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3화
대체 루비카가 저 공작과 집사를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곧 손에 넣게 될 재산에 대한 기대감과 즐거움에 루비카를 그대로 둔 것이 실수였다. 어떻게 저것이 3층에서 탈출할 생각을 했는지 그로선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아깝다. 한없이 아깝다.
형님이 돌아가고 백작 가문 출신의 생활감 없는 형수가 이 저택을 맡았기에 그로서는 조금 꾀를 내었을 뿐이었다. 형수의 어리숙함을 생각하면 이 저택은 그가 아니라 다른 이에게 넘어가고도 남았다. 그럴 바에는 같은 집안 출신인 그가 가지는 게 낫기에 그저 서류에 장난을 좀 쳤을 뿐인데…….
루비카가 그를 철천지원수처럼 보는 이 상황이 마틴 베르너로서는 이해 가지 않고 억울할 뿐이었다.
“……정말 지독하구나. 루비카, 그래도 육친의 정이 있으니 결혼식에는 참석하마.”
루비카는 마치 무슨 큰 은혜라도 베푸는 것처럼 구는 마틴 베르너를 보았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발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삼촌 같은 사람을 잘 알고 있다. 그와 같은 부류는 모든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한다.
아주 작은 틈도 보여선 안 돼. 루비카는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오지 마세요.”
“그게 무슨 소리냐! 우리라도 가지 않으면 네 하객 자리는 누가 채우냐!”
마틴 베르너가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부들부들 떨었다. 그는 정말로 화가 났다. 루비카의 잔혹한 행동에도 측은지심을 발휘해 결혼식에 참석하겠다고 말했건만 이리 정 없이 굴다니…….
“잘됐군. 나도 마침 천애 고아이니.”
그러나 에드가의 매서운 푸른 눈 앞에서 마틴 베르너의 그 대단한 분노도 사그라들고 말았다. 루비카는 삼촌의 선택적 분노에 그나마 있던 정마저도 다 떨어졌다.
“각하, 베르너 양께서 하객을 원치 않으시니 결혼식은 간소하게 진행하는 게 어떻습니까?”
집사 칼이 에드가의 뜻을 읽고 나섰다. 루비카가 만약 하객 없이 결혼식을 치르면 주변에서 수군거릴 것이 뻔했다. 그럴 바에는 하객 없이 증인만 참석시킨 결혼식을 하는 게 나았다.
“그렇군. 이것저것 준비하는 데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으니. 루비카, 어떤가? 내일은 수도에서 회의가 있으니 모래 결혼식을 하는 건.”
결혼식은 일생일대의 이벤트이다. 대부분의 신부는 두려움과 기대 속에서 평생 가장 화려한 옷을 입고 식을 맞이하길 원한다. 그러나 루비카는 에드가와 결혼하고 싶지 않았다. 에드가와의 결혼은 어디까지나 의사소통 실수로 일어난 불의의 사고였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의 결혼이 어떤 식으로 치러지든 루비카는 상관없었다. 그녀가 진심으로 원하는 결혼은 따로 있었다.
“좋아요.”
“그런 말도 안 되는…… 겨우 이틀 만에 결혼을 하겠다고?”
“세상 사람들이 뭐라 하겠소?”
“언니!”
여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던 안젤라가 루비카에게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루비카는 안젤라가 소중한 결혼식을 그런 식으로 대충 치르지 말라고 진심으로 말하는 걸 눈으로 느꼈다.
‘하지만 소중한 결혼식이 아닌걸.’
루비카는 안젤라의 시선을 슬그머니 피했다. 삼촌 내외의 연설 같은 꾸지람은 하나도 신경 쓰이지 않았으나 이상하게 안젤라의 눈빛은 그녀를 아프게 했다. 안젤라가 이 자리에서 진심으로 루비카의 행복을 바라는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칼, 바로 결혼식을 치를 만한 곳이 있나?”
“공작저 근방 코르드 언덕에 휴의 사원이 있습니다.”
“…….”
에드가의 얼굴에 언뜻 어두운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루비카는 잠깐 흐르는 침묵에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왜 에드가는 그토록 꺼림칙한 표정을 짓는 걸까. 혹 공작저 근방에서 결혼식 치르는 걸 주저하는 건가.
