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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14화 (14/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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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4화

망할! 안젤라는 테이블을 발로 차고 에드가에게 한차례 욕을 퍼부어 주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루비카가 행복한 결혼을 하길 바랐다. 고생만 잔뜩 한 사촌 언니였다.

안젤라는 루비카를 보호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을 기울였으나 그녀 또한 부모의 애정과 자비에 기대지 않으면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입장이었다. 어머니의 눈앞에서 일부러 큰소리로 루비카를 비난한 적도 있었다.

공작은 차가운 남자였으나 어쨌든 그녀보다 루비카를 지킬 힘이 있었다. 단 몇 십 분 만에 루비카의 잃어버린 권리를 찾아 주었고 큰돈도 안겨 주었다. 안젤라는 차마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지 말라는 말을 루비카에게 할 수 없었다. 대신 루비카의 자존심만은 지켜 주기로 했다.

“소중히 간직하고 있을게. 언니, 언제든 그게 보고 싶으면 내게 연락해.”

“고마워. 안젤라, 넌 항상 내게 친절했지.”

“아냐. 나는, 나는…… 언니에게…….”

안젤라가 더 말문을 잇지 못하고 뛰어가 루비카의 품에 안겼다. 서러울 것이 하나도 없었는데 서러웠다. 루비카가 우울한 표정으로 돌아가신 그녀의 어머니 사진을 볼 때면 안젤라는 울컥울컥 화가 났다. 자신이 왜 화가 나는 지 연유를 몰랐던 안젤라는 그럴 때마다 루비카에게 화풀이를 했다. 그리고 돌아서 후회했다. 하지만 먼저 루비카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할 용기가 안젤라에게 없었다.

좀 더 언니에게 친절히 말할 걸…….

좀 더 언니에게 웃어 줄 걸…….

루비카는 제 품에 안긴 안젤라를 토닥였다. 사실 루비카는 에드가에게 10만 골드를 요구하고 싶지 않았다. 퍽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안젤라를 구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그래서 루비카는 용기를 내었다. 힘을 낼 수 있었다.

아론의 아카데미에 가면 전쟁의 화마를 피할 수 있다. 수많은 학자와 과학자들이 있는 아론의 아카데미는 용의 권속도 여러 왕국의 병사들도 공격하지 않았다.

‘대신 과학자들을 납치했다지만…….’

안젤라가 제발 화학이나 물리, 공학 같은 전공을 선택하지 않길 빌며 루비카는 안젤라의 보드라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언제 만져도 기분 좋은 머리. 문득 루비카는 안젤라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 안젤라의 머리카락은 적절한 관리를 받지 못해 빗이 잘 들지 않을 정도로 뻣뻣이 굳어 있었다.

내가 이 집을 떠나면 다시 그때처럼 되는 건가…….

안젤라의 머리를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그동안 노력하고 연구했던 시간이 스쳐 지나갔다. 다른 기억들은 희미한데 이상하게 그것만은 루비카의 머릿속에 선명했다.

“안젤라.”

“응.”

“아침에 일어나면 머리를 감고 헹굴 때 물에 장미수를 조금 타. 말리고 빗을 때도 장미수를 살짝만 뿌려 줘.”

안젤라는 멍하니 루비카를 바라보았다. 이 언니가 지금 이 순간에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그러나 안젤라는 바라보는 루비카의 얼굴은 간절하고 또 간절하기 그지없었다.

“저녁에는 올리브유에 로즈힙 오일을 한두 방울 떨어뜨린 다음에 머리카락 끝에 살짝 발라. 절대 로즈힙 오일을 그대로 사용하지 말고 올리브유랑 섞어서 발라야 해. 그리고 아침에는 바르지 마.”

안젤라는 루비카의 간절한 목소리에 눌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카락에는 동백기름이 좋다지만 넌 그걸 쓰면 이마에 뾰루지가 나니 누가 추천해도 절대 사용하지 마.”

문득 안젤라는 루비카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지금이야 안젤라를 본 사람들은 모두 탐스러운 붉은 머릿결을 칭찬한다지만 그때는 아이린 베르너마저 종종 이리 말했다.

-안젤라, 넌 다른 데는 다 예쁜데 머리가 항상 엉망이구나. 아, 정말 그 머리 좀 어떻게 해 봐.

