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6화
클레이모어 공작의 발명품과 이를 바탕으로 생산되는 모든 군수물자는 세리토스 왕국의 근간이었다. 공작가의 부가 바로 세리토스의 부였다. 공작가에서 사적으로 쓰는 재산 외 공적 재산 대부분을 국영은행에 맡겼다. 그리고 전쟁으로 루비카가 살고 있는 세리토스 왕국은 망했고 국영은행에서 보관하고 있던 돈은 휴지조각이 되고 만다.
어차피 사라질 돈, 어차피 사라질 부.
루비카는 양심의 가책을 하나도 느낄 필요 없이 신나게 클레이모어 공작가의 돈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뭘 할까?’
루비카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루비카는 철이 들 무렵부터 항상 아끼며 살아왔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일흔 살에 죽을 때까지 쭉 돈 걱정 없이 산 기억이 없었다. 항상 먹는 것을 절제하고 간신히 몸을 가릴 옷만 입고 지냈다. 그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찾으려 노력한 루비카였으나 역시 사막을 건너온 비단을 한 번쯤 걸치고 싶었고 밤하늘의 별을 따다 만든 듯 영롱한 보석을 한 번쯤 목에 걸어 보고 싶었다.
‘실컷 사치나 하자.’
누군가 공작 부인답지 못하게 사치스럽고 무절제하다 욕하겠지. 특히 세리토스 왕국은 사치를 죄악으로 여겼다. 귀족이 사치품을 앞다투어 수입하면 국민이 먹을 농작물을 살 돈이 부족해진다.
하지만 이번 생에 루비카는 주변에서 욕하거나 말거나 비싼 것을 잔뜩 사고 입고 즐기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다 사라질 부였다. 그녀가 좀 쓴다 해서 뭐가 문제이랴. 그런다고 뭐 누구 죽는 사람 있는 것도 아니고.
‘욕 먹어 봤자 4년인걸.’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한결 편해진 루비카는 그만 까무룩 잠이 들었다.
* * *
마지막으로 푹신한 침대에서 잤던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루비카는 정말 오래간만에 푹 잤다. 너무 푹 잠드는 바람에 하녀는 그녀를 깨우지도 않았다. 창문의 햇볕이 따가울 정도로 밝아졌을 때야 루비카는 겨우 눈을 반쯤 떴다.
“루비카 님, 깨셨나요?”
“지금 몇……시?”
“정오입니다.”
하녀의 말에 루비카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런! 안젤라의 머리 준비를 도와야 하는데!”
“네?”
“늦게 가면 큰일…….”
루비카의 눈 한가득 마차 안의 전경과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보고 있는 하녀가 들어왔다. 그제야 루비카는 현실을 깨달았다.
“아, 미안해요. 잠시 착각했어요.”
“괜찮습니다, 루비카 님. 하지만 저어, 말을 편하게 해 주세요.”
하녀의 곤란한 표정에 루비카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금방 또 “미안해요.”라는 말이 튀어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다행히 하녀는 그런 루비카를 이해하는 듯 싱긋 웃었다. 그리고 루비카가 침대에서 일어나기가 무섭게 쟁반에 적당히 미지근한 세숫물을 가지고 나타났다.
침대 바로 앞에 씻기 좋게 대령한 세숫물은 하얀 자기에 담겨 있었고 그 옆에는 질 좋은 수건과 두 종류의 비누가 있었다.
“무슨 향을 좋아하시는지 몰라서 두 종류로 준비했습니다. 장미와 올리브에요.”
천연소다와 오일을 사용한 최고급 비누였다. 루비카는 대야에 손을 살짝 담가 물에 적신 다음 향이 진하지 않는 올리브 비누를 손에 올려 보글보글 거품을 냈다.
비누를 보자 아르망이 또 생각났다.
* * *
더러움을 씻어 내어 병을 막는 비누는 상류층이나 쓸 수 있는 물건이었다. 환자가 많은 수도원에서는 더러운 붕대도 어쩔 수 없이 재사용할 일이 많았다.
“깨끗한 붕대가 있으면 좋을 텐데…….”
루비카는 가끔 환자의 몸에 더러운 붕대를 감아 주며 한숨을 쉬었다. 상처에 약을 잔뜩 발라 두었지만 더러운 붕대 때문에 소용이 있을지 의문이었다. 하지만 그대로 두면 주변의 벌레가 꼬여 더 큰 일이었다. 그나마도 붕대는 항상 부족했다.
“잿물로는 아무리 붕대를 빨아도 깨끗해지지 않아.”
“비누를 쓰면 되지 않나요?”