루비카는 그가 꺼릴 만하다 여겼다. 작위도 재산도 심지어 외모마저 그에 비하면 부족했다. 대체 그가 왜 자신과 결혼하려 하는지 루비카마저도 의문스러웠다. 공작가 사람들은 오죽하겠는가. 당장 루비카를 인정하지 못하겠다고 결혼식장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할 수도 있었다.
“이 근방에도 휴의 사원이 있어요. 거기에 가서 그냥 지금 맹세해도…….”
“아, 아니오. 루비카, 아무리 그래도 하루 정도는 결혼식을 준비하는 게 좋겠지. 그리고 기왕이면 내 영지 내 사원에서 결혼식을 치르고 저택에서 피로연을 하고 싶군. 이곳은 당신에게 어울리지 않아.”
루비카의 불안을 읽었는지 에드가가 그녀의 손을 살며시 들어 올리더니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마치 그림 같은 동작이었다. 그의 입술이 닿은 손등이 묘하게 화끈거렸다.
루비카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간신히 참았다. 정말 그의 그런 행동은 뭇 여성들이 오해하고도 남을 광경이었다. 그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음을 아는 루비카조차도 그 아름다움에 가슴이 떨릴 정도였다.
그러나 루비카는 자신의 심장 소리를 믿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지나가는 철새의 아름다운 날갯짓에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미의 신봉자임을 스스로 알고 있었다.
에드가는 긴장으로 굳은 적갈색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루비카를 둘러싼 환경은 서류를 통해 보아 짐작했을 때보다 더 끔찍했다. 그는 냉혹한 사내였다. 설사 공작 부인이 될 루비카의 친척이라 할지라도 골치 아픈 혹 따위를 달고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루비카의 사정이나 마음 따윈 고려치 않고 베르너 부부의 사기 행각을 이 자리에서 바로 까발렸다. 그러나 루비카는 이 개탄할 현실에 눈물을 흘리지도 충격받지도 않았다. 분노를 꾹 마음속에 눌러 담으며 차분히 일을 ‘처리’했다.
원래 베르너 부부에게 품위 유지비 명목으로 지급하기로 한 10만 골드를 자신의 지참금으로 요구한 담력은 사내도 가지지 못한 것이다. 고통과 불합리한 처우를 묵묵히 견디면서도 루비카는 자신의 권리가 무엇인지 똑똑히 알고 있었다.
에드가는 루비카가 비록 얼굴에 홍조를 띠고 있지만 자신에게 어떤 욕망도 가지고 있지 않음을 느꼈다. 이는 에드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에드가는 쭉 자신을 두려워하면서도 그를 손바닥 위에 놓고 굴리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둘러싸여 자랐다.
‘아름다움’과 ‘부’와 ‘명예’ 그리고 ‘지위’ 그것은 마치 부패한 공기와 같았다.
그것은 에드가 주변을 감싸며 주변 사람들을 부패시켰다. 어지간히 마음이 강한 사람이 아니면 에드가 주변을 떠도는 부패한 공기에 결국 오염되고 말았다. 그들은 에드가를 소유하고자 했다. 에드가를 소유하면 바로 자신도 그 아름다움과 지위, 부, 명예를 가질 수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러운 떨거지들은 에드가의 차디찬 한마디와 철벽에 부딪히면 너무나도 쉽게 말을 내뱉었다.
—얼굴값 하시네.
—아주 그냥 세상에서 제가 제일 잘난 줄 알지?
—호의를 이런 식으로 갚소?
—경의 아름다움과 지위가 계속될 거란 생각 마시오.
그러나 그들을 친절히 대하면 더 끔찍한 결과를 초래했다.
자신이 에드가와 어느 정도 친해졌다 여긴 이들도 그의 철벽에 부딪힌 사람들과 똑같은 소리를 결국 내뱉었다. 그들은 친근함이란 미명 아래 온갖 상처 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고 모든 것을 에드가를 위해서 하는 ‘충고’라 포장했다.
자신의 말 한마디로 마치 에드가를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것처럼 주변에 떠들고 다녔다. 그들 중 누구도 에드가의 진짜 마음에 대해서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부와 명예 그리고 아름다움을 가진 에드가를 ‘소유’함으로써 자신이 가진 열등감을 해소하고자 할 뿐이었다.
루비카는 그들과 확실히 달랐다. 아니, 좀 희한했다. 분명 그녀는 다른 사람들처럼 에드가의 아름다움에 홀렸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녀의 행동과 말에서는 그를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설사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 하더라도 그를 보는 순간 이전의 사랑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던가.
