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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22화 (2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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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22화

* * *

칼과의 이야기를 끝낸 앤은 바로 침방으로 쳐들어갔다. 침모들은 마침 새로 온 공작 부인이 앞으로 입을 옷에 달기 위한 자수를 한창 놓고 있었다.

“이럴 때가 아니야!”

침모들은 문을 열자마자 절규하는 앤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시녀장이 호들갑 떠는 건 일상이었다.

앤의 절규에도 침모들은 가만히 자리에 앉아 손을 놀려 수를 놓았다. 그나마 침모장으로 가장 오래 공작가에서 일한 로사가 예의상 말을 걸었다.

작고 또렷한 목소리는 듣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차분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무슨 일인가요? 앤.”

“오, 로사. 글쎄. 공작 각하께서 결혼식을 내일 하기로 했대!”

“네?”

바느질하던 침모들의 손이 일시에 멈췄다. 그들은 당혹으로 얼룩진 얼굴로 앤을 바라보았다. 로사는 차분히 앤에게 다음 질문을 이어갔다.

“……그런, 그럼 웨딩드레스는 어떻게 하기로 했나요? 각하께서 따로 주문하셨나요? 아니면 영애께서 준비하셨나요?”

역시 침모다. 피로연이니, 결혼식은 어디에서 하니 같은 건 다 제쳐 두고 웨딩드레스에 대한 질문부터 하다니.

앤은 로사를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경력 30년, 로사는 정말이지 뛰어난 침모장이었다.

“있던 옷 중에서 대충 제일 좋은 옷으로 고르라고 했답니다.”

“세상에!”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하다못해 장식이라도 바꿔야지요!”

“누가 그리 결정한 거랍니까?”

앤은 그게 바로 우리의 공작 각하라고 대답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침모들은 그자를 알아내면 당장 들고 있는 바늘로 눈을 찔러 줄 태세였다.

앤은 에드가가 바늘에 눈이 찔리는 일만은 막고 싶었다.

“그래서 여러분을 찾아왔지요. 자, 당장 하던 걸 멈춰요. 그리고 공작 부인을 위한 웨딩드레스를 만드는 거예요!”

앤의 눈동자가 초롱초롱 빛났다. 침모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당장 하고 있던 바느질감을 저 멀리 치워 버리고 웨딩드레스를 만들기에 적당한 견사와 금은사를 찾아왔다.

일사불란 움직이는 모습은 보기만 해도 흐뭇해졌다.

보통 귀족 저택에서 침모란 가장 고된 일이었다. 보통 1~2년 정도 침모 일을 하다가 저택에 온 디자이너의 눈에 띄어 의상실에 취직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공작가에서 일하는 침모는 모두 경력 20년 이상의 베테랑으로 다른 귀족 집안에 가면 침모장이 되고도 남을 사람들이었다.

단 몇 분 만에 준비를 다 마친 침모들은 일제히 고개를 돌려 앤에게 외쳤다.

“그럼 뭘 만들면 됩니까?”

“뭘? 그야 드레스요. 웨딩드레스.”

“앤, 웨딩드레스는 당연히 만들 거고요. 우리가 말하는 건 디자인이랍니다. 어떤 스타일에 어떤 보석을 곁들이고 어떤 자수를 놓을지.”

“그런…….”

앤은 말문이 막혔다. 그렇다. 이 자리에 있는 5명의 침모는 무척 뛰어나 지금부터 전원이 밤을 새워 바느질 하면 근사한 웨딩드레스를 만드는 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침모는 침모일 뿐이었다. 그들은 오직 무엇을 만들지 누군가가 정해 줬을 때에야 실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디자이너! 디자이너가 필요해!’

하지만 선대 공작 부인이 돌아가신 지 벌써 3년. 에드가의 의상은 남성복을 전담하는 수도의 재봉사가 쭉 만들고 있었고 클레이모어 공작가는 따로 숙녀의 근사한 드레스를 만들 일이 없었다.

몇몇 객식구가 있었으나 그들은 입장에 따라 알아서 옷을 주문했다. 드레스를 주문하지 않는지 벌써 3년이나 지났다.

인근에 사는 의상 디자이너의 연락처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다.

이 뛰어난 침모들도 근래 3년간은 쿠션이나 가구, 커튼, 손수건에 자수나 놓는 게 주 업무였다.

