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9화
* * *
루비카는 하녀의 안내를 받으며 조심스레 마차에서 내렸다. 클레이모어의 영지 저택은 상상 이상으로 컸다. 꼭 왕성 같아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루비카를 더더욱 놀라게 한 건 저택 앞에 죽 늘어선 사용인의 모습이었다. 마구간지기조차 깨끗한 새 옷을 빼입고 머리에 포마드를 바른 채 서 있었다.
“제게 시녀장님을 소개할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어안이 벙벙해진 루비카가 온화한 표정으로 자신에게 말을 건 집사 칼을 바라봤다. 루비카는 문득 이상을 깨달았다. 공작의 마차가 보이지 않았다.
“각하는요?”
“공작 각하는 오늘 저녁 국왕 폐하와 회의가 있어 왕성으로 가셨습니다. 내일 일몰 전까지는 돌아오실 겁니다.”
칼의 얼굴에 미안함이 어렸다. 그럴 만했다. 보통 여인이라면 앞으로 결혼하여 살게 될 저택에 남편 없이 홀로 도착하게 된 일에 대해서 불만을 품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루비카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에드가는 비록 잘생기긴 했으나 입만 열면 정이 떨어질 정도로 신랄하기 짝이 없었다. 사용인들 앞에서 혹여 망신당할까 뻣뻣이 긴장할 필요가 없어졌다. 루비카는 온화하게 웃었다.
“각하께서 직접 제게 많이 바쁘다고 설명해 주셨어요. 괜찮답니다.”
그 설명이 친절이 아니라 루비카를 겁박하기 위한 것이긴 했으나, 그는 직접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바쁠 것이라 했다. 에드가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것은 조금 아쉬웠다.
찬란한 태양 아래 밤하늘 같은 머릿결이 어떤 식으로 빛날까. 루비카의 호기심이 다시금 꿈틀거렸다.
‘앞으로 볼 일 많겠지, 뭐.’
하지만 이왕이면 얄미운 입이 만들어 내는 소리를 듣지 않도록 멀리서 구경하고 싶었다.
“시녀장 앤입니다.”
루비카는 자신의 앞으로 와 인자하게 미소 짓는 중년의 여성을 보았다. 적당히 살이 오른 앤는 말끔한 하녀복을 입고 밤색 머리를 단정히 빗어 넘겨 묶었다. 회색 눈동자 안에는 루비카에 대한 호기심과 호의가 있었다.
“앤, 이쪽은 공작 각하의 약혼녀인 루비카 베르너 님입니다.”
“반갑습니다, 베르너 아가씨.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앤은 자신이 골라서 보낸 옷을 입고 나온 루비카의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무엇이 자신에게 어울리는지 제대로 알고 있는 아가씨였다. 드레스에 딱 맞춘 듯한 머리는 대체 누가 낸 아이디어인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루비카는 앤에게 상냥히 답변했다.
“만나서 반가워요.”
앤의 손이 곰실곰실 움직였다. 그녀는 당장 루비카의 손을 잡고 싶었으나 아랫사람이 먼저 그런 행동을 하는 건 실례이다. 노인의 기억이 있는 루비카는 앤의 마음을 바로 읽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앞으로 잘 부탁해요. 저를 많이 도와주셔야 해요.”
앤의 얼굴에 기쁜 미소가 번져 나갔다. 그녀는 연신 황송하다는 말을 주절거렸다. 루비카는 그녀가 좋은 사람처럼 보여 일단 한숨 놓았다. 앤은 루비카가 마음껏 공작가의 예산을 쓰고 사치를 하기 위해 반드시 포섭해야 할 사람 중 하나였다.
만약 시녀장이 협조하지 않는다면 루비카로서는 좋은 물건을 살 도리가 없다.
“아, 이쪽은 침모방을 책임지는 로사입니다. 저 친구들은 아침 시중을 들 아이들이고요.”
조잘조잘 앤이 사용인들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을 기세를 보이자 칼이 헛기침을 했다.
“내 정신 좀 봐! 각하께서 정식 소개는 결혼식 후에 하라고 하셨죠.”
루비카는 함께한 지 채 5분도 되지 않아 시녀장 앤이 수다쟁이란 사실을 눈치챘다.
“글쎄, 제가 지금 너무 기뻐서 제정신이 아니랍니다. 에디가 아가씨처럼 좋은 분을 데려오다니…….”
“앤!”
칼이 에드가의 아명을 부른 앤의 행동을 지적했다.
“어머, 어머, 베르너 아가씨, 죄송합니다.”
