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2화
베르너 부인은 장남의 비보를 전해 듣기 전까지 그가 보낸 위조 성적표를 철석같이 믿었었지. 그러나 루비카는 이 자리에서 베르너 부인의 환상을 깨지 않기로 했다. 설사 그녀가 말한다고 해서 믿어줄 베르너 부인이 아니었다.
베르너 부인의 말대로 소중한 작위다. 전는 그들이 자신의 가족이라 생각했으나 이제는 아니었다.
“각하, 베르너가의 준남작 작위가 클레이모어 가문의 이름에 누를 끼칠까요?”
“아니.”
그녀의 뜻을 읽은 클레이모어 공작이 단호히 대답했다. 루비카는 그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언뜻 다정한 듯 보였으나 눈은 기민히 루비카의 행동거지에 점수를 매기고 있음을 느꼈다. 하지만 루비카는 그의 그런 행동에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것보다 지금은 자신의 뜻을 정확히 밝히는 게 우선이다.
“그럼 제가 가진 준남작 작위를 기꺼이 제 부군이 될 각하의 가문에 속하도록 하겠습니다.”
응접실에 정적이 지나갔다. 잠시 베르너 부부는 제 귀를 의심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니?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느냐.”
“감히, 감히 너는 우리에게 이럴 수는 없다!”
베르너 씨는 당장에라도 입에 게거품을 물 것 같은 상태가 되었다. 준남작 작위가 있고 없음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진다. 하지만 루비카는 그를 싸늘한 눈으로 바라봤다.
‘아직 시작도 안 했어.’
그녀는 삼촌 내외가 당연하다는 듯 그녀에게서 빼앗았던 모든 것을 되찾기로 결심했다.
“저는 그래도 돼요.”
단호히 대답했다. 긴 말 해 봤자 그들에게 꼬투리를 잡히거나 말려들기만 할 뿐이다. 세리토스 왕국은 여성의 상속권을 한정적이나마 인정해 줬다. 준남작위의 소유자는 루비카다. 결혼을 명하는 국왕의 특별허가증이 떨어진 지금, 베르너 삼촌은 더욱더 소유권의 주장할 수 없다.
“각하, 이 저택은 제게 추억이 많은 곳이 가끔씩 오고 싶습니다.”
“별장으로 삼도록 하지.”
순식간에 베르너 부부는 그동안 누렸던 준남작 작위가 주는 편의는 물론 저택을 잃었다. 원래 그들의 것이 아니었으나 그들은 꼭 가진 것을 잃은 것처럼 굴었다. 루비카는 숙모가 체통을 다 내버리고 저택이 쩌렁쩌렁하게 울든, 삼촌이 항의하든 개의치 않기로 했다. 그들의 말과 눈물은 더 이상 루비카의 마음을 흔들 수 없었다.
그녀는 에드가의 손을 꽉 잡았다. 에드가의 푸른 눈이 당혹으로 일렁거렸다. 루비카는 그녀에게 항의하는 베르너 부부의 말을 흘려듣고 에드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클레이모어 공작가에 대기에는 형편없이 낮은 삼류 작위였으나 삼촌의 말대로 그녀의 아버지가 열심히 일해 그 공로를 인정받아 취득한 작위였다. 그녀는 이대로 공작에게 갖다 바칠 생각은 없었다. 비록 그게 하늘 같은 공작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수준이라 해도 루비카에게는 소중했다.
“제 삼촌 내외에게 주기로 한 10만 골드는 지참금 명목으로 제게 주실 수 있나요?”
당돌한 루비카의 말에 집사 칼이 헛기침을 했다. 칼은 응접실에 사용인들을 모두 나가게 다행이라 여겼다. 그는 새삼 오랫동안 삼촌 내외에게 착취당해 루비카의 마음이 병든 게 아닌가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루비카는 미치지 않았다. 그녀는 지참금 없는 여인의 삶이 얼마나 비참한지도 알았고 이후 전쟁이 날 때 안전히 도피하기 위해서 돈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일단 에드가를 향해 상냥히 웃었다.
“물론 아까우시면 안 주셔도 괜찮아요.”
아까우시면…….
그건 에드가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음성이었다. 그것이 에드가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 이는 루비카의 노림수였다. 루비카는 이전의 삶에서 자존심 센 수사들에게서 책이나 기구를 빌릴 때 가끔 그리 말했다.