환자의 상태에 대해 전해 듣고 루비카의 옆에서 약을 골라 주며 아르망이 반문했다. 아르망이 수도원에서 일한 지 채 일 년도 안 되었던 때였다. 루비카는 그의 천진한 소리에 웃음을 터트렸다.
“아르망, 역시 당신 귀족이었죠?”
“왜 얘기가 그렇게 됩니까?”
“……비누는 엄청 비싸요. 그런 건 귀족이나 쓰는 거예요.”
“그렇……습니까?”
“와, 세상 물정 모르는 것 좀 봐. 역시 아르망 당신은 나 같은 건 말도 못 붙일 정도로 대귀족이었던 게 틀림없어.”
“아, 아닙니다. 루비카. 그저 저는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잘 몰라서…….”
“농담이에요, 아르망.”
루비카는 귀까지 새빨개진 아르망을 보고 미소 지었다. 그 당시 그녀는 아르망을 놀리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다.
“아, 하늘에서 비누가 잔뜩 떨어졌으면 좋겠다.”
“보통 돈이 떨어지길 바라지 않습니까?”
“돈이 비누를 많이 만들어 주진 못하잖아요. 사고 싶어도 물건이 없는 일이 많잖아요.”
환자의 몸에 붕대를 다 감은 뒤 루비카는 마무리로 예쁘게 매듭을 지었다. 그녀가 다음 환자에게 가기 위해 몸을 일으키자 기척을 느낀 아르망도 재빨리 일어섰다. 그는 마치 눈이 보이는 사람처럼 눈치가 빨랐다. 루비카는 아르망이 눈이 안 보이는 척하는 게 아닐까 종종 생각했다.
“참 이상해요, 아르망. 내 조국 말이에요. 하늘도 날 수 있는 걸 만들었으면서 왜 싸구려 비누 하나 제대로 발명해 내지 않은 걸까요?”
“……싸구려 비누요?”
아르망이 길을 잃지 않고 잘 따라올 수 있도록 루비카가 그의 손을 잡았다. 건조했으나 가슴까지 따뜻해지는 손이었다.
“네, 세상에 비싼 게 있으면 싼 것도 있기 마련이잖아요. 고급스러운 향이 날 필요도 없으니 붕대를 깨끗하게 씻어 줄 싼 비누가 있으면 좋겠어요.”
“……싼 비누.”
아르망이 루비카가 한 말을 반복하듯 중얼거렸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그가 보이지 않았다. 처음 루비카는 그가 수사의 심부름 때문에 잠시 수도원을 떠났으려니 했다.
“저, 수사님 아르망은 어디에 갔나요?”
삼 일째 되는 날 루비카는 결국 용기를 내어 평소 아르망과 친하던 수사에게 질문했다. 눈이 보이지 않는 그가 제대로 밥이나 먹는지 걱정스러웠다.
“잠시 연구할 것이 있다며 레페나 님의 자료실에 있습니다.”
“레페……나 님이요? 그분이 순순히 자료실을 내주셨어요?”
“네. 심지어 실험실을 쓰셔도 된다고 했답니다.”
루비카는 수사의 말에 입이 떡 벌어졌다. 레페나는 수도원장의 오른팔이 되는 사제로 괴팍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종종 루비카가 일하는 걸 보며 붕대를 감는 법이 잘못되었다는 둥 여기서 그런 약초를 쓰면 안 된다는 둥 깐깐하게 굴어 골치였다. 그녀는 자신이 모은 희귀한 책과 약초가 있는 자료실에 누가 들어오는 걸 극도로 싫어했다. 멍청한 사람이 자료실의 질서를 해칠 수 있다나. 그런데 자료실에서 더 나아가 실험실까지 내주었다니.
“저어, 식사는…….”
“걱정 마십시오. 자매님. 식사는 레페나 님이 챙겨 주고 계십니다.”
이어지는 수사의 말에 루비카는 더욱 입이 벌어졌다. 그 괴팍한 사제가 손수 쟁반에 음식을 나르는 모습을 상상하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수사님,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매님께서 걱정하고 계시다고 말씀드리지요.”
“아니에요!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괜히 저 때문에 집중이 흐트러지면 안 되잖아요.”
루비카의 말에 수사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루비카는 그 미소가 좋았다. 주위 사람에게 아낌없이 미소를 베풀어라. 휴 신의 가르침에 따라 수도원의 수사들은 미소에 후했다. 수도원에 오기 전 루비카는 그런 미소를 받아 보지 못했다.
루비카는 적어도 일주일 뒤에는 아르망을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러나 이 주일이 되고 한 달이 되어도 아르망을 볼 수 없었다.
‘식사는 잘 하고 있으려나?’
