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21화 (21/212)

# 21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21화

“지금은 괜찮지만 정식으로 공작 부인이 되시면 제가 난처해집니다.”

루비카 또한 난처했다. 마차의 하녀는 자신과 나이가 비슷해 괜찮았으나 시녀장은 한참 나이가 많아 보였다.

이처럼 나이차가 나는 사람에게 하대한 기억이 없다. 비록 자신에게 노인의 기억이 있었다 하더라도 지금 루비카는 스물두 살이었다.

게다가 공작가의 시녀장이 되려면 못해도 백작가의 여식이어야 한다. 하지만 루비카의 상식에도 시녀장에게 존대를 하는 공작 부인이란 뭔가 좀 어색했다.

“힘들지만…… 노력해 볼게.”

루비카의 말에 앤이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녀는 곧이어 간단히 착용할 수 있는 액세서리가 어디에 있는지 얼굴에 바르는 크림과 눈썹을 그리는 먹의 위치 등을 알려 주었다.

일주일 만에 준비했다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모든 것이 구비되어 있었다.

‘유능한 시녀장이구나.’

루비카는 새삼 존경스러운 눈으로 앤을 바라보았다.

클레이모어 공작가처럼 대단한 집의 시녀장이 되려면 얼마나 많이 노력했을까. 잠깐 실수로 에드가의 애칭을 부른 걸 보아서 오래 이 집에서 일한 듯했다.

이처럼 대단한 가문에서 실수 없이 오랫동안 일했다는 건 그만큼 그녀가 대단하다는 반증이었다.

“그럼 고생하셨으니 푹 쉬실 수 있도록 저는 이만 물러날 게요.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설렁줄을 당기세요. 산책을 가고 싶으시거나 먹고 싶은 게 있으시면 망설이지 말고 말씀해 주세요.”

루비카는 마석마차를 타고 온 게 고생이라 할 만한지 의심스러웠다.

오히려 마차 안에 있던 폭신한 침대 때문에 몇 십 년 만에 푹 자고 쉬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앤이 너무나도 자신을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고 지금은 방안에 혼자 있고 싶었다.

루비카가 고개를 끄덕이자 앤은 필요한 일이 있으면 꼭 부르란 당부를 두세 번 반복하고 나서야 방을 나갔다.

그녀가 나가자마자 얌전하고 조용하게 앉아 있던 루비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세상에! 너무 예뻐! 이 벽지 무늬. 이건 누가 그린 걸까? 이렇게 예쁜 색은 본 적 없어. 여기 반짝이는 디테일은 무슨 안료를 쓴 걸까?”

드디어 방해꾼 없이 마음껏 탄성을 지르고 아름다운 피조물을 경탄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커튼에 달린 레이스는 누가 짠 걸까? 어쩜 이렇게 일정하고 얇게 짤 수 있는 거지? 님프가 짠 걸 훔쳤다고 말해도 난 믿을 거야.”

루비카는 방 안에 장식된 모든 물건을 하나씩 꼼꼼히 살피며 그 아름다움을 눈에 담기 시작했다. 그러려면 오늘 하루 꼬박 밤을 새우고도 부족할 것이다.

* * *

“그게 무슨 말인가요? 칼!”

루비카의 안내를 끝내고 집사 칼을 만난 앤은 당황해서 새된 소리를 질렀다.

마음 같아서는 목덜미를 잡고 쓰러지고 싶었으나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었다.

“공작 각하께서 그리 명령하셨습니다.”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앤은 여태 에드가에게 제법 많은 뒤통수를 맞아 왔지만 이번 뒤통수는 무척 특별했다.

그녀가 맞은 뒤통수 중에서 이만큼 강렬하고 충격적인 건 없었다.

“당장 결혼식을 내일 하겠다니…….”

클레이모어 공작가문 정도 되는 집안이라면 결혼식을 준비하는데 일반적으로 1년여를 소모했다. 가문의 역사에서 가장 짧게 준비한 결혼식도 4개월이 걸렸다.

어떤 하객을 초대하고 어떤 자리에 앉힐지 결정하는 데만 해도 1개월이 필요했다.