에드가는 그러면서도 루비카가 자신을 꼼꼼히 살펴본다고 느꼈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그렇게 보면 진절머리 나게 혐오스러웠으나 그는 루비카가 자신을 그런 식으로 관찰하는 게 썩 싫지 않았다.
“이 저택은 이제 루비카의 소유네. 일주일의 말미를 줄 테니 당신들은 당장 떠나게. 루비카, 그대는 나와 함께 공작저로 가지.”
“그런, 공작 각하. 일주일 만에 나가라니요.”
“사람들을 시키기 전에 자의로 떠나는 게 좋을 텐데.”
에드가는 예의 냉혹한 미소를 짓더니 소파에서 훌쩍 일어났다. 루비카는 그의 날씬한 몸이 그리는 아름다운 선을 보았다. 공작의 행동 하나하나가 그림책처럼 우아해 루비카의 눈을 사로잡았다.
‘난 어쩜 이렇게 얼굴에 약할까.’
루비카는 아무리 나이를 먹고 철이 들어도 버릴 수 없는 습관을 저주하며 에드가를 따라 일어났다.
“저, 잠깐 짐을 챙겨도 될까요?”
“아무것도 챙기지 마. 여기에 당신과 어울릴 만한 건 없어.”
“하지만 그 루비……”
에드가는 루비카가 스테판이 낡은 가죽 가방에서 찾아낸 장신구에 대해 말하려 하는 것을 깨닫고 얼굴을 찌푸렸다.
“그건 남작 영애 정도나 할 법한 물건이었네. 공작 부인이 될 당신이 달기에는 격이 너무 떨어지는 보석이지. 정 가지고 싶으면 똑같은 디자인으로 공방에 주문해. 적어도 공작 부인이달 만한 루비로 만들도록 하지.”
아름다움에 대한 설렘은 어지간해서 루비카를 떠나는 일이 없었다. 예쁜 사람이 버릇없이 굴면 버릇없는 미인 특유의 도도함 때문에 좋았고 예쁜 사람이 마음씨가 착하면 어쩜 마음마저 이리 아름다운지 모르겠다며 감탄했다.
그러나 에드가의 그 태도는 그런 루비카의 설렘마저도 다 사라지게 할 정도로 정떨어지는 것이다. 공작은 아름답지만 오만하고 차갑기 그지없는 사내였다.
자신의 어머니가 백작 영애라는 사실을 알고서도 감히 그 보석들을 남작 영애 수준이라고 운운한 것일까? 하지만 루비카는 에드가가 그 장신구들이 어머니의 유품이란 것까지는 모를 거라 생각하며 치밀어 오르는 화를 애써 눌렀다.
또 루비카는 그를 탓할 자격이 자신에게 없다 느꼈다. 루비카 또한 어머니의 유품을 아무 미련 없이 전당포에 팔아 도주 자금을 마련하려 했으니.
‘……반지를 가슴속에 숨겨서 다행이야.’
사파이어도 아닌 푸른 돌을 쪼개 만든 반지. 그걸 보면 이 잘난 남자는 뭐라고 말할까. 그런 돌 따위로 만든 반지, 공작 부인이 들고 다니기에 수치스러우니 당장 버리라고 길길이 날뛰겠지.
차라리 그가 이리 말해 주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잘못하면 멍청하게 반지를 빼앗길 뻔했다. 루비카는 루비 장신구에 대해서 설명하려던 걸 멈췄다.
“새로 주문할 필요까지는 없어요. 안젤라, 네가 돌려줬던 루비 장신구 말이야. 네게 맡길게.”
“하지만 언니, 그건 어머……”
루비카가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안젤라는 곧 루비카의 뜻을 읽고 입을 다물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안젤라는 알 수 있었다. 안젤라는 자존심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는 아이니까.
루비 장신구가 루비카 어머니의 것임을 밝히면 그녀의 어머니는 한순간에 남작 수준에나 어울릴 법한 걸 단 백작 영애가 된다. 루비카는 안젤라에게 자신을 더 비참하게 하지 말아 달라 간청한 것이다.
‘공작 각하는 대단한 사람이지만 언니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 언니도…… 그분을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
이상한 결혼이었다. 서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결혼을 서두르고 있다니. 안젤라는 클레이모어 공작의 속셈을 한 치도 알 수 없었지만 루비카의 마음만은 어렴풋이 알 듯했다.
‘……이 집에서 도망치려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