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20화 (20/212)

# 20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20화

“이 중에-”

에드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낮아 오히려 소란스런 와중에도 잘 들렸다. 클레이모어 공작가의 사람들은 그가 말을 시작하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에드가는 25살의 젊은 공작이나 그는 이미 가문을 제대로 점령하고 있었다.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졸업한 사람이 있소?”

순식간에 회의실에 침묵이 감돌았다. 클레이모어 공작가의 사람 중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조기졸업하고 교수들로부터 시대의 총아라는 말을 들은 사람은 에드가 한 명 뿐이었다.

“클레이모어 가는 핏줄이 대단해서 공작이 된 가문이 아니오!”

에드가가 새파란 눈으로 친척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바라봤다.

그의 눈은 사람의 기를 죽이고 시선을 피하게 만드는 힘을 지녔다. 세포의 구성까지 꿰뚫어 보는 듯한 눈이었다.

“우리는 마석을 이용한 뛰어난 무기를 개발함으로써 세리토스 왕국에 부를 가져다주었고 왕국민들이 먹고 살 수 있게 만들었소. 클레이모어가 한 해 무엇을 발명하느냐에 따라 왕국민의 식탁이 달라지오. 우리 공작가가 많은 것을 누리는 것은 절대 핏줄이 대단해서가 아니오. 만약 내게 후사가 없다면 응당 뛰어난 과학자이자 발명가인 조지프가 다음 공작 자리를 이어받아야 할 것이오.”

파격적인 결정이었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하지만 클레이모어 가문 사람들은 공작이 그런 제의를 하면 국왕이 입이 찢어져서 받아들일 것임을 알고 있었다. 조지프를 그의 양자로 들이고 님프의 축성을 받으면 못할 것도 없었다.

“그래, 루비카 베르너. 음, 확실히 우리 공작가에 부족한 여인이지. 상인의 집에서 자란데다가 나이도 너무 많고 지참금도 없어.”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질레한이 말을 꺼냈다. 사람 좋아 보이는 수염이 그가 말할 때마다 실룩거렸다.

“하지만 무슨 상관인가. 에드가 네가 사랑한다면! 클레이모어 공작이 쩨쩨하게 부인의 지참금을 계산할 입장인가?”

에드가는 속이 검은 질레한이 계산을 다 끝내고 말을 꺼낸 것임을 눈치챘다. 피가 섞이지 않는 조지프가 후계자가 되는 것보다 에드가의 핏줄이 후계자가 되는 것이 낫다.

그 편이 그들의 원하는 바를 들어줄 가능성이 훨씬 컸으니까.

“자자, 다들 속 좁게 굴지 맙시다.”

“하지만…….”

“음, 여기 이 조사에 따르면 루비카 베르너란 여인의 어머니는 라미나 백작 가문의 차녀였다고 하는군. 라미나 백작가가 얼마나 유서 깊은지 자네도 알고 있지? 백작 영애는 절대 딸의 교육을 그냥 두 손 놓고 있지 않았을 것이야.”

에드가는 질레한의 행동이 눈에 거슬렸으나 자신에게 도움이 되었기에 내려버려 두었다. 처음에는 반대했던 자들도 공작가의 체면보다 자신에게 떨어질 콩고물에 좀 더 신경을 쓰는 게 낫다는 판단을 내렸다.

게다가 공작가에 꿀릴 것 없는 가문 출신의 여인보다 한미한 가문 출신이 공작 부인이 되면 공작가가 얽혀 있는 여러 사업에서 자신들이 이득이 되는 쪽으로 일을 끌고 갈 수 있을 듯했다.

“신분 차가 걱정되기는 하나 베르너 영애도 어쨌든 준남작가의 여식이니 귀족임은 분명하지.”

“각하께서 그리 결혼하고 싶을 정도로 사랑한다면야…….”

“공작이기에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조차 할 수 없다면 이 무슨 비극이오.”

“각하의 사랑을 응원합시다.”

어느새 에드가는 루비카 베르너를 가슴 절절히 사랑하는 세기의 로맨티스트가 되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공작이 자신을 쳐다도 보지 못할 신분의 여자와 결혼하는 이유로 ‘사랑’외에 다른 건 생각하지 못했다. 에드가는 그런 친척들을 싸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꽤 좋은 변명거리군.’

이 비합리적인 일에 ‘사랑’이란 단서가 붙자 모두 있을 만한 일이 되었다. 후일, 국왕 전하께 특별허가증을 받으러 갈 때도 에드가는 그들의 오해를 차용하기로 했다.

“사랑해서 그러오.”