하녀들은 숱 많고 뻣뻣한 머리를 빗기 위해 무리하게 빗을 머릿속에 집어넣었고 그 때문에 두피가 상해 머릿결은 악화일로를 걸었다. 마을에서는 안젤라를 보면 뽀글뽀글 안젤라라고 놀리는 아이들까지 있었다.

그때 언제나처럼 우울한 표정으로 방을 청소하던 루비카가 나섰다.

-내가 한번 빗어도 될까……?

반신반의 머리를 맡기자 루비카의 입술에서 아주 자그마한 미소가 떠올랐다. 안젤라는 숙모의 죽음 이후로 루비카의 얼굴에 그런 미소가 떠오른 것을 처음 보았다. 그리고 루비카는 놀라운 솜씨로 안젤라의 머리를 완성했다.

-언니, 제법 솜씨가 나쁘지 않네.

안젤라는 아주 조금 용기를 내 루비카를 칭찬했다. 남이 듣기에는 칭찬 같지 않은 소리였으나 안젤라에게는 칭찬이었다. 그러자 루비카는 그녀가 행복했던 시절에 자주 보여 줬던 미소처럼 웃었다.

-아냐, 안젤라. 네 머리가 원래 예뻐서 그래.

-……지금 놀려? 내 머리는 다들 뻣뻣하고 엉망진창이라고 해. 뽀글뽀글 안젤라라고 한다고!

머리에 대한 칭찬을 처음 들은 안젤라가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소리쳤다. 그러자 루비카는 깜짝 놀라 불안한 듯 눈동자를 이리저리 움직이면서도 말했다.

-아냐. 나는 그냥……네가 원래 가진 아름다움을 찾아 준 것뿐이야.

-……원래 가진?

-응, 네 머리는 원래 예뻐. 그저 사람들이…… 그 머리의 아름다움을 살리는 방법을 찾지 못했을 뿐이야.

그때부터였을지도 모른다. 이 자신감 없고 언제나 슬픔에 빠져 있던 사촌 언니를 남몰래 신경 쓰게 된 건…….

‘내가 또 뽀글뽀글 안젤라란 놀림을 받을까 봐 걱정돼서 이러는 거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안젤라를 울컥 목구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치밀어 오름을 느꼈다. 루비카가 머리를 손보기 시작한 이후로 안젤라는 더 이상 뽀글뽀글 안젤라라는 놀림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머릿결이 참 예쁘다는 소리를 들었다.

“……언니.”

안젤라가 제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루비카를 향해 입을 열었을 때였다.

“그만, 할 말은 다 끝난 것 같군.”

에드가가 끼어들었다. 그는 안젤라가 눈물을 흘리며 루비카의 마음을 붙잡을 기회를 더는 주고 싶지 않았다. 둘 사이의 마음은 칼의 보고서와 달리 꽤 깊어 보였다. 혹여나 이 작은 꼬마의 안부가 걱정되어서 간신히 설득한 루비카가 가지 않겠다고 선언하면 곤란하다.

그는 루비카의 한쪽 팔을 꾹 잡고 안젤라를 잠깐 바라보았다. 안젤라는 키가 큰 에드가가 내려다보는 냉혹한 눈에 어깨에 소름이 쭉 돋았다. 안젤라는 주눅이 들었다. 너무 뛰어난 아름다움 때문일까? 안젤라는 그 앞에서는 꼭 고양이 앞의 쥐가 되는 기분이었다.

에드가는 한참 말없이 안젤라를 보며 고민하더니 한숨처럼 말을 뱉었다.

“아카데미 방학 때 공작저로 놀러 와도 되니 평생 못 볼 것처럼 굴 필요 없네.”

뜻밖의 말에 안젤라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이 자리에는 그보다 먼저 기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베르너 부부였다.

에드가는 그들을 향해서는 다정히 웃으며 말했다.

“단, 이쪽 덤들을 데리고 오면 문지기가 뜨거운 물을 부어 쫓아낼 거라는 걸 명심하도록.”

다정한 미소와 어울리지 않는 소름이 끼치는 말이었다. 베르너 부부는 안젤라를 앞세워 공작저에 가면 뜨거운 물세례뿐만 아니라 몽둥이로 흠씬 맞을 거라는 걸 예감하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가짜로 웃을 때는 미간을 찌푸리는구나.’

