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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11화 (11/212)

# 11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1화

* * *

한편 밖으로 나와 한참 분노로 씩씩거렸던 루비카는 시간이 지나 흥분이 가라앉자 자신이 저지른 엄청난 일을 깨닫고 겁에 질렸다. 공작의 뺨을 때리다 못해 걸레 같은 놈이란 차마 입에 담기 남사스러운 욕까지 지껄이다니!

공작의 도발에 넘어가 그런 모욕적인 말을 자신의 입에 올렸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맹세컨대 ‘걸레’라는 욕은 루비카가 제일 싫어하는 욕이었다. 하지만 도로 마차로 돌아가 공작에게 사과할 자신도 없었다. 루비카는 어리석은 자신에 대한 저주의 말을 속으로 삼켰다.

“아, 베르너 아가씨. 각하와 말씀은 잘 끝나셨습니까?”

소란스러운 베르너 저택 내부 단속을 마치고 나온 집사 칼이 루비카를 발견하고 반가이 말을 걸었다. 그러나 그의 밝은 목소리는 루비카의 마음에 더욱 깊은 상념만 줄 뿐이었다. 루비카는 어두운 얼굴을 도리도리 저었다.

“혹 각하께서 아가씨께 친절히 미소 지으셨습니까?”

“아니요.”

“음, 아가씨의 미모를 칭찬하셨습니까?”

“네? 그럴 리가 있나요.”

루비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답하자 칼의 얼굴에 온화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럼 이야기가 잘 끝났나 보군요.”

“그래, 무척 잘 끝났지.”

대답을 한 건 루비카가 아니었다. 에드가가 어느새 마차 문을 활짝 열고 내려왔다. 그의 반듯한 뺨 어디에도 루비카의 손바닥 자국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언제 그녀에게 뺨을 맞았냐는 듯 온화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우리끼리 이야기가 끝났으니 이제 가족 간의 이야기를 마무리하러 가지.”

“저런, 각하께서 정말 화가 나셨나 보군요.”

루비카에게 한마디 조언을 하려던 칼은 에드가의 강렬한 눈빛에 황급히 입을 다물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루비카는 영문도 모른 채 한쪽 손을 에드가에게 잡혀 베르너 저택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베르너 저택 안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루비카가 저택을 몰래 빠져나올 때까지만 해도 소란스러웠으나 지금은 응접실로 가는 내내 하녀는커녕 집을 지키는 하인마저 보이지 않았다.

집사 칼은 마치 베르너 저택에서 오래전부터 일했던 것처럼 능숙히 안내했다. 응접실에는 베르너 부부와 안젤라가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창백한 안색이었던 베르너 씨가 루비카를 보자 벌떡 일어서며 환히 웃었다.

“루비카! 기다렸단다. 내 말을……”

여전히 자신의 입장을 자각하지 못한 채 루비카를 쉬이 부르는 베르너 씨의 태도에 에드가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바로 칼이 그의 뜻을 이해하고 베르너 씨에게 조용히 경고했다.

“공작 부인이 되실 분의 성함을 함부로 호칭하지 말아 주시길 바랍니다.”

“무…… 무슨, 나는 루비카의 삼촌이오. 갈 곳 없는 저 애를 거뒀다고!”

이미 저택 앞에서 공작을 마주해 그가 얼마나 차가운 남자인지 경험한 베르너 부인이 눈치 없는 남편의 바지를 잡아당겼으나 낙천적인 베르너 씨는 개의치 않았다.

저 치들이 얼마나 대단한지 몰라도 공작의 아내가 될 사람은 그가 거둬 기른 루비카였다.

루비카는 적어도 그가 베푼 것이 얼마나 크나큰 은혜인지 알아야 했다. 공작 또한 지금의 자신이 없었다면 루비카를 데려갈 꿈도 꾸지 못했으리라는 사실을 똑똑히 알아야만 했다.

“내가 형님 내외가 진 빚을 갚아 주지 않았다면 루비카는 애초에 빚쟁이들에게 머리채가 잡혀 사창가나…….”

그러나 베르너 씨는 그가 베푼 은혜를 더 늘어놓지 못했다. 그는 피가 줄줄 흐르는 깨진 코를 잡고 주저앉았다.

“아버지!”

“여보! 세상에……어쩜 이리 야만적인 거죠?”

루비카는 놀라서 손으로 입으로 막고 칼을 바라보았다. 바늘로 찔러도 웃고 있을 것 같은 집사가 주먹으로 베르너 씨의 코를 정확히 때린 것이다.

“다른 분이였으면 목이 달아날 소리였으나 공작 부인이 되실 분의 친척이시기에 선처를 베풀었습니다.”

“그…… 그런, 이이가 한 말이 그렇게 잘못되었나요? 이이는 그저 자신이 루비카를 위해 한 일에 관해서 설명을 하려 했던 것뿐이에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모르시다니, 베르너 저택에 숙녀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귀족의 도리에 대해 알려드릴 예법 선생님을 보내겠습니다. 적어도 따님만은 제대로 된 예절을 익히셔야지요.”

베르너 부인은 더 말하지 못하고 입을 쩍 벌렸다.