그 말 한마디면 모두 긴가민가하면서도 속아 넘어가 줬다. 딱 한 사람, 결혼의 당사자인 루비카만 빼고.

어차피 에드가는 누구에게도 진실을 말할 생각이 없었다. 진실을 말하려면 3년 전 공작부부의 죽음에 얽힌 치부를 밝혀야 했다. 그리고 그 자신이 ‘님프’의 저주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려야 했다.

님프는 머나먼 대양의 건너 그들만의 섬에 사는 영생의 존재이다. 님프는 아주 가끔 대륙에 등장해 그들이 속한 신의 가르침을 알려 주었다.

불의 님프는 철을 다루는 법을, 사랑의 님프는 결혼이란 의식을, 물의 님프는 식수의 정화방법을 알려 주었으며 각자 신의 성서를 전해 인간을 마물과 같은 상태에서 벗어나게 했다. 세리토스 왕국을 비롯한 대륙의 모든 왕국은 님프를 신성하게 여겼다.

그런데 자신이 님프의 저주를 받았다는 사실을 세상이 알게 된다면?

클레이모어 공작가가 이룬 모든 것이 잿더미가 된다. 단순히 공작가의 몰락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운영하는 영지와 사업, 그에 연관된 연구자와 노동자, 모두의 삶이 망가진다.

에드가는 그런 위험을 안고 싶지 않았다. 자신에게 적이 많다는 사실 또한 충분 인지하고 있었다. 3년간 님프의 저주를 풀 단서를 찾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 그러나 모든 것이 지지부진했다.

그러던 차 죽은 유모가 그를 위해 준 선물에서 ‘루비카 베르너’란 단서가 떠올랐다. 그는 처음에는 루비카 베르너를 공작저의 시녀로 청할까 고민했다. 그러나 자신은 미혼의 남자 귀족이었다. 게다가 현재 공작저에는 시녀의 시중을 받을 만한 사람은 자신 이외에 없었다.

베르너 부부가 만약 돈에 눈이 멀어 루비카를 공작저의 시녀로 보낸다면 그녀는 씻을 수 없는 추문에 휩싸이게 된다. 그래서 그는 아예 추문에 휩싸이지 않고 그녀를 공식적으로 정당하게 자신의 옆에 둘 방법을 선택하기로 했다.

‘결혼’

멀리 사는, 접점 없는 여인을 어떤 추문 없이 곁에 두기 가장 쉬운 방법이었다. 그가 베르너 저택 근방으로 가는 방법이 있었으나 그는 빌어먹을 ‘저주’ 때문에 환한 햇살 아래 그녀와 우연히 마주치는 척 서로 알아가는 방법 따윈 사용할 수 없었다.

에드가는 괜히 진실을 밝혀 위험을 안고 가느니 친족 회의에서 만들어 낸 오해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게 더 손쉬운 일이라 판단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사랑’이란 말을 꺼낸 당사자인 질레한조차 믿지 않았던 에드가의 사랑을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오해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앤이었다.

‘우리 에디가 사랑에 빠지다니!’

시녀장 앤은 너무 감동해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릴 뻔했다. 그 바닥을 겨우 기어 다니던 에디가 벌써 이렇게 커서 부인을 맞이할 나이가 되었다.

하늘에 있는 선대 공작 부인과 유모가 알면 얼마나 기뻐할까. 분명 에디의 아이는 에디처럼 똑똑하고 귀엽겠지.

‘에디가 다시 예전처럼 웃을 수 있을까.’

공작과 공작 부인, 그리고 유모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에드가는 웃음을 잃었다. 그럴 만했다. 한꺼번에 소중한 사람을 셋이나 잃어버렸으니…….

앤은 마치 생각할 시간을 가지지 않으려는 듯 일벌레처럼 변한 에드가를 불안한 마음으로 바라보며 그가 여유를 가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던 차 에드가가 결혼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다. 그것도 상대는 한미하기 이를 데 없는 가문 출신이었다.

이를 설명할 수 있는 건 사랑밖에 없다. 그리고 사랑은 아무리 차가운 남자의 입가에도 미소를 떠오르게 할 수 있었다.

“공작 부인이 될 베르너 영애를 무시하는 행동을 하면 이 집에서 쫓겨날 거야.”

친족회의 이후 시녀장은 굳은 얼굴로 하녀들을 불러 선포했다.

앤은 다정하지만 잘못을 저지른 하녀들을 엄히 다스렸다. 그녀가 그리 하겠다고 결정하면 번복하는 일이 없었다.

클레이모어 공작가는 그 어떤 귀족가보다 봉급이 많았으며 일도 비교적 편했다. 하녀들은 앤의 경고를 마음에 새겼다.