다른 사람도 아니라 식사를 레페나 님이 직접 챙기고 있다니 더 걱정이었다. 그녀는 멀건 죽만 매일 주며 자기 할 일을 다 했다고 여길 사람이었다. 영양실조로 아르망이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게 되는 게 아닐지 노심초사했다.
‘대체 뭘 하고 있길래 실험실에서 안 나오는 거지?’
어느새 루비카는 매일매일 아르망을 생각하게 되었다. 걱정에 기다림과 두려움 그리고 한숨이 섞이기 시작했다. 말도 하지 않고 떠난 것에 야속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루비카는 울적한 기분을 떨쳐내기 위해 더욱 열심히 일했다. 수사들마저 내심 꺼리는 전염병 환자도 기꺼이 돌봤다. 수도원의 궂은일이란 일은 다 했다. 슬슬 아르망이 아닌 자신을 걱정해야 할 때쯤이었다.
“루비카! 루비카!”
그날도 루비카는 한가득 더러운 붕대를 안고 빨래터로 가는 중이었다. 멀리서 애써 떨쳐 버리려 했으나 내내 생각했던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르……망.”
자신을 찾는 간절한 목소리에 은연중에 쌓고 있었던 원망이 한꺼번에 날아갔다. 아주 작은 목소리로 불렀을 뿐인데 아르망은 그 소리를 들었는지 멀리서 그녀를 향해 달려왔다. 오는 도중 사람과 몇 번 부딪치기도 했으나 루비카는 짐이 너무 많아 그에게 가지 못했다.
“조심해요! 뭐가 그리 급해요.”
루비카는 제 앞에서 헉헉 숨을 내쉬는 아르망에게 한 차례 잔소리했다. 실험실에서 갓 뛰어나왔는지 바지와 셔츠가 얼룩덜룩했다. 루비카에게 혼나면서도 아르망은 싱글벙글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 웃음에 사라졌던 원망이 울컥하고 솟아올랐다.
지난 두 달 동안 얼마나 걱정했는데…….
“루비카, 이걸 받아요.”
원망의 말을 내뱉기 전에 아르망이 재빨리 무언가를 루비카의 손에 다정히 올렸다. 루비카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뛰었다. 이제와 루비카는 생각했다. 그때 아르망이 자신에게 반지라도 선물해 주길 바란 게 아니었을까. 하지만 당시 루비카의 손에 올라온 것은 동그란 잿빛의 물건이었다.
“이게 뭐예요?”
애써 실망을 감추고 루비카가 친절하게 물었다.
“비누예요.”
“……비누요?”
루비카가 알고 있는 비누는 대부분 뽀얀 색깔을 가진 아름다운 것이었다. 그런데 손 위에 있는 것은 색은 고사하고 모양도 엉망이었다.
“싸구려 비누입니다.”
“……싸구려?”
실망스러운 마음이 점점 환희로 바뀌었다.
“저도 당신의 이야기를 들으니 싸구려 비누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럼 설마, 지난 두 달 동안?”
“네, 화학은 잘 몰라 공부하느라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레페나 님이 책을 읽어 주지 않았으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이건 처음 만든 거라…… 거품이 잘 날지 모르겠군요.”
아르망의 얼굴에서 웃음이 점점 사라졌다. 그가 자신감 없는 얼굴로 초조하게 말했다. 성공하자마자 실험해 볼 생각도 못하고 그녀를 찾은 것일까?
루비카는 넘치는 기쁨을 참지 못하고 그의 손을 잡았다.
“시험해 봐요, 당장!”
그리고 두 사람은 바로 빨래터로 갔다. 루비카는 붕대 뭉치에 적당히 물을 적셨다. 아르망은 자신의 발명품이 혹 실패했을까 싶어서 식은땀을 흘렸다. 루비카는 그가 준 작은 비누를 붕대 뭉치에 묻혀 비볐다.
“나요. 거품이 나요.”
“정말입니까? 정말입니까, 루비카?”
“네, 그것도 엄청.”
내내 초조한 표정이었던 아르망의 얼굴에서 미소가 피어올랐다.
쿵!
루비카는 그때 들렸던 심장 소리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때 보았던 아르망의 미소를 잊지 못한다. 아마도 평생 기억하겠지.
그건 아름답다는 표현으로도 부족한 미소였다. 만약에 신이 미소를 짓는다면 그리 웃으리라. 루비카는 아르망의 미소를 감히 성스럽다 부르고 싶었다.
신도 기꺼이 허락하지 않을까.
아르망의 그 ‘비누’가 없었다면 수많은 환자가 더러운 침대 시트와 붕대 때문에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