“어…… 어쩌죠. 각하께서 따로 알아보지 않으셨고 아…….”

공황에 빠진 앤이 말이 많아졌다. 침모들도 함께 당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로사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녀는 앤의 손을 꼭 잡았다. 갈색 눈동자가 흔들리는 회색 눈동자를 굳건히 잡았다.

“공작 부인께 아니, 베르너 아가씨에게 갑시다.”

“베르너 아가씨에게요? 영애께 우리가 이렇게 준비되지 않았단 사실을 알릴 수는…….”

“앤! 이 세상의 모든 여자는 웨딩드레스를 꿈꿔요!”

로사가 크게 소리쳤다. 침방(針房)이 쩌렁쩌렁 울리고도 남을 소리였다. 앤은 로사가 그리 소리치는 걸 평생 처음 보았다.

그녀는 침모라는 직업에 지나치게 어울릴 정도로 조곤조곤 말하는 습관을 지닌 여인이었다.

“심지어 결혼 따위 안 할 거란 열 살 난 내 손녀조차도 무슨 웨딩드레스를 입고 싶냐고 물으면 한 시간은 조잘조잘 떠들어 대요. 그날은…… 그날은…….”

태어나 처음으로 크게 소리쳤다. 로사는 숨을 골랐다. 더 크게 소리치기 위해.

“세상에서 제일 예쁜 드레스를 입고 공주님보다 더 아름답게 꾸며도 괜찮다고 허락된 날이니까!”

세리토스 왕국은 사치를 혐오했고 검소를 사랑했다. 그러나 딱 하루, 결혼식에 한해서는 모든 국민에게 어떤 제약도 두지 않았다.

공주님이나 할 수 있는 티아라를 머리 위에 올려도 괜찮았고 공주님처럼 자신의 드레스와 같은 색 옷을 하객에게 입고 오지 말라고 지정해도 아무도 흉보지 않는 날이었다.

심지어 공주가 무도회에서 그런 짓을 하면 성격이 나쁘다는 수식어가 붙었으나 신부가 그리 하면 응당 그래야 하는 것처럼 하객은 명령에 따랐다.

“그런, 그래요. 그 생각을 못했네요. 맞아요. 분명 베르너 아가씨께서 입고 싶은 웨딩드레스가 있을 겁니다.”

“아가씨께서 어떤 걸 원하는지 대충 말해 주시면 부족하나마 작업을 해 보죠. 전문 디자이너만큼 창의적이진 못하나, 모두 이 세상에 못 만들 건 없다고 자신할 만한 실력이니까요.”

로사의 말에 침모들이 결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 부인이 될 여인의 웨딩드레스였다. 거기다 다른 의상실의 솜씨를 거친 게 아닌 클레이모어 공작가의 침방에서 직접 만든…… 침모들의 자존심이 달린 일이었다.

“그럼 당장 아가씨에게 가요. 로사.”

“잠시 기다려 봐요.”

로사가 명령을 하기도 전, 침모 몇몇이 샘플이 될 만한 천 몇 가지와 실, 레이스, 그리고 자수 도안을 가져왔다.

공작가 침방의 솜씨는 무척 뛰어났기 때문에 과거 디자이너들은 종종 디자인까지만 하고 자수나 재봉은 침방에 맡겼다.

그리고 눈썰미 좋은 침모들은 디자인을 의논할 때 필요한 걸 놓치지 않았다. 로사는 그들이 건넨 물건을 바구니에 넣고 마지막으로 새하얀 종이 몇 개와 펜을 넣었다.

“자, 이제 가요.”

“정말 철저하군요. 아가씨도 분명 기뻐할 거예요!”

앤은 루비카가 뛸 듯이 기뻐하리라 확신하며 서둘러 루비카가 있는 공작 부인의 방으로 갔다.

그 시각 루비카는 -

“이 자수는 어떻게 한 걸까?”

화장대 옆 작은 의자에 앉아 침대에 놓였던 쿠션을 양손으로 들어 눈 가까이 가져다 대 꼼꼼히 감상하는 중이었다.

공작가의 물건은 확실히 루비카의 미의식을 한 차원 더 높여 줬다. 루비카는 이미 드레스 룸의 모든 옷을 꼼꼼히 보았다.

스토마커에 놓은 수의 특징과 무늬, 그리고 보석. 스커트의 주름, 드레스의 사용된 레이스, 가운의 실루엣, 소매의 특징.