결혼식 드레스를 만드는데 드는 기간만 해도 어마어마했으며 음식을 준비하고 식장을 꾸미는 데 드는 시간은 또한 만만치 않았다.

“각하는 하객을 따로 초청하지 않기로 하셨습니다. 가까운 휴의 사원에서 증인 두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결혼식을 끝내고 간단히 저택에서 피로연을 하기로 했습니다.”

칼은 루비카의 입장을 생각해 베르너 부부와 관련된 이야기를 앤에게 하지 않았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개소리에요!”

칼은 앤의 입에서 나온 험한 말에 깜짝 놀랐다. 앤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칼에게 항변했다.

“평생에 한 번뿐인 결혼식이에요. 베르너 아가씨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옷을 입고 많은 사람에게 축복받고 결혼을 시작할 권리가 있어요!”

“……베르너 영애도 동의하셨습니다.”

앤은 현기증이 일어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루비카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처사에 화내기는커녕 동의했단 말인가.

그녀가 아무리 선하고 착하다 할지라도 결혼식을 이리 빨리 치를 이유가 없다.

이리 급하게 결혼식을 치러야 할 이유는…….

앤은 갑작스레 무언가를 깨달았다.

“앤?”

칼은 방금까지 얼굴이 푸르죽죽했다가 금세 혈색이 돌다 못해 얼굴에 웃음꽃이 피는 앤을 걱정스레 불렀다.

“그래요. 음, 그렇군요.”

서로 사랑하는 연인이 앞뒤 재지 않고 급히 결혼을 치러야 할 이유. 앤은 확신했다.

임신, 임신이다. 그 이유밖에 없다.

베르너 영애도 나이가 제법 있었고 에드가도 한창때였다.

서로 사랑에 빠진 연인이 잠시 자제력을 잃을 수도 있을 법했다. 그러던 차 의도치 않게 사랑의 씨앗을 품을 수도 있지.

하지만 두 사람은 귀족이다.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아이가 생기는 건 에드가에게 자랑일지 몰라도 루비카에게는 아니었다.

‘그래, 아이 때문일 거야. 그러니 각하도 무리해서 결혼을 추진한 거야. 어머나 세상에, 어쩜 나는 그것도 모르고…….’

앤은 자신이 눈치 없이 굴었다고 여겼다. 아마 집사 칼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하고 있으리라. 이 사실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다.

앤은 루비카가 더욱 좋아졌다. 삭막하기 짝이 없는 클레이모어 공작가에 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리게 될 거라니.

상상만 해도 좋아서 자리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결혼식이 당장 내일이라 해도 앤은 루비카에게 예쁜 드레스를 입혀 주고 싶었다.

비록 두 명의 증인만 있는 간단한 결혼식에 공작저 내 식구들만 참여한 단출한 피로연이라고 해도 적어도 루비카의 기억에 무척 멋지고 아름다웠다고 기억되고 싶었다.

“칼!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아니, 그러고 보니 따지고 싶네요. 당장 결혼식이 내일이면 제가 베르너 영애를 안내하자마자 쪼르르 달려와서 준비할 게 많다고 이럴 때가 아니라고 횡설수설 말을 해도 모자랄 판에!”

“네? 음…….”

“어서, 주방장을 불러 피로연 준비를 하라고 해요. 아, 근방에 사는 신사숙녀분들이라도 초대할 수 없는 건가요?”

“글쎄, 공작 각하의 말씀에 따르면 괜히 초대했다 다른 고위 귀족들의 항의를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렇긴 하겠네요. 그분들이야 이쪽 사정 따윈 생각하지 않고 어째서 남작 나부랭이는 초대했으면서 자신들을 부르지 않았냐고 하실 테니까요. 확실히 성내 식구들만 참석하는 게 뒷말이 없겠군요.”

“네, 각하께서는 최소한의 인원으로 조용히 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결혼식도 증인만 참석 하는 쪽으로 했습니다. 앤, 이 경우 소박하게 옷은 있는 것 중 적당히 좋은 것도 고르고 피로연도 적당히…….”

앤의 이마에 힘줄이 섰다. 그녀는 도저히 칼의 말을 더 들어줄 수 없었다.

“칼, 조용히 하란 이야기는 소박히 하란 이야기가 아니에요.”

