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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17화 (17/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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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7화

* * *

“향이 마음에 들지 않으신가요?”

“아…….”

루비카가 비누 거품을 내다 말고 멍하니 세숫물을 바라보고 있자 하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니야, 무척 좋아.”

자신이 잠깐 넋을 놓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루비카가 생긋 웃자 하녀가 가슴을 쓸었다.

“다행이네요. 혹시나 둘 다 싫어하실까 봐 얼마나 걱정했는지……. 참, 제 이름은 제니예요.”

제니의 손은 다른 하녀들과 달리 두껍지도 거칠지도 않았다. 험한 일보다는 접객이나 몸치장 등을 돕는 전문하녀 같았다. 루비카가 손을 씻고 세수를 할 사이 제니는 고급스러운 통을 여덟 개 정도 들고 왔다.

“이건?”

“크림이에요. 그게 또…… 아가씨께서 평소 쓰는 걸 모르니 시녀장님께서 일단 있는 걸 다 가지고 가라고 하셔서…….”

제니는 루비카에게 평소에 쓰는 걸 알려 달라고 부탁했다. 물론 루비카도 어린 시절에는 그와 비슷한 크림을 발랐다. 문제는 그게 현재 루비카로서는 기억이 안 날 정도로 까마득한 과거라는 거다.

게다가 제니가 꺼낸 건 다 최고급 공방에서 만든 것이었다. 베르너 부부조차 안젤라에게 그런 크림을 쓰게 해 준 적이 없었다.

“혹시 이 중에 쓰시던 게 없나요?”

루비카가 말없이 크림을 보고 있자 제니가 불안한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럴 때 처음 보는 크림을 마치 써 본 적 있는 척하며 자존심을 지킨다.

그러나 루비카는 자존심보다 호기심이 더 먼저였다. 이름만 들어 봤던 유명한 공방의 크림들이 어떤 질감에 향을 가지고 있는지 다 느껴 보고 싶었다.

“다 발라 봐도 될까?”

“네?”

“여기 있는 거 다 써 본 적이 없어서…… 그냥 다 발라 봐도 괜찮을까?”

루비카의 말에 당황한 건 제니였다. 제니는 루비카 베르너가 준남작가의 여식이란 말까지 들었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몰랐다. 그런 제니의 눈에 루비카의 손이 들어왔다. 자신의 손보다 거칠어 보이는 손은 그간의 삶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럼 일단 하나씩 다 발라 드릴까요?”

“응, 고마워.”

얼떨떨한 상태에서 제니는 일단 가까운 통을 열어 루비카의 손에 발라 주었다. 따뜻한 편인 루비카의 손은 거침없이 크림을 흡수했다.

“이건 향이……?”

“아르간이랑 장미에서 나는 향료를 첨가했다고 알고 있어요.”

“아르간? 아, 아르가니아 나무 열매를 말하는 거야?”

“네, 정확히는 열매의 씨지요.”

아르가니아 나무는 남쪽의 아주 따뜻한 지방 일부에서만 자라는 무척 구하기 힘든 재료였다. 루비카는 점점 더 큰 호기심에 빠졌다.

“그냥 향만 나는 거야? 아니면 무슨 효과가 있는 거야?”

제니는 말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향기보다는 피부에 더 좋은 재료예요. 오래 바르면 피부가 촉촉해져요. 저는 가끔 아르간 오일을 머리끝에 살짝 바르기도 해요.

“아르간 오일을 바른다고?”

“네, 아주 쪼오금.”

제니가 눈치를 슬쩍 보았다. 일을 하다 가끔 남은 재료로 가끔 자신의 머리나 손에 바르는 데 썼다. 루비카가 그걸 눈치채고 싫어할까 걱정스러웠다.

“아, 그래서 네 머릿결이 좋은 편이구나.”

그러나 앞으로 공작 부인이 될 주인이 영 엉뚱한 소리를 했다.

“하지만 자주 쓰기에 이건 너무 비싸지 않아?”

“……평소에는 올리브유를 발라요. 비슷한 효과가 있거든요.”

“아르간이랑 올리브랑 뭐가 더 좋은 것 같아?”

이런 질문까지 했던 사람은 처음이었다. 제니는 처음에는 조용한 목소리로 설명을 시작했다.

“그건 사람 피부마다 다르지요. 하지만 제가 제일 좋아하는 건 바오밥 크림이에요. 비싸기는 아르간이 더 비싸지만 바오밥에 수분이 훨씬 더 많아서 좋아요.”

하지만 바오밥 크림 항목에 들어서자 그녀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키지도 않았는데 통을 꺼내 루비카의 손에 발라 주기 시작했다.

“보세요. 흡수감이나 촉촉한 게 전혀 다르죠? 비싸다고 꼭 더 좋은 건 아니라니까요.”

그리고 루비카의 손을 독특한 방식으로 주무르기 시작했다. 루비카는 제니의 그 손동작은 눈에 담고 외우려 애썼다.

“이렇게 하면 흡수가 잘 돼요.”

“……정말이네.”

바오밥 크림을 바른 손은 눈에 띄게 보드라워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향기도 산뜻하니 무겁지 않았다.

“얼굴에는 바르는 걸 이걸로 할까?”

자신이 추천한 크림을 루비카가 맘에 들어 하자 제니는 정말 본격적으로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네, 아가씨 피부에도 잘 맞는 것 같아요.”

그렇게 두 사람은 각종 화장품의 원료와 효과, 가격에 대해서 수다를 떨었다. 제니는 루비카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크림을 흡수시켰다. 제니의 말대로 바오밥 크림은 루비카의 피부와 잘 맞았다. 루비카는 거울을 보고 한 톤 밝아진 피부와 좋아진 결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정말 대단하구나.”