‘아까우시면 안 주셔도 괜찮아요.’
그럼 대부분 발끈해서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책을 내주었다. 에드가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그는 돈으로 마음을 살 수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할 사내였다.
누군가는 10여 년을 벌어도 못만질 돈이었으나 에드가는 그 돈으로 원만한 결혼 생활을 살 수 있다면 무척 값싸다고 느낄 자였다
“기꺼이 주지.”
“감사합니다.”
루비카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루비카는 그제야 팽팽한 긴장의 끈을 풀고 베르너 부부에게로 얼굴을 돌렸다. 그녀가 10만 골드란 칼자루를 쥐자 베르너 부부는 금세 태도를 바꾸었다. 심지어 숙모는 루비카에게 친절하게 웃었다. 그녀가 작위 대행자를 삼촌으로 임명한 후 처음보이는 미소였다.
“루비카, 그 10만 골드 말인데…….”
그러나 루비카는 숙모의 말을 무시하고 그 옆에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던 안젤라를 불렀다.
“안젤라, 네 앞으로 5만 골드 신탁을 걸게.”
안젤라는 루비카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그녀는 루비카가 자기 부모에게 치를 떨다 못해 발가벗겨 저택 밖으로 쫓아내도 할 말이 없다 여겼다.
비록 어머니가 루비카를 학대하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저 자신도 루비카에게 얼마나 못되게 굴었던가. 그러나 루비카의 입가에는 침착하고 다정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자칼 은행 앞으로 할 거야. 원금은 건드릴 수 없는 대신에 5만 골드의 이자는 네가 쓸 수 있게 할게.”
대번 베르너 부부의 얼굴이 밝게 변했다. 5만 골드의 이자면 한 사람분의 아카데미 학비를 내고 네 가족이 넉넉히 먹고 살 수 있었다. 베르너 씨는 만족스러운지 손을 비볐다. 5만 골드를 바로 쓰는 것이 제일 좋지만 연금처럼 타 쓰는 것도 나쁘지 않을 법했다. 하지만 루비카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단 조건이 있어.”
“조건?”
“안젤라, 네가 아카데미에 가서 공부하는 조건이야.”
안젤라는 소스라치게 놀라 입을 벌렸다. 루비카가 하는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공부를 하라고? 나보고?’
그리고 베르너 부부는 다른 의미로 놀랐다. 그들은 안젤라 앞의 신탁으로 당연히 아이작의 학비를 낼 생각이었다. 아론의 아카데미의 학비는 무척 비싸다. 5만 골드의 이자로 두 사람분의 학비를 감당할 수 없다.
“하지만……, 언니. 아카데미 같은 데는 똑똑한 사람이나…….”
“그래, 안젤라에게 아카데미에서 공부를 하라니. 루비카, 얘는 그렇게 똑똑하지 않아. 그러지 말고 그 신탁은 아이작 앞으로 하도록 하자꾸나. 그 애라면 아카데미를 좋은 성적으로 졸업해 정식 회원이 되어 분명 남작 작위쯤은…….”
“안젤라, 너는 똑똑해.”
루비카는 베르너 부인의 말에는 그냥 대꾸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말해 봤자 그녀는 듣지도 믿지도 않을 것이다.
“5만 골드의 이자는 네가 아카데미에서 공부하고 생활하는 것 이외에는 쓸 수 없어. 그게 조건이야.”
그리고 루비카는 안젤라가 졸업하면 5만 골드는 자유롭게 쓰게 해 줄 심산이었다. 하지만 이를 베르너 부부 앞에서 말하고 싶지 않았다.
“언니, 그치만 거기는 남자들이나…….”
“여자도 갈 수 있어. 수가 적어서 그렇지. 아론의 아카데미는 결코 여자라는 이유로 학생을 거부하지 않아. 거긴 평민도 똑똑하다면 공부할 수 있는 곳 인걸, 그렇죠? 각하.”
에드가가 루비카의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너 이외에 다른 사람이 그 돈을 건드리면 나는 가만 있지 않을 거야.”
루비카는 숙모를 똑바로 바라 보았다. 그녀는 이전과는 확실히 달랐다. 베르너 부인은 등 뒤에서 소름이 돋았다. 클레이모어 공작의 청혼을 받아 들였을 때 그녀는 돈 방석에 앉을 줄 알았다. 루비카는 심약하고 잘 속으니 거머리처럼 들러붙어서 고혈을 뽑아내듯 쭉쭉 돈을 뽑아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렇게 얕봤던 루비카가 그들을 단 한 순간에 저택에서 내쫓았고 틈 하나 주지 않았다. 이제 돈 방석은커녕 거지방석에 앉게 생겼다.
