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23화
앤이 재빨리 작은 테이블을 루비카의 앞에 끌고 왔다. 로사는 더 긴말하지 않았다. 테이블 위에 바구니를 올리고 자투리 원단과 샘플이 될 만한 작은 자수들과 도안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새하얀 종이를 루비카의 앞에 두고 펜을 루비카의 손에 쥐여 주었다.
“반드시! 클레이모어 공작가 침방의 명예를 걸고 베르너 아가씨가 원하는 웨딩드레스를 완성하겠습니다.”
루비카는 어안이 벙벙해서 펜을 든 채 로사의 결연한 표정을 보았다.
대체 왜 이러는 걸까?
“하지만 하루 만에 어떻게 웨딩드레스를…….”
“만들 수 있습니다. 침방에는 저를 비롯한 5명의 우수한 침모들이 있습니다. 저희 다섯이 밤을 새우고 열과 성의를 다하면 충분히 완성할 수 있습니다. 부디 베르너 아가씨께서 평소 꿈꾸셨던 웨딩드레스를 만들 수 있도록 해 주세요.”
루비카는 문득 로사가 왜 그러는지 그 이유를 깨달았다.
‘나를 가엾게 여긴 거야.’
고작 하루밖에 가지지 않은 준비 기간, 증인 두 명만 세운 결혼식. 공작가의 결혼식치고 많이 초라하긴 했다. 루비카는 그런 그녀에게 웨딩드레스만이라도 그녀가 입고 싶어 하는 것을 입히고자 하는 앤과 로사의 따뜻한 마음을 읽었다.
“정말……고마워요.”
루비카는 제 앞에서 어쩔 줄 모르는 앤과 로사에게 생긋 웃었다. 언 마음도 녹일 듯한 따뜻한 미소였다.
“그럼 부디, 아가씨께서 입고 싶은 웨딩드레스를 그려 주세요.”
루비카의 허락이 떨어졌다 믿은 앤이 빈 종이를 가리키며 간청했다. 루비카는 펜을 든 채 새하얀 종이를 바라보았다.
‘……입고 싶은 웨딩드레스.’
루비카가 지난 삶에서 스물두 살이었을 때 그녀는 지참금도 없었다. 평생 결혼하지 못하고 살 것을 어렴풋이 예감했다. 그래도 가끔, 아주 가끔 웨딩드레스를 입은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비단과 꽃으로 치장해 바다 건너 님프마저도 탐낼 정도로 아름다운 드레스.
하지만 시간이 돌아가 다시 스물두 살이 되자 웨딩드레스에 대한 꿈같은 건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거적때기를 입고 해도 좋으니 결혼을 한다면 아르망이 좋아.’
그러나 그녀가 결혼할 사람은 아르망이 아닌 클레이모어 공작이었다. 원하지 않는 사람과의 결혼식 따위 어떤 식으로 치러져도 상관없다. 초라하게 치러지든 화려하게 치러지든 루비카의 알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기다리는 앤과 로사를 보니 아무거나 대충 입어도 된다는 말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
그들의 호의를 진흙탕에 처박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좋을까.’
그때 루비카의 머릿속에 한 드레스가 떠올랐다. 아직 자신의 진짜 아름다움을 채 드러내지 못한 드레스. 루비카는 옷장에서 그 옷을 발견하고 안타까움을 느꼈다. 실루엣이 아름다운 드레스였다. 그러나 요즘 유행하는, 어울리지도 않는 장식을 다는 바람에 옷을 다 망쳤다.
루비카는 새삼스레 무릎 위에 올려놓은 쿠션을 바라보았다. 쿠션 모서리에 놓인 클레이모어의 문양은 공작가 침방에서 놓은 수였다. 이 정도의 자수 솜씨라면 그 드레스의 아름다움을 찾아 주고도 남았다.
그래, 어차피 드레스를 지어야 한다면 그 드레스의 잃어버린 아름다움을 찾아 주자.
“저, 있던 드레스를 새로 수선하는 건 어떤……”
‘가요.’ 라고 버릇처럼 존댓말을 하려 했던 루비카가 말을 흐렸다.
“수선이요?”
“이왕이면 새로 만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아가씨.”
“저희는 걱정하지 마세요. 밤을 새워서라도 완성할게요.”
루비카는 자신을 위해 무엇이든 하겠다고 구는 앤과 로사의 모습이 생소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렇게 신분 높은 집의 사람들은 얼음으로 만들어진 듯 차가울 거라 생각했다. 실제로 클레이모어 공작이 그랬다. 하지만 앤과 로사는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제때 완성하지 못하면 더 큰일이잖아. 밤을 새다보면 실수를 하기 마련이고. 저, 로사. 전문 디자이너는…… 지금 없죠?”