앤이 단호한 말을 잘랐다. 칼은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아 눈을 깜빡였다. 앤은 제 주인밖에 모르는 집사를 향해 한숨을 쉬었다.

“정말 당신은 예전부터 에디만 생각하느라 다른 건 보지도 않았죠.”

“앤, 제가 각하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각하를 에디라고 부르는 것 좀 그만두십시오. 아까 베르너 영애 앞에서도…….”

“아, 알았어요. 그만두죠, 그만둬. 하지만 칼, 결혼은 각하 혼자 하는 게 아니에요. 각하와 베르너 영애가 함께 하는 거예요. 베르너 영애는 지금……”

앤은 임신이라는 말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안 된다. 지금은 이 경사를 입에 함부로 담았다간 베르너 영애에게 누가 될 수 있다.

“……어쩔 수 없는 사정 때문에 각하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지만 글쎄요. 각하도 지금 한참 냉랭한 게 멋진 줄 착각할 나이여서 그런 소박하고 작은 결혼식을 멋지다고……”

“앤, 제발 각하를 어린애 취급하는 것 좀 그만둘 수 없습니까? 각하는 대단한 분입니다.”

“누가 대단하지 않대요? 아니, 각하가 공작이든 말든 심지어 황제라고 해도 에디는 내가 어릴 때부터 지켜본 에디에요.”

칼은 이 수다스러운 앤에게 괜히 항의를 해 봤자 이야기가 이상한 쪽으로 흘러가기만 하리란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이 기나긴 대화에 종점을 찍고 싶었다.

“알겠습니다. 앤, 그래서 피로연 어찌할까요?”

“아, 내 정신 좀 봐! 에고, 잔뜩 딴소리를 했네요. 무슨 방법을 쓰든 베르너 영애께서 적어도 자신이 찬밥 취급은 당하지 않았다고 여기게 해야 해요. 급하게 치르느라 결혼식을 소박하게 하면…… 그래요. 신부는 당장에야 어쩔 수 없다고 납득하겠죠. 하지만 아시죠? 칼, 공작 부인 정도 되면 수많은 결혼식에 초대를 받아요. 돈 들이고 공들인 백작과 후작의 결혼식을 보게 되실 거예요. 그러다 문득, 어느 날! 자기보다 신분 낮은 사람들의 결혼식보다 못한 자신의 결혼식을 떠올리면……. 칼! 당신은 각하가 십 년이고 이십 년이고 초라한 결혼식 때문에 바가지 긁히는 걸 보고 싶나요? 그게 정말 공작 각하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나요?”

앤이 일장 연설을 끝내고 헉헉 숨을 들이쉬었다. 칼의 생각에 베르너 영애는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게다가 앤은 아직 피로연 이야기는 ‘ㅍ’자도 시작하지 않았다. 하지만 칼은 그 사실을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앤에게 동조했다.

“앤의 말이 맞는군요. 그래요. 일단 할 수 있는 한에서 결혼식장을 꾸미고 적어도 피로연만큼이라도 멋지게 준비하도록 합시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될까요?”

“당장! 인근 요리사란 요리사는 다 불러서 멋진 요리를 준비해요. 툭 건드리면 비둘기가 날아가는 파이도 만들어요.”

“비둘기파이요? 그건 시간이…….”

“칼! 무능한 소리 말아요. 그리고 창고에 있는 비단 다 꺼내요. 다 꺼내서 하녀들을 시켜서 커튼을 만들고 식탁을 꾸며요.”

“침방에 전달하겠습……”

“침모는 그런 거 할 시간 없어요!”

앤이 참지 못하고 칼의 어깨를 퍽 쳤다. 앤의 엄청난 힘에 칼은 그만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

“침모들은 무척이나 중요하고 또 중요한 일을 해야지요!”

“중요한 일이라니요? 식장을 꾸미는 것과 피로연보다 중요한 게 또 있습니까?”

“이런 눈치 없는 작자를 봤나. 당연히! 웨딩드레스 만들기지요!”

칼이 어안 벙벙한 얼굴로 앤의 반짝이는 회색 눈을 보았다.

웨딩드레스를…… 하루 만에 만들 수 있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