모든 것을 눈에 담고 손을 쓸어 촉감을 확인하고 바람결에 따라 어찌 변하는지 속속들이 머리에 담아 두었다. 세계의 온갖 물건이 오갔던 아버지의 무역상, 수많은 나라의 사람들이 섞여 살았던 휴의 수도원, 그리고 이제 세리토스 왕국 내 최고의 부를 자랑하는 클레이모어 공작가까지.

루비카 안의 ‘미’는 한 차원 더 높은 경험을 흡수해 점점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아가씨! 앤입니다.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쿠션에 놓인 단순하고 장식적인 아름다운 자수에 취해 있던 루비카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깜짝 놀라 자리에 일어나서 문을 열까 했다가 그만두었다.

‘보통 귀족은 앉아서 부르기 마련이지.’

오히려 직접 문을 열면 앤이 하녀의 습관이 몸에 배었다고 자신을 안쓰러워할지도 모른다.

루비카는 들고 있던 쿠션을 무릎 위에 내려놓고 조용히 말했다.

“들어와도 돼…….”

“요”라는 말을 간신히 삼켰다.

“감사합니다.”

허락이 떨어지자 문이 조심스레 열렸다. 그리고 앤은 보았다. 쿠션으로 자신의 배를 보호하고 있는 루비카의 모습을.

‘오오, 저건!’

분명 뱃속의 태아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도 모르게 한 본능적인 행동이 틀림없다. 오해는 확신이 되었다. 앤은 감동이 차올라 루비카는 똑바로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 차갑고 결벽증에 가깝게 변한 에디의 마음을 어떻게 녹인 걸까?

어쨌든 루비카는 앤에게 다시금 아이의 따뜻한 웃음소리를 머금은 클레이모어가를 선물해 줄 사람이었다. 앤은 집사가 모든 일에 에드가를 우선으로 놓듯이 루비카를 자신의 최우선으로 놓기로 이 자리에서 결심했다.

“무슨 일인가요?”

루비카는 자신을 바라보며 감격한 표정을 짓는 앤에게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회색 눈을 가진 사람은 차갑다는 속설과 달리 시녀장 앤은 자주 격정에 휩싸이는 듯 보였다.

그녀의 머릿속 상상을 모르는 루비카는 그저 갑자기 아무런 말없이 서 있는 앤이 걱정스러웠다.

“아, 오! 아.”

루비카의 아이가 가져다 줄 기쁨에 대한 상상에서 채 벗어나지 못한 앤이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자 로사가 한숨을 쉬며 대신 말했다.

“안녕하세요. 아가씨, 저는 침방을 책임지고 있는 로사라고 합니다.”

“어머! 반가워라.”

루비카의 얼굴에 환한 빛이 어렸다. 이 쿠션의 단순하면서도 아름다운 무늬를 수놓은 게 설마 로사일까? 절로 존경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루비카의 그런 표정의 변화를 앤과 로사는 실로 다르게 해석하고 말았다.

‘……역시 예쁜 웨딩드레스를 입고 싶었던 게 틀림없어.’

다만 클레이모어 공작인 에드가가 보통 성격이 아닌지라 제 뜻대로 하지 못한 거겠지. 앤과 로사는 반드시 루비카에게 근사한 웨딩드레스를 입히고 말리라 다짐했다.

“내일 각하와 결혼식을 하게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저어, 그래서 웨딩드레스 말인데요.”

“그냥 적당히 좋은 옷을 입고 하기로 했어요. 각하께서도 그리하겠다 하셨고요.”

루비카가 생긋 웃었다. 그녀는 아무 불만 없었다. 지금 입고 있는 드레스도 그녀의 생에서 가장 비싼 드레스였고 옷장에 있는 옷들은 더 말할 것이 없었다. 무엇을 입든 괜찮았다.

아, 하지만 그녀가 밝게 웃으면 웃을수록 앤과 로사의 마음은 찢어져 갔다. 앤의 눈에는 루비카의 미소는 아련하고 가련한 것이 되었고 로사의 눈에 루비카의 미소는 상냥하기 이를 데 없는 숙녀의 것이었다.

“베르너 아가씨, 저희 침방이 반드시 아름다운 웨딩드레스를 만들겠습니다!”

“……네?”

“맡겨만 주세요.”

“그게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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