루비카의 지적에 로사의 얼굴이 붉어졌다.
“괜찮습니다. 기본적인 옷본은 침방에서 보관하던 게 있습니다. 실험적인 디자인은 힘들겠지만 아가씨가 입고 싶은 옷은 충분히 만들 수 있을 겁니다.”
“아, 자존심을 건드리려 한 건…….”
“그런 말씀마세요. 아가씨가 입고 싶은 옷을 만드는 게 저희들의 기쁨입니다.”
로사가 간절히 간청했다. 루비카는 그 마음을 안다. 루비카 또한 안젤라에게 예쁜 머리를 만들어 줄 때 누구보다 뿌듯했다.
그건 자신을 예쁘게 꾸미는 것과는 다른 기쁨이었다.
‘……어떻게 설득해야 좋을까?’
루비카는 말로는 로사와 앤을 설득하기 무리라고 판단했다. 그들은 루비카가 자신들을 배려하느라 정말 원하는 드레스를 입지 못할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래, 실물을 직접 보여 주는 게 낫겠어.’
아름다움이란 매우 주관적인 듯하면서 또 객관적이다. 루비카가 발견한 드레스를 보고 그녀의 설명을 듣는다면 분명 로사는 그 드레스의 숨겨진 미를 깨달을 것이다. 루비카는 일단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입고 싶은 드레스를 보여드릴게요.”
“네?”
또 높임말을 써 버렸다. 루비카는 자신의 실수에 혀를 찼다.
다행히 앤과 로사는 뜬금없는 그녀의 말에 놀라 눈치채지 못한 듯 했다. 루비카는 그 실수를 눈치채기 전에 그들을 드레스 룸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만찬회 드레스를 모아 놓은 칸을 열어 그녀가 발견한 예의 붉은 드레스를 꺼냈다.
드레스는 잘 관리된 비단 특유의 고아한 빛깔을 뽐내고 있었다.
‘오히려 새 비단은 이런 빛을 낼 수 없지.’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드레스를 꾸며주고 있는 레이스는 그에 어울리지 않았고 소매는 지나칠 정도로 길었다. 분명 급히 옷을 준비하느라 침모가 예전 드레스에 최신 유행하는 레이스를 붙이기만 한 듯했다.
“아가씨, 이건 재질이 좋긴 하지만…….”
“결혼식에 입을 웨딩드레스로는 턱없이 부족한 것 같네요. 차라리 이쪽 드레스가 낫지 않을까요?”
앤이 옷장에서 이팝나무 꽃이 잔뜩 수놓아진 옅은 하늘색 드레스를 골랐다. 아름다운 드레스이지만 루비카는 그 드레스는 처음부터 후보에서 제외했다.
일몰 즈음에 열리는 결혼식과 하늘색은 어울리지 않는다. 게다가 저런 연한 하늘색 드레스를 입으면 루비카의 우윳빛 피부는 흙색으로 변하기 일쑤였다.
“이걸 그대로 입겠단 소리가 아니라……. 여기, 이 레이스와 러플을 모두 떼어 내고 소매는 짧게 고치고 가슴 부분과 스커트 아래까지 금빛 자수를 놓아. 앞부분에 최대한 화려하게, 그리고 뒤는 깔끔하게 비단의 광택을 살려 자수를 두지 않는 건 어떤……가요?”
신나게 설명하던 루비카가 말끝을 흐리며 조심스레 앤과 로사의 눈치를 보았다. 로사는 새삼 진지한 표정으로 루비카가 꺼낸 드레스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루비카의 말대로 변모할 드레스의 모습을 그려 보았다.
‘자수는 자잘한 것보다 큼직한 게 좋겠어. 그래. 요새 유행하는 꽃무늬 말고 최근에 사막 상인들에게 입수한 동녘 나라 책에 나오는 호탕한 독수리 자수 같은 거. 오히려 그런 게 어울릴 거야. 중심 부분에 집중적으로 자수를 놓은 다음에 아가씨의 갈색 머리를 풍성히 올려 자수 색깔과 비슷한 공작 부인의 보관을 쓰면…….’
“아름다워.”
눈을 채 뜨기도 전에 로사의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루비카는 그녀가 자신과 똑같은 비전을 그렸다는 사실에 기뻤다. 공작저에서 오래 일한 침모장이다. 단순히 자수만 잘 놓아서는 그 자리에 오르기 힘들다. 필히 누구보다 뛰어난 ‘아름다움’을 발견해 내는 능력이 있으리라.