일주일 내내 앤은 마치 자신이 결혼을 앞둔 것처럼 루비카와의 만남을 기대했다. 그리고 마침내 만난 루비카는 앤이 기대한 것 이상이었다.

‘에디가 역시 보는 눈은 있구나.’

앤 정도의 나이에 고위 가문의 시녀장은 수많은 귀족과 하녀, 하인들을 보았기 마련이다.

그들은 상대의 행동 하나, 말투 하나에 그것의 유래가 되는 그 사람의 인품과 인생, 가치를 읽을 수 있었다.

앤은 루비카가 금방 따뜻한 성격에 상대를 먼저 생각하는 인품을 지녔음을 알아봤다. 앤은 끊임없는 수다에 당황하면서도 얼굴에 미소를 잃지 않고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으려 하는 걸 보면 더욱 그랬다.

앤은 루비카가 차디찬 클레이모어 공작가에 따뜻한 햇살을 드리우고 웃음꽃이 피게 만들 것이라 확신했다.

“이 방입니다. 베르너 아가씨, 이쪽에 물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피곤하시면 바로 침대에서 낮잠을 주무셔도 됩니다.”

앤은 대대로 공작 부인이 사용하는 방으로 루비카를 안내했다.

루비카는 여태 지나온 방들과 전혀 다른 여성스러운 방의 모습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 귀여운 모습은 앤을 미소 짓게 했다.

“아름다운 방이네요.”

그 방이 공작 부인의 처소임을 알지 못하는 루비카는 자신에게 너무 넓고 큰 방을 주어서 당황했다.

“네, 앞으로 쭉 사용하게 되실 방이에요.”

“앞으로 계속이요?”

“공작 부인의 방입니다.”

“네? 공작 부인의 방이라고요”

루비카는 모든 것이 얼떨떨했다.

공작저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한미한 가문 출신이라 자신을 업신여기는 일 정도는 있을 것이라 각오했다.

그러나 마차 안에서 자신을 돌본 하녀도 그렇고 시녀장마저도 친절하기 이를 데 없었다.

루비카는 공작 부인의 방에서 지낼 수 없으니 손님방을 달라고 하려 했으나 시녀장 앤은 그럴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그녀는 바로 루비카를 데리고 침실 옆 드레스 룸으로 가 그녀가 당분간 입을 옷과 구두, 모자가 있는 위치를 알려 주었다.

“일주일밖에 시간이 없어서 옷을 많이 준비 못했어요. 여기 이 칸에 있는 건 주무실 때 입는 옷입니다. 이 칸은 실내복, 이 칸은 만찬이나 식사 때 입으실 것, 이 칸은 산책하러 나가실 때 입으실 옷입니다.”

조금밖에 준비하지 못했다는 말은 그냥 예의상 하는 말일까?

그러나 앤은 무척이나 난처하고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 루비카는 농담도 던지지 못했다.

“드레스들은 선선대 공작 부인의 의상을 수선해 만든 것이라 최신 유행 스타일은 없습니다. 침모들에게 치수를 알려 주시면 실내 드레스는 곧바로 몇 벌 만들 수 있을 거예요. 외출복이나 만찬용 드레스는 이 근방의 유명한 재봉사 리스트를 준비해 달라고 칼에게 부탁했어요.”

앤의 말대로 잠옷은 새것이었으나 드레스는 잘 관리되어 오래됐음에도 비단의 광택이 살아 있었다.

‘……이상하네. 지금 입고 있는 옷도 그렇고 옷장에 들어 있는 옷도 모두 선선대 공작 부인의 것을 수선한 거라 했어. 선대 공작 부인의 옷은?’

그러나 루비카는 차마 앤에게 질문할 수 없었다. 선대 공작 부부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고작 3년도 지나지 않은 일이었다. 분명 공작가는 그 상처를 간신히 회복하고 있을 것이다.

“신경 써 주셔서 고마워요.”

루비카의 감사에 앤이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말을 편히 해 주세요. 베르너 아가씨.”

“하지만 시녀장님은 저보다 나이도 많고……. 저는 아직 공작가의 손님이지 부인이 된 게 아니잖아요.”

루비카의 말에 앤은 다시금 미소 지었다.

역시 에드가가 선택한 여자였다. 자신의 위치가 한순간에 높아졌다고 바로 사람을 업신여기지 않는다.

에드가도 루비카의 신분에 상관없이 반려로 그녀를 원했다. 부부는 서로 닮는다더니…….

바야흐로 앤의 오해는 깊어만 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