“아, 괜찮아요.”
루비카는 앤이 왜 자신에게 사과하는지 영문도 모른 채 일단 사과를 받아들였다.
“정말 친절하시네요.”
루비카는 당혹스러운 와중에도 입가가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정말 이상했다. 그런 차갑기 그지없는 공작 아래에 이처럼 따뜻한 사용인이 있을 수 있나? 오히려 공작이 매몰차기 때문에 사용인들이 서로를 위로하며 따뜻한 성품을 가지게 된 걸까?
“모두, 주목하세요.”
앤이 숨을 크게 들이마시더니 내뱉으며 말했다. 저택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큰 목소리가 나왔다.
“오늘 오신 루비카 베르너 아가씨는 클레이모어 공작 부인이 되실 분입니다. 알다시피 안살림의 주인이 바로 공작 부인입니다. 모든 일에 베르너 아가씨를 최우선으로 두세요.”
루비카는 처음 듣는 말이었으나 지난 일주일 내내 사용인들은 귀에 딱지가 앉게 들은 말이었다. 앤의 말이 끝나자 하녀와 하인들이 일제히 루비카에게 인사를 했다. 미리 연습한 듯 딱 떨어지는 움직임이었다. 루비카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인사하는 광경에 압도당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베르너 아가씨.”
“……잘 부탁드려요.”
루비카는 얼떨떨한 와중에 대답했다. 시녀장이 주의 준 것과 별개로 새로 올 공작 부인이 준남작가 집안 출신이란 말에 사용인들은 내심 깔 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분명 촌스러운 여자겠지.’
머리에서 발끝까지 힘주어 꾸민 것에 그런 이유도 있었다. 항구 도시 출신이라 해도 고작 준남작이 아닌가. 하인과 하녀들은 그녀보다 클레이모어 공작가의 사용인인 자신들이 더 세련되었다 여겼다.
선선대 공작 부인의 드레스를 수선한 옷을 챙겼다는 말에 얼마나 촌스러운 모습으로 등장할지, 마차가 도착하기 전 이미 자기들끼리 비웃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마차에서 루비카가 나타났을 때 사용인들을 할 말을 잃고 그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주황빛이 살짝 감도는 노란 드레스는 루비카의 피부와 잘 맞아 햇살 아래에서 마치 황금빛 드레스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드레스는 비록 구식 실루엣이었으나 거기에 최근에 유행하는 자수와 브로치, 목걸이, 장갑 등이 더해지자 전혀 색다른 느낌을 자아냈다.
거기에 말아 내리지도 올리지도 않고 독특하게 땋아 내린 머리 스타일이 전체적인 균형을 잡아 주었다.
‘세련됐다.’
‘처음 보는 스타일이야.’
설마 모르는 사이에 수도에 저런 스타일이 유행하기 시작한 걸까?
그들은 어느새 자존심도 잊고 루비카의 모습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그중 나이 많은 자들은 아주 오래전 이 저택을 지켰던 선선대 공작 부인의 모습을 떠올리고 아련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럼, 아가씨. 밤새 마차를 타시느라 피곤하셨을 테니 방으로 안내하겠습니다. 거기에서 쉬시면 됩니다.”
이제 거리낄 것이 없어진 앤이 먼저 부축했다 그리고 저택을 향해 걸었다. 앤과 루비카가 현관 앞에 서자 기다렸다는 듯이 도어맨이 문을 열었고 하인들은 제자리를 찾아 각자 움직였다.
“머리 모양이 정말 이쁘시네요. 어쩜 이렇게 땋을 생각을 하신 거죠? 나중에 저한테도 방법을 알려 주셔야 해요.”
루비카는 정신없이 종알거리는 앤의 말을 한 귀로 흘려 들으며 클레이모어 저택 안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압도적인 부였다. 전체적으로는 차분한 색을 써 화려함을 지양하는 듯하지만 역시 알아볼 사람만 알아볼 수 있는 디테일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루비카는 통일성을 가지면서도 문마다 문고리가 각각 다르고 아기 님프 모양의 벽 부조가 모두 다른 자세를 잡고 있는 것에 혀를 내둘렀다.
이 집을 이렇게 꾸민 사람은 누구일까?
누군지 몰라도 대단한 심미안의 소유자이다. 클레이모어 공작? 집사 칼? 시녀장 앤? 그러나 루비카는 셋이 입은 옷을 보았을 때 이런 취향을 가졌으리라고 짐작하기 어려웠다.
‘커튼은 견직물인 것 같은데……. 관리하기 어려울 텐데 주름이 없어.’