“그런 루비카……, 그럼 남은 5만 골드는 어찌할 생각이니?”
베르너 부인의 중얼거림에 번뜻 마틴 베르너의 머릿속에 번개가 내리쳤다. 그는 깨달았다. 그리고 루비카를 향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구나. 안젤라는 너무 어려 신탁을 걸었구나. 그래, 그러니 큰돈을 걸 수밖에 없지. 우리는 하하, 성인이니 원금 그대로 주면 되지.”
그의 낙천성에 베르너 부인마저도 할 말을 잃었다.
“음, 아이작을 위한 돈이랑 우리 생활비, 또 저택을 새로 구할 돈을 생각하면 4만 골드면 적절하겠구나.”
“안 드려요, 두 분과 아이작에게는.”
마틴 베르너가 끔벅였다. 루비카는 새삼 그의 그런 표정이 두꺼비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뭐라고? 다시, 다시 말해 주겠니?”
“두 분과 아이작에게는 한 푼도 안 나눠 줘요.”
마틴 베르너씨가 그 말을 이해하는 데는 한참 걸렸다.
“세상에, 그런!”
마틴 베르너의 이마에서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그는 세상에 어찌 니가 네게 이러느냐고 그간의 정을 봐 달라고 애원하기 시작했다.
“루비카! 나는 네 아버지의 동생이다. 그 간의 정을 생각하거라.”
하지만 마틴 베르너는 루비카에게 다가거나 치맛자락을 잡을 엄두는 못 냈다. 그녀의 뒤에 있는 집사 칼이 그를 무서운 눈으로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루비카는 애원하든 말든 아주 냉정하게 그를 쳐다 보지도 않았다. 그런 베르너 씨보다 베르너 부인이 상황을 좀 더 빨리 파악했다.
지금 루비카를 설득해 봤자 얻을 수 있는 건 없다. 그녀는 공작을 공략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쨌든 루비카 같은 아이에게 10만 골드나 주겠다는 사람이다.
“각하, 공작 부인의 친정을 가난 속에 살게 내버려 둘 건가요? 그리되면 모두 흉을 볼 겁니다. 공작가에는 이른바 품위 유지비 항목이란 게 있지요? 저희는 루비카의 가족입니다.”
베르너 부인의 말은 일견 일리 있었다. 에드가는 잠시 고민했다. 귀찮으니까 돈 좀 떼어 주고 꺼지라고 할까. 하지만 이런 자들은 돈을 받는 순간 더 귀찮게 들러붙을 수 있다.
“제게 가족은…… 없어요!”
루비카의 외침은 단단한 공작의 어깨마저도 움찔거릴 만 했다. 꼭 비명 같았다.
“삼촌, 숙모. 두 분은 저희 부모님을 속이셨어요. 어머니는 빚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 때문에 자리보전하시다 돌아가셨죠. 이치를 따진다면 두 분은 제 가족이 아닌 원수에요. 제가 두 분에게 책임을 묻지 않은 건 일말의 애정이 있어서가 아니에요. 그저 삼촌이 돌아가신 아버지의 동생이어서…… 단지 그뿐이에요.”
루비카가 고개를 돌려 에드가를 바라보았다.
“저는 천애 고아에요. 이 분들에게 품위 유지비를 지급하면 저를 무시하는 걸로 간주하겠습니다.”
에드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제 옆에 있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가련하지만 강하다. 염치를 모르는 듯 하지만 누구에게 상을 줘야 할지 누구에게 벌을 줘야 할지 알고 있다. 그는 언뜻 보기에 평범해 보였던 여자의 안에 비범한 영혼이 깃들어 있다 느꼈다. 그리고 그 비범한 영혼은 끝없이 그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지급하지 않겠네.”
마침 이 거머리들을 어찌 처리해야하나 고민하던 참이었다. 그로서는 오히려 루비카의 단호한 태도가 고마웠다.
마틴 베르너씨는 기가 찼다. 그는 루비카를 윽박질러 생각을 고쳐먹게 만들려 했다. 그러나 그의 앞에 있는 집사가 주먹을 꼭 쥐어 보여 주는 바람에 그만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