“그 정도는 아니에요.”

“아냐, 정말 대단한 솜씨야. 어떻게 처음 본 사람의 피부에 딱 맞는 크림을 한순간에 찾아낼 수 있는 거지? 어쩜……정말 실력이 좋구나!”

칭찬은 사람을 즐겁게 한다. 제니는 콧노래를 부를 때처럼 어깨가 우쭐거리고 손이 간지러웠다.

‘뭔가 이대로 끝내기는 아쉬워.’

오랫동안 제대로 크림을 발라 보지 못한 피부여서 그런가. 단 한 번의 손길로 변모한 루비카의 피부는 제니 안의 어떤 욕망을 건드렸다.

더 꾸며 주고 싶다.

더 아름답게 만들어 주고 싶다.

“저기, 아가씨.”

“응?”

“내친김에 마사지를 받아 보시는 건 어때요?”

“……마사지? 아, 지금 피곤하지 않은데?”

“아뇨, 피곤을 푸는 마사지 말고요. 크림을 온몸에 발라서 피부를 좋게 하는 거요.”

마침 공작저로 가는 동안 무엇을 할까 고민스러웠다. 긴 시간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견딜 자신이 없던 루비카는 스스럼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크림을 온몸에 바르다니. 이건 또 상상도 못한 사치다. 루비카는 벌써부터 기분이 좋아졌다.

“욕조가 없어서 목욕은 못하지만 젖은 수건으로 몸을 닦은 다음에 티트리 계열로 하면 항균효과도 있으니 괜찮을 거예요.”

제니는 퍽 즐거워졌다. 목욕 시중을 드는 건 원래 무척 힘들고 까다로운 일이었다. 사실 클레이모어 공작가를 직장으로 선택한 건 다른 가문보다 월등히 높은 월급 때문이기도 했지만 현재 안주인이 없다는 것도 한몫했다. 그녀는 일을 하면서 한 번도 기뻤던 적이 없다. 언제나 눈치를 보았다. 여태 거쳐 온 마님들은 제니가 화장품을 추천하면,

“그런 싸구려 따위를 내 피부에 바르라고? 됐어. 카나리아 공방에서 나온 최고급 크림이나 발라.”

하녀 주제에 아는 척하지 말라는 반응을 하기 일쑤였다. 그리고 피부가 안 좋아지면 제니 탓을 했다.

제니는 억울했다. 적어도 화장품에 대해서만큼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안다고 자신했다. 그러나 어디에도 제니의 그런 지식을 인정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화장품에 대해 잘 아는 게 뭐 뛰어난 재능이냐고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나 루비카는 달랐다. 제니의 솜씨를 칭찬하고 제니의 말을 경청했으며 그녀의 지식을 칭찬했다.

‘이게 이렇게 즐거운 일이었나?’

크림을 피부에 잘 흡수되도록 발라 주는 건 생각보다 노동이었다. 큰 힘은 필요하지 않지만 적당히 손가락에 힘을 주고 풀어 주며 손목을 수시로 움직여 줘야 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루비카를 마사지하는 동안은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기분 좋다.”

온몸이 노곤노곤해질 정도로 크림을 바른 루비카는 깜빡 잠이 들 뻔했다. 그저 잠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던 건 귀에 들린 소리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여태 식사를 못하셨네요.”

부끄러움에 루비카의 얼굴이 빨개졌다.

“아, 응. 괜찮아. 다들 먹을 때 먹으면 돼.”

“하지만 배가 많이 고프신 것 같은데.”

“아냐, 나 때문에 마차가 서면 민폐고…….”

루비카의 말에 하녀가 잠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곧 고개를 잠시 끄덕이고 그녀가 루비카에게 설명했다.

“일반 마차는 흔들리기 때문에 안에서 음식을 먹는 게 불가능하지만 마석마차는 다릅니다. 공작 각하께서도 마차 안에서 간단히 준비된 식사를 드셨을 거예요. 각하는 일하는 중에 누군가가 들어오는 걸 무척 싫어하셔서요.”

혹 공작이 루비카와 함께 있는 걸 싫어하는 것으로 오해할까 걱정되어 하녀가 한마디 덧붙였다. 루비카는 그가 자신을 불러 주지 않는 게 더 반가웠다.

“응, 괜히 같이 먹으려 마차를 세우고 시간을 낭비하느니 그편이 더 낫지.”

“그럼 간단히 요기할 만한 거로 준비할게요.”

루비카가 고개를 끄덕이자 하녀가 곧 세숫물을 치우더니 작은 탁자 위에 음식을 차렸다. 보드랍고 하얀 빵과 남방의 과일, 우유, 신선한 주스. 역시 검소한 척하는 그릇 위에 올라와 있었다.

루비카가 음식을 적당히 먹는 동안 제니는 옆방에 가더니 예쁜 드레스를 열 벌 정도 가지고 왔다. 루비카는 밥을 먹다 말고 깜짝 놀랐다. 입을 옷까지 따로 준비해 두었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하긴 원래 입는 옷으로는 고귀하신 공작 각하의 수준을 맞춰 드리기 힘들지.’

루비카는 쓰게 웃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에드가의 의도를 자꾸 나쁜 쪽으로만 해석하려는 자신이 우스웠다.

“급히 준비하느라, 선선대 공작 부인께서 남기신 옷을 수선한 드레스 밖에 가져올 수 없었습니다. 유행에 뒤떨어지죠? 시녀장님께서 죄송하다고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루비카는 하녀의 말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게, 이렇게 화려하고 예쁜 옷이 유행에 뒤떨어진다고?

아, 하지만 루비카는 평생 사교계 근처에는 가 보지도 못했고 드레스를 입은 귀족은 먼발치에서 구경만 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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