빌어먹을 클레이모어!

베르너 부인은 재빨리 타깃을 바꿔 루비카에게 어서 그녀의 삼촌과 숙모에게 못되게 구는 집사를 혼내라를 눈빛을 보냈다. 공작가에는 대들 수 없지만 루비카는 만만하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기억하는 루비카라면 매서운 눈초리에 주눅이 들어 칼을 말렸어야 했다.

그러나 루비카는 베르너 부인의 시선에도, 제 아버지를 구해 달라는 안젤라의 간절한 눈빛에도 입을 앙다물었다. 오히려 루비카는 마틴 베르너가 함부로 입에 담은 ‘사창가’라는 말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칼의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베르너 씨의 언행은 전혀 귀족답지 못했다. 더 이 쓸모없는 이야기에 기력을 소비하고 싶지 않았던 에드가는 소파에 착석하자마자 이야기를 꺼냈다.

“베르너 경, 루비카와의 결혼을 허락하는 대가로 그대가 청한 요구사항에 대해서 일단 숙고해 봤네.”

베르너 씨와 베르너 부인의 눈빛이 순식간에 장사치의 것으로 변했다. 그들은 클레이모어 공작이라는 호구를 잡아서 그동안 루비카를 키운 대가를 단단히 받아낼 속셈이었다.

“루비카의 어머니, 형수는 오랜 시간 지병을 앓았지요. 6년 전 약을 쓴 보람도 없이 형수마저 죽었을 때 자금 사정은 엉망이었습니다. 이 저택을 담보로 얼마나 많은 돈을 빌렸는지, 저희 부부는 그 빚을 모두 다 갚아 간신히 저택과 준남작 지위를 지켜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루비카를 먹여 키웠지요. 루비카에게 저희는 부모나 다름없습니다. 아니, 경제관념이 희박하신 형님보다 더 든든한 루비카의 보호자라고 생각합니다.”

베르너 씨의 일장연설이 끝나고 응접실에 침묵이 감돌았다. 에드가는 그저 싸늘하게 베르너 씨를 쳐다만 보았다. 에드가 앞에서 베르너 씨와 그가 베푼 은혜에 대해 시시콜콜 따지는 것으로 집안을 망신시키고 싶지 않았던 루비카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결국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베르너 부인이 먼저 입을 떼었다.

“그에 비해 10만 골드는 무척 싸다고 볼 수 있지요.”

상상도 못한 금액에 루비카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녀의 기억으로 집이 넘어갈 때쯤 갚아야 했던 빚은 오천 골드 내외였다. 6년간 루비카가 먹고 입고 자는데 쓴 비용은 백 골드도 되지 않았을 터였다. 아니, 사실상 베르너 부부는 루비카를 하녀처럼 부리며 이득을 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싸다’라…… 조카를 물건 취급하는군.”

나직이 중얼거린 에드가의 말에 루비카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베르너 부인은 자신의 말실수를 깨달았는지 애매하게 웃었다. 그러나 그녀는 여기서 한 푼도 깎아 줄 수 없다는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에드가는 루비카의 가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결혼하지 않을 처지가 아니었다.

이미 황제의 특별허가증이 떨어진 걸 눈치챈 그들은 더더욱 이 호구에게서 제값의 열 배 이상쯤은 받아내리라 마음먹었다. 에드가는 미동 없이 베르너 부부의 말을 가만히 듣더니 칼 쪽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칼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준비된 자료를 그의 손 위에 올렸다.

베르너 부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들은 집사 칼이 내민 서류가 분명 10만 골드 어치의 어음이거나 보증서라 믿었다. 그러나 에드가가 테이블 위에 던지듯 내민 서류는 그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루비카의 아버지가 진 빚에 대해 조사해 보니 그 사채업자들이 모두 마틴 베르너, 당신과 연결되어 있더군.”

루비카가 손을 파르르 떨며 테이블 위 서류를 집었다. 삼촌 일가는 루비카를 맡은 이후부터 내내 준남작 지위가 걸린 저택을 남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자신들이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렀는지 누누이 이야기했다.

그 빚은 루비카가 평생을 일해도 갚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각하, 루비카 베르너 양의 아버지 세드릭 베르너 경에게 사채업자를 소개해 준 사람이 바로 마틴 베르너 씨입니다. 또한, 최초의 계약서에 표기된 이자율과 세드릭 베르너 경의 죽음 이후 루비카 양의 어머니에게 전달된 계약서가 일치하지 않음을 확인하였습니다. 일종의…… 사기라 볼 수 있습니다.”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마틴 베르너, 당신은 자신이 루비카 베르너의 보호자라 주장할 수 없네.”

그리고 에드가는 여전히 벌벌 떨며 자금의 출처에 대해 조사한 서류를 보고 있는 루비카의 손을 잡았다. 루비카를 바라보는 그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어떻게 하길 바라나?”

하지만 눈이 차갑다. 루비카는 그 차가운 눈에 정신을 차렸다. 지금은 충격에 몸을 벌벌 떨 때가 아니었다.

“삼촌, 숙모. 이 집에서 나가세요.”

