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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10화 (10/212)

# 10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0화

“어제도 바빴고 오늘도 바빴고 내일도 바쁠 예정이지. 내일은 게다가 긴급회의가 있네. 그래서 국왕 전하께서도 결혼 허가증을 시급히 발급해 주셨고 약속한 날짜보다 빨리 그대를 데리러 왔지. 내 설계가 하루라도 늦춰지는 순간 왕국이 입게 될 손해가 얼마나 막심한지 그대는 알고 있나?”

화를 내느라 찌푸린 이마가 에드가의 섬세하고 신경질적인 외모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루비카는 그만 홀린 듯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화내는 모습마저 우수에 차 보이다니!

인간을 빚어내는 신이 있다면 분명 루비카는 발로 대충 만들고 그는 손가락 끝까지 온 힘을 다해 빚어낸 게 틀림없었다.

“국왕 전하께 자초지종을 보고하는 보고서를 올리고 변호하고 재판 여부를 기다리고 그런 일에 내 시간을 소모하고 싶지 않아.”

“……하지만.”

“루비카, 일단 내 말을 들어 보지.”

에드가는 셰리니 피앙세니 비꼬거나 놀리는 단어를 쓰지 않고 루비카의 이름을 있는 그대로 불렀다. 루비카는 그가 비록 사무적이긴 하지만 아까와 달리 자신을 진심으로 대하고 있다 느꼈다. 그녀는 입을 다물고 에드가의 말을 경청했다.

“일단 나와 결혼하게. 그게 서로서로 귀찮고 곤란한 일을 피하게 해 줄 것이고 그런 뒤 잠잠해졌을 때 이혼하면 돼.”

“……이혼이요?”

“그렇네. 이혼.”

에드가는 자신이 ‘이혼’이란 말을 먼저 꺼내고도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한쪽 눈가를 찌푸렸다.

루비카는 대체 이 남자가 왜 자신과의 결혼을 이렇게 무리하게 밀어붙이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꽤 좋은 수란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말해서 루비카에게만 유리한 제안이었다. ‘이혼’에 대한 이유가 합당하다면 국왕 전하의 처벌도 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지긋지긋한 삼촌 부부에게서 탈출할 수 있었다.

그가 왜 이렇게 자신에게 유리한 수를 던지는지는 모르겠으나, 루비카로서는 이 기회를 붙잡을 수밖에 없었다.

“좋아요. 그럼 결혼 유지 기간은 어느 정도면 되나요? 1년이면 충분하겠죠?”

“싫네.”

“네?”

“가난하고 지위도 낮은 여자와 결혼한 지 1년 만에 이혼하는 공작이라니, 세상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나?”

가난하고 지위 낮은 여자. 에드가의 신랄한 말에 루비카가 얼굴을 찌푸렸다. 신은 참 공평하시지, 이렇게 아름다운 남자에게 열자마자 정이 뚝 떨어지는 입을 주시다니.

그러나 에드가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기에 반발할 수 없었다. 에드가는 루비카의 분노를 애써 참는 표정을 보고 자신이 또 말실수를 했음을 깨달았다.

참 이상한 여자였다.

에드가는 클레이모어 공작인 자신과 결혼을 하고 싶어서 안달 난 여성의 이름을 이 자리에서 열 이상은 댈 수 있었다. 중매를 서려는 본래의 목적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그를 귀찮게 하는 중년 귀족 역시 셀 수 없이 많았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외모가 뭇 여성의 마음을 사고도 남을 정도라는 걸 알고 있었다.

사교계에서 떠도는 그의 미모에 대한 찬양에 콧방귀를 뀌며 도도하게 굴던 레이디들도 정작 그 앞에 서면 결국 얼굴을 붉히기 일쑤였다.

그러나 루비카는 달랐다. 비록 눈을 마주치며 종종 얼굴을 붉히고 다른 여자들처럼 홀린 듯 그를 쳐다볼 때가 있긴 했으나 그건 ‘사랑’에 빠진 눈이 아니었다.

굳이 비슷한 걸 찾자면 생일날 크림을 잔뜩 바른 케이크를 보는 다섯 살 난 아이의 눈 정도일까. 그러나 루비카의 눈에는 그런 애매한 감정보다 더 확실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혐오’.

에드가는 단 몇 분 루비카와 대화한 것만으로도 그녀가 자신을 혐오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것을 숨길 생각도 없음을 알았다.

생소한 감정이었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를 좋아하냐면 글쎄, 그렇지 않았다. 설사 호감이 있어도 일이 얽히면 변하는 게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막대한 이권을 쥐고 있는 그 앞에서 이를 숨겼다. 그들은 두려움 가득한 얼굴로 에드가를 바라보았다.

가끔 그 앞에서 루비카와 비슷한 감정을 내뿜은 여인들이 있었지만 대부분 그를 손에 넣기 위한 뻔한 계략인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루비카는 그를 진심으로 혐오했다.

또 그의 무례를 참으려 노력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내 비꼬는 말에 지당한 말씀이라고 맞장구를 쳤겠지.’

언제나 자기 앞에서 가면을 쓰고 있는 사람들 틈에서 자란 에드가는 자신을 민낯 그 자체로 대하는 루비카에게 설명하기 어려운 짜릿한 감정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가난하고 신분 낮은 여자’라고 지칭한 것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다. 고작 그런 말실수로 사과하기에 그의 신분과 자존심이 너무 높았다.

“그럼 어느 정도 기간이 적당한가요, 각하?”

루비카도 에드가에게 무례를 사과받기란 해가 서쪽에서 뜨길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임을 알았다. 그러기에 한숨을 한번 쉬고 화제를 전환했다.

