스스륵 벗겨지는 옷이었다.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인가!”

이 자리에 서기까지 그녀는 내리 석달을 상사병에 시달렸다. 생각 같아서는 소리를 확 질러서 사람들을 부르고 싶었다. 그러나 에드가에게 처음 한 말과 달리 그녀는 아직 평판을 버릴 준비는 하지 못했다.

“추억을 남겨 주세요.”

하지만 도덕을 버릴 준비는 돼 있다. 남들 몰래 저지르면 된다.

“추억?”

“각하, 저 한 달 뒤 늙은 백작에게 시집가요. 한 번만, 한 번이면 돼요. 평생의 추억으로 간직할게요. 각하, 사랑해요.”

사랑?

구역질이 난다.

이게 악몽이라면 빨리 깨고 싶다. 에드가는 분노를 간신히 눌렀다. 그녀의 말대로 진짜 누군가 와서 이 몰골을 보이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그가 그녀가 나불대는 ‘책임’이라는 걸 지는 걸 거부하면 헬레나의 삶은 정말 시궁창에 빠진다.

“스테판.”

그가 나직이 이름을 부르자 어둠 속에서 인영이 나타났다.

“꺄.”

헬레나의 비명 소리는 곧 묻혀졌다. 스테판은 순식간에 모포를 가져와 그녀가 달아날 수 없게 꽁꽁 묶고 입도 막았다.

“레오폴드 후작, 나오시게.”

에드가의 말에 구석에 있던 책장이 스륵 움직였다. 곧이어 반백의 레오폴드 후작이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나왔다.

“미안하네. 딸이 마지막 소원이라고 그러지 않나.”

그리고 일이 잘 풀려서 겸사겸사 딸을 공작 부인으로 만들면 좋고?

에드가는 그리 쏘아붙이고 싶은 걸 참고 너구리같은 후작을 노려보았다.

“데리고 가게.”

후작은 이제야 체념한 듯 훌쩍이는 딸을 받았다. 그는 민망한 웃음을 흘렸다.

“내 딸의 무례를 다시 한 번 사과하네. 하지만…… 자네를 정말 좋아한 건 사실이네. 그, 음. 솔직히 나도 백작에게 애지중지한 딸을 시집보내는 게 썩 기쁘지는 않네.”

정말 애지중지하면 그런 혼담을 받아들일 리 없다. 에드가는 코웃음쳤다.

“공작, 그동안의 우정을 봐서 염치없지만 부탁하겠네. 딸을 위해서 마지막으로 키스 한 번 정도 해 줄 수 없나?”

“염치가 없는 걸 알면서 왜 부탁하나?”

레오폴드 후작의 얼굴이 벌게졌다. 이 정도까지 숙이고 들어갔는데 단칼에 거절한 에드가가 야속했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부탁했건만 자네는 정말 듣던 대로 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냉혈한이군. 그깟 키스, 한다고 입술이 닳나? 됐네. 됐어. 헬레나, 봐라.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공작 같은 나쁜 남자를 좋아하면 안 된다고.”

에드가는 무감동한 눈으로 레오폴드 후작을 바라봤다. 이런 악담 따위에 상처받기에 그는 너무 많은 모욕을 받아왔다. 상대는 그것을 모욕이라고조차 생각하지 않았지만.

“꺼져.”

후작의 목적은 도발이겠지. 딸은 사람이 들이닥치는 걸 두려워했지만 후작은 그렇지 않다.

스테판이 에드가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후작과 헬레나를 비밀통로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그 다음은 스테판이 알아서 해 줄 것이다.

간신히 홀로 남겨진 에드가는 깊은 한숨을 토했다. 정말이지 피곤하다. 마차에 막 내렸을때는 오지 않았던 여독이 몰려왔다.

‘저 딸은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할까?’

체면을 버리고 기회를 만들어 준 다정다감한 아버지라고 생각할까?

정말 딸을 사랑한 아버지라면 이런 미친 짓을 벌이지 않는다. 후작은 시장 통 노친네도 하지 않을 수작을 벌였다.

‘마지막으로 키스 한 번 정도 해 줄 수 있지 않으냐고?’

피식, 에드가는 비소했다. 그 키스가 그냥 키스 한 번으로 끝날 리가 없다. 레오폴드 후작은 마지막까지 계략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

‘그렇게 억지로 엮어서 결혼해 봤자 딸이 행복해질 리 없잖아.’

다른 여자랑 놀아나도 좋으니 결혼만 해 달라는 애원이 떠올랐다. 기분이 급속도로 나빠졌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하고서 뻔뻔스럽게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지?

사랑이란 건, 사랑에 빠졌다는 사람들을 다 그렇게 제멋대로에 비이성적으로 구나?

괴로웠다.

그로선 당연한 일을 했음에도 괴로웠다.

화가 치미는 동시에 헬레나라는 여자가 불쌍했다. 바람을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받아들이는 여인. 대체 누가 그녀에게 그런 사상을 주입하고 미덕이라 가르친 걸까.

아버지와 함께 돌아가면서 자신을 보던 눈빛이 잊혀지지 않는다. 슬픔에 가득 잠긴 원망스러운 눈빛. 그런 눈빛을 받으면 잘못한 게 없음에도 괴로워진다.

내가 잘못한 걸까?

그냥 추억 정도는 남겨 줬어도 되는 거였던 걸까?

-이 걸레 같은 놈아!

그때 한 여인의 목소리가 고민에 잠긴 그의 뺨을 때렸다.

-상대가 원해도 사랑하지 않으면 해선 안 되는 거야!

“하, 하, 하.”

그 순간을 떠올리자 다시 웃음이 치밀었다. 내내 얌전하고 순종적인 모습을 보였던 여자가 그처럼 발끈할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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