“그렇죠? 로사, 아름답죠?”
“네, 아가씨.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르네요. 세상에, 어쩜 그런 걸 생각해 낼 수 있었죠?”
“무늬는…….”
“잠시, 잠시만요! 제가 먼저 그리게 해 주세요.”
로사는 황급히 드레스 룸에서 종이와 펜이 기다리고 있는 테이블로 뛰어갔다. 그런 로사의 뒷모습을 보며 뿌듯이 웃고 있는 루비카에게 황망한 표정의 앤이 질문했다.
“로사가 눈을 감더니…… 갑자기 아름답다고 소리치고 대체 뭘 본 거죠?”
“이 드레스의 진짜 모습이요.”
“진짜 모습?”
앤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떠올리려 했다.
로사가 한 대로 눈앞의 붉은 드레스 위에 금빛 자수를 놓았다.
요즘 유행하는 자잘하고 섬세한 딸기꽃 무늬의 자수를…….
“안 예쁜데?”
의외로 진짜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눈을 갖춘 사람은 세상에 별로 없다. 루비카가 앤의 손을 잡아끌었다.
“자, 자. 앤, 그러지 말고 우리 로사가 뭘 그렸는지 보러 가요.”
“아가씨! 말 놓으세요!”
“……아, 앤.”
앤은 이번에는 루비카가 존댓말을 쓴 걸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루비카가 자신의 손을 다정히 잡아 이끄는 바람에 그만 화낼 뜻도 잃어버리고 말았다.
‘볼수록 매력적인 아가씨야.’
평범한 갈색 머리에 적갈색 눈을 가졌고 피부도 요즘 유행하는 미녀의 조건이라 일컬어지는 창백할 정도로 투명한 흰빛이 아닌 적당한 우윳빛이었다. 하지만 루비카가 흐드러지게 웃으면 볕 없는 창가에 햇살이 드리운 것 같았고 차가운 서리를 뚫고 새순이 올라온 듯했다. 그 흐뭇한 광경은 보고 있는 이의 언 마음을 녹이고 함께 웃게 하는 힘을 가졌다.
앤은 루비카의 미소에 취해 화낼 생각도 잊고 루비카가 이끄는 대로 성큼성큼 걷다보니 어느덧 로사가 있는 테이블에 당도했다.
“아가씨, 이것 보세요. 어떤가요?”
그 사이에 로사는 드레스에 놓을 자수의 간략한 스케치를 끝냈다. 로사의 스케치를 본 루비카는 환히 미소 지었다. 그녀가 처음 생각했던 무늬보다 더 과감하고 아름다운 스케치였다.
“어머, 정말 예쁜데? 앤, 이것 봐.”
“……어.”
앤이 두 눈을 깜빡거렸다. 그리고 스케치의 자수를 다시 보았다. 세 번 보았다. 곧 그녀의 회색 눈에도 기쁨의 빛이 서리기 시작했다.
“세상에!”
다행히 앤은 완전한 패션치는 아니었다. 적당한 단서가 주어지자 앤의 눈에도 드레스의 진짜 모습이 떠올랐다.
“어쩜 세상에……. 아가씨, 그 옷의 예스러운 비단 광택과 자수가 무척 잘 어울릴 것 같아요.”
“맞아. 앤, 네 말대로 새 비단에서는 그런 느낌이 나지 않아. 고상한 정취가 있어서……. 정말 확신하는데 새 드레스를 만드는 것보다 그 옷을 아가씨 말대로 꾸미는 게 훨씬 아름다울 거야.”
“……그럼 모두 밤을 새우지 않아도 되는 거야?”
루비카의 말에 앤과 로사가 웃음을 터트렸다.
“새지 않다 뿐일까요. 반나절이면 충분합니다.”
“반나절?”
“여기서 더 꾸물거릴 시간이 없군요!”
로사는 이미 안달 난 상태였다. 그녀는 바로 바구니도 내팽개쳐 두고 드레스를 들고 침방을 향해 뛰어갔다. 얼떨떨하니 남겨져 있는 루비카의 손을 앤이 다정스레 잡았다.
“자, 이제 옷은 골랐으니, 그럼 우린 보석을 보러 갈까요?”
앤의 그 한마디에 루비카의 얼떨떨함이 사라졌다. 루비카의 얼굴에 절로 환한 빛이 어렸다. 오랜 역사를 간직한 클레이모어 공작가의 보고를 볼 기회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