“글쎄, 한 10년?”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너무 긴가?”

“1년은 비난을 피하기에 너무 짧으시다니 2년 어떤가요?”

“2년은 사과나무 싹이 자라나 열매도 맺지 못할 짧은 시간이지.”

“2년은 기어 다니던 아이가 뛰어다니고도 남을 정도로 충분히 긴 시간이에요.”

결혼 유지 기간을 둔 긴 흥정이 시작되었다. 루비카쯤은 쉽게 요리할 줄 알았던 에드가는 그녀의 뛰어난 흥정 솜씨에 혀를 내둘렀다. 그건 일반적인 귀족 처녀가 가질 만한 솜씨가 아니었다. 오래 살림을 해 시장 상인들의 온갖 수작질에 대응하는 법을 알고 있는 노파나 가질 솜씨였다.

대체 베르너가에 있는 동안 어떤 삶을 살았기에 고작 스물두 살밖에 되지 않은 영애가 이리된 걸까.

에드가는 눈살을 찌푸렸다.

어쨌든 두 사람은 4년이 조금 못 되게 결혼을 유지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에드가는 그쯤에서 루비카가 지쳐 나가떨어질 줄 알았다. 그러나 루비카는 가난한 수도원에서 일하며 적은 돈으로 수백 명분의 식사를 확보하기 위해 상인들과 지루하게 싸우는 법을 습득한 여자였다. 그녀는 상자 위의 과일이 깨끗하고 싸다고 덜컥 사면 미처 확인 못한 상자 아래가 다 썩어 빠진 과일로 채워져 있을 확률이 구 할이 넘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이는 없어요. 당연하지만 잠자리도 안 돼요.”

이것 참 물건이로군. 에드가의 입꼬리 하나가 올라갔다. 비록 혼기를 놓쳤다고 하나 다 큰 처녀의 입에서 잠자리 소리가 나오다니. 루비카는 공작 앞에서 뻔뻔스레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으나 사실은 죽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웠다. 이를 참기 위해 치마 아래에 숨긴 한쪽 주먹을 아까부터 꾹 쥐고 있었다.

그러나 대충 ‘알아서 배려해 주겠지.’라고 남자를 믿었다가 큰코다친다는 신념은 그녀가 믿는 몇 안 되는 진리 중 하나였다.

“설마 자신을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를 안을 정도로 궁하신 분은 아니시겠죠?”

“쓰레기 취급하지 마.”

더는 듣기 싫다는 듯 에드가가 이를 꽉 물고 긁는 소리로 답했다. 살기와 비슷한 기운이 감돌자 눈이 더욱 푸르게 빛났다. 마치 불꽃같았다. 루비카는 그 눈에 어울릴 만한 수식어를 반사적으로 찾다 얼른 정신을 차렸다.

“좋아요. 그럼 서로 합의를 본 거예요.”

루비카의 목소리에 안도가 서려 있었다. 그러자 문득 에드가는 장난이 걸고 싶어졌다. 아까부터 자신을 마치 손바닥 위에 놓고 놀리는 것처럼 구는 그녀에게 자신은 그리 쉬운 남자가 아니며 그녀가 그럴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자신이 그녀를 ‘봐주기’에 가능한 일이라는 걸 넌지시 알려 주고 싶었다.

에드가는 유유히 미소 지었다. 대부분의 여성은 그가 그런 미소를 지으면 넋을 잃었으나 루비카는 바짝 긴장해 등을 곧추세웠다. 그러나 에드가는 루비카의 눈에 떠오른 감정을 놓치지 않았다. 그것은 아이가 맛있는 사탕을 보았을 때와 비슷한 감정이었다.

그는 갑작스레 루비카의 고개를 잡아 숨소리가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동공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은 적갈색 눈임에도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당신이 원하면?”

“무슨……?”

“당신이 내가 안아 주길 원하면 모른 척하지 않겠네.”

“이런 개 쓰레기야!”

아, 그러나 그 말은 해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루비카는 바로 에드가의 미모 때문에 걸린 마법에서 깨어났다. 루비카는 격분해 공작을 밀어 버렸다.

찰싹—.

순간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났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이해할 수 없어 에드가는 빨갛게 달아오른 뺨을 만지며 멍하니 루비카를 바라보았다.

“상대가 원해도 사랑하지 않으면 해선 안 되는 거야! 이, 이, 이…….”

붉으락푸르락해진 루비카는 참으려 했다. 자신의 입에서 튀어나오려는 소리를 필사적으로 막으려 했다. 그러나 하늘까지 터진 분노는 입을 다무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걸레 같은 놈아!”

루비카는 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마차 문밖으로 나가 ‘쾅!’ 하고 문을 닫았다. 마차 안에 남겨진 에드가는 한참 그 자리에 가만히 앉은 채로 방금까지 루비카가 앉아 있었던 의자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곧 그의 입에서 소리가 새어 나왔다. 자신에게 상상도 못할 무례를 저지른 루비카에 대한 분노가 흘러나옴이 당연한 일이었으나.

“하하하하하하하.”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웃음소리였다. 에드가는 무엇이 우스운지 배까지 잡고 웃다 그만 의자에서 굴러떨어졌다. 그것은 실로 그가 바라마지 않았던 대답이었다.

‘상대가 원해도 사랑하지 않으면 해선 안 된다.’

그 진리를 그의 아버지가 일찍이 깨달았다면 이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겠지. 웃고 있는 에드가의 눈가에 작은 눈물이 한 방울 맺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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