다들 두려움에 떨 때 루비카는 에드가를 관찰하며 그리 생각했다. 어쩌면 지나친 아름다움은 독이었을지도 모른다. 다른 못생긴 남자였으면 쓱 쳐다보고 말 루비카였으나 그녀는 에드가가 지닌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단 몇 시간 만에 그의 일거수일투족 얼굴 근육의 섬세한 움직임까지 모두 외워 버렸다.

루비카는 집사 칼마저 가끔은 헷갈리는 그의 ‘진짜’표정과 ‘가짜’표정을 이미 구분할 경지에 이르렀다. 어쨌든 신탁 때문에 영 못 보게 되는 일은 없으리라 생각했으나 앞으로 안젤라의 얼굴을 가끔이나마 볼 수 있게 된 건 다행이었다.

“안젤라, 아카데미에 입학하면 꼭 내게 편지 보내.”

“응, 언니 나 꼭 열심히 공부할게.”

안젤라는 아까와 달리 환히 웃었다. 그리 웃으며 마음속으로 나중에 저 공작의 마수에서 루비카를 구출할 수 있도록 돈이 될 만한 화학이나 공학 방면을 전공하리라 굳게 다짐한 걸 루비카는 몰랐다.

* * *

에드가는 자신이 내렸던 마차 뒤 창문이 훨씬 더 크고 넉넉하며 화려한 부조가 장식된 마차로 그녀를 안내했다. 루비카는 그가 에스코트 한 마차에 먼저 올라타 에드가를 기다렸으나 에드가는 마차에 올라타지 않았다.

“각하?”

“나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았네. 그대는 이 마차에서 편히 쉬게.”

루비카는 잠시 의자에 앉아 테이블의 서류를 보고 인상을 쓴 다음 펜을 들어 설계하고 고민을 하는 에드가의 모습을 상상해 봤다. 그러자 거센 충동이 그녀를 휘감았고 입이 먼저 움직였다.

“……그럼, 저도 그럼 각하 옆에서 시중을 들게요.”

루비카는 깜짝 놀랐다. 심지어 그녀는 떠나려는 에드가의 손을 자신이 잡은 걸 깨달았다.

세상에…….

아무리 아름다운 것이 좋아도 그렇지…….

하지만 사실 싫은 것과 별개로 일을 하는 그의 모습을 두 눈에 담고 싶긴 했다. 차가운 손에 루비카의 온기가 전해지자 에드가의 입가가 풀어졌다.

“괜찮아. 내 옆에 있어 봤자 복잡한 서류 때문에 심심하기만 할 거네.”

“……네.”

그게 아니라 이건 뇌가 명령하기 전에 입이 먼저 움직인 거라고 해명하고 싶었으나 루비카는 그럴수록 더 구차해질 것 같아 그냥 수긍하는 척했다.

“아내의 의무를 다하려는 건 기쁘지만 우린 아직 결혼 전이 아닌가.”

에드가가 건넨 짓궂은 농담에 루비카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루비카는 황급히 맞잡은 손을 풀려 했으나 에드가가 꽉 힘을 주는 바람에 불가능했다.

“그, 그, 그런……..”

“파렴치한?”

빨간 얼굴이 새파랗게 변하기 전 에드가가 잡은 손을 풀자 루비카는 그만 바닥에 콩하고 주저앉았다. 바닥에 깔린 폭신한 카펫 덕에 충격은 없었으나 추한 꼴을 보였단 생각에 자존심이 상했다.

“하하하하하하하.”

하지만 에드가의 얼굴 한가득 떠오른 웃음에 루비카는 그만 자존심이 아픈 것도 잊고 말았다. 이번에는 미간을 찌푸리지 않았다. 마치 아이와 같이 천진난만한 웃음이었다. 루비카는 이처럼 차가운 사내도 그렇게 웃을 수 있다는 사실에 경이를 느꼈다.

“루비카, 그럼 편히 쉬게. 내일부터 차라리 하녀 일을 하는 게 나았다고 여길 만큼 바빠질 터이니.”

에드가가 웃음을 간신히 참으며 마차 문을 닫았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마차가 출발했다. 루비카가 베르너 저택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기 위해 뒤창의 커튼을 열었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점처럼 작아진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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