서류를 살펴 본 루비카가 계산을 끝냈다. 베르너 부부에게 그나마 가지고 있었던 혈육으로서의 정이 모두 끊어졌다.

이 빚만…… 이 빚만 없었어도 루비카는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좀 더 다양한 치료를 시도할 수 있었다. 애초에 어머니가 몸져누운 것도 막대한 사채로 인해 얻은 마음의 병 때문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니? 루비카! 네가 먹고 입는데 쓴 돈이 공짜인 줄 아니?”

“숙모가 제게서 가져간 옷이랑 보석이면 값을 치르고도 남았어요. 거기에 제가 일한 것까지 주당으로 치면 오히려 돈을 받아야 하는 건 저예요.”

“악독한 것! 갈 곳 없는 너를 받아 준 아이린에게 그게 할 말이냐?”

“흑흑, 세상에. 어떻게 이럴 수 있니? 이건 착오야. 뭔가 잘못된 거야. 흑흑, 네 삼촌은 그런 사람이 아니란 걸 알잖아. 마틴은 그저 호의로 사람을 소개했고 네 아버지를 속인 건 우리가 아니라 그 사채업자였던 거야. 우리, 우리도 피해자야.”

루비카는 귀를 막고 싶었다. 어떻게 사람 좋은 아버지와 철면피 삼촌이 한배에서 난 자식인지 신비롭단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크나큰 압제라도 받은 것처럼 구는 삼촌 내외를 보며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걸 간신히 참았다.

“그럼 이 서류들을 가지고 관청에 가요.”

나지막하지만 단호한 말에 베르너 부인의 우는 소리가 끊겼다.

“재판을 받으면 모든 것이 명명백백…….”

“가족끼리 재판이라니!”

마틴 베르너가 사색이 되어 외쳤다. 이 정도까지 했으면 보통 사람은 말귀를 알아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나칠 정도로 베르너 부부는 염치가 없었다. 그들은 루비카를 자신들이 윽박지르면 되는 존재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루비카는 베르너 씨의 외침에도 고개를 숙이지도, 겁먹지도 않고 담담히 입가에 옅은 미소만 띠고 있었다. 마치 이런 아수라장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초탈한 모습이었다.

에드가는 사실 루비카가 정에 약해져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일까 걱정했으나 그녀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소리 지르지도 않았으며 이성을 잃지도 않았다. 낮고 조용한 어조로 딱 필요한 부분만 지적했다.

문제는 저들이다. 에드가는 베르너 부부 같은 사람들은 신물이 나도록 봤다. 아무리 상대편이 옳은 말을 하여도 자신보다 낮은 자라 판단되면 들은 척도 안 하지. 그리고 에드가 같은 자가 한마디를 하면 재까닥 듣는다.

그는 이만 이 시끄러운 소리를 없애고 싶었다.

“루비카의 판단에 전적으로 동의하네. 베르너 경, 조카에게 친 사기에 대한 죄를 묻지 않는 선에서 끝나는 것은 그대가 루비카의 친척이기에 자비를 베푸는 것임을 알았으면 하네.”

루비카는 자신이 말할 때는 한마디 한마디 끼어들었던 삼촌이 에드가의 말에는 입도 벙긋하지 않는 현실에 개탄했다. 그러나 모든 것을 가진 완벽한 공작 에드가와 달리 자신은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베르너 저택에 의탁하고 있었던 게 사실이었다. 삼촌 내외가 한 더러운 수작 또한 에드가가 아니었다면 밝혀질 일 없었겠지.

“어쨌든 루비카의 부모와 한 계약이 사기임이 증명되었으니, 저택의 소유자는 루비카가 맞네. 그럼 루비카, 준남작 작위를 어떻게 하길 바라지?”

루비카는 오랫동안 빼앗겼던 자신의 권리를 바로 옆에 있는 재수 없는 남자 덕분에 찾았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사실이 무척 속이 쓰렸다.

그러나 루비카는 울상을 하기보다 오래전 자신이 가졌어야 할 권리를 빚 핑계로 앗아간 삼촌 내외에게 자신이 예전과 같지 않음을 알리는 데 집중하기로 했다.

“작위를 이어받은 여인이 그보다 큰 작위를 가진 남자를 남편으로 맞이하게 되면 친정에 작위를 돌려주는 게 보통이지요.”

“그래, 루비카. 네 아버지가 얼마나 힘들게 얻은 준남작 작위이니? 작위는 나와 아이작이 이어받으마. 아이작이 아카데미에서 열심히 공부 중인 걸 알고 있지 않으냐? 그 애라면 준남작 작위를 남작 작위로 만들고도 남을 것이야.”

화색이 돌아 말하는 베르너 씨를 루비카는 싸늘한 눈초리로 바라봤다. 그럴 일은 없다. 아이작은 부모가 보낸 돈으로 열심히 수학하기는커녕 탱자탱자 놀다 어느 날 노름판에서 시비가 걸려 비명횡사하니까.

그가 한 행동은 준남작가의 작위를 박탈할만 했다. 거기까지 가지 않은 건 오직 루비카의 아버지가 한 일을 왕국에서 높이 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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