가는 내내 시녀장 앤은 저택의 구석구석을 설명했다.
“저긴 침모들의 작업실입니다. 아가씨께서 입으실 옷을 만들거나 수를 넣지요. 모두 침모 일을 한 지 20여 년 이상 된 분들이지요.”
“20여 년이요? 모두 몇 명인가요?”
루비카는 당장 작업실에 뛰어 들어가고 싶은 기분을 참고 질문했다.
“현재는 5명 정도입니다. 이제 아가씨가 오셨으니 4명 정도 더 고용할 생각입니다.”
바느질에 능숙한 침모는 무척 구하기 힘들다. 경력이 오래된 자들은 시녀장보다 더한 월급을 받기도 한다. 루비카는 그런 침모를 5명이나 데리고 있는데도 4명 더 구하겠다고 말하는 시녀장의 말에 기쁨보다 남다른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돈을 펑펑 다 쓴다고 해도 과연 파산할 수 있을까?’
평생 검소하게 살았던 루비카였다. 자신감이 슬슬 사라지기 시작했다.
‘아냐! 아무리 그래도 클레이모어 공작가도 세리토스 왕국의 미덕에 따랐을 거야. 봐, 바닥의 양탄자도 고급이긴 하지만 무늬나 이런 건 최대한 절제했잖아? 사치를 하겠다고 마음먹으면 분명 더 할 곳이 있을 거야.’
그런 루비카의 속을 앤은 알지 못했다. 앤은 주변을 연신 두리번거리며 눈을 동그랗게 뜨는 시골 소녀 같은 루비카의 모습에 기쁨이 차올랐다.
‘에디는 이런 따뜻하고 순진한 분을 만나야 해.’
에드가는 역사상 그 어떤 공작보다 똑똑하며 비정했다. 세상에는 그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시녀장 앤은 에드가의 부모인 전 공작 내외가 살아 있을 때의 그를 기억한다. 지나치게 똑똑하고 좀 냉정한 구석은 있긴 했으나 그래도 밝은 청년이었다. 부모의 죽음 이후로 그는 웃음을 잃고 한없이 차갑고 냉정한 사내가 되었다.
* * *
일주일 전, 갑작스레 웬 준남작가 여식에게 에드가가 청혼을 하겠다 선언했을 때 공작저는 그야말로 발칵 뒤집혔었다.
루비카 베르너.
들어 본 적도 없는 이름이었다. 수도 사교계에 나올 형편도 안 되는 여인, 거기에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어도 남을 나이였다. 거듭된 반대와 논란 속에서 결국 클레이모어 공작가는 친족 회의를 열어야만 했다. 사별한 전 남편의 성이 테일러로 클레이모어 공작가의 가족 중 한사람이었기에 시녀장 앤 또한 그 자리에 참석했다.
보통 일이 아니었기에 공작저의 조반니 홀은 정오 무렵 이미 사람으로 꽉 찼다. 하지만 정작 이 회의의 주인공인 에드가는 등장하지 않았다.
“각하는 어디 계시나?”
“왕성에서 오시는 중이라고 합니다.”
“언제까지 우릴 기다리게 할 셈인 건가?”
원성이 드높아졌다. 공작저의 사용인과 앤은 그들을 달래기 위해 쩔쩔맸다.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릴 때쯤에야 등장한 에드가는 클레이모어의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친척들의 거친 항의와 반대를 실컷 음미했다.
한바탕의 소동이 끝나고 에드가는 그저 낮게 한마디만 했다.
“그녀가 아니면 결혼하지 않을 거요.”
앤은 그 순간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몇몇의 모습을 보았다. 에드가가 후계 없이 죽으면 자신이 공작가를 이을 수 있으리라 믿는 어리석은 이들.
앤은 에드가가 가여워서 견딜 수 없었다. 에드가는 너무 어린 나이에 공작가라는 큰 짐을 어깨에 지고 있었다. 옆에서 그런 그를 도와주고 끌어 줄 부모조차 없었다. 그 주변의 친척 어른들이란 서로 이득만을 따지지, 결코 힘이 될 자들이 아니었다.
“결혼을 끝까지 반대하면 평생 미혼으로 살 예정이오. 그리고 공작가의 후계자는 조지프로 지정하겠소.”
장내에 고요가 찾아왔다. 앤도 깜짝 놀라 들고 있던 손수건을 떨어뜨릴 뻔했다.
“각하! 그는 공작가의 핏줄이 아닙니다.”
“젊은 나이에 노망이라도 든 것이오?”
소란스런 친척들의 항의를 에드가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