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9화
침묵이 흘렀다. 에드가는 표정 변화 없이 루비카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루비카는 자신의 얼굴이 그의 강렬한 눈빛에 녹아 없어져 버리는 줄 알았다. 그러나 이미 주사위를 던진 루비카는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에드가가 자신이 한 말을 그저 결혼을 피하고자 얼렁뚱땅 던진 말로 여기지 않기를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한참 후 에드가의 눈 아래에서 약간의 이채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는 잠깐 한숨을 쉬더니 턱을 괴고 질문했다.
“누구인가?”
“네?”
“적어도 나를 납득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사람인지는 설명해 줬으면 하네만, 셰리.”
셰리(Chéri, 사랑하는 사람), 연인 사이에서나 쓸 법한 말이었다.
루비카는 에드가가 자신을 우아하게 비난하고 있음을 깨닫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클레이모어 공작은 강한 권력과 부를 가진 남자였다. 그에게 아르망에 관해서 설명하면 어떤 일이 들이닥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루비카는 그가 설사 사실을 안다 해서 어떤 해코지를 끼칠 남자는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스테판에게 잡혀 자신이 베르너가의 물건을 도둑질해 달아나려는 하녀라고 오해했을 때도 공작은 즉결 처분을 내리기보다는 루비카의 사정을 들어 보려 했다.
여전히 밉고 혐오스러운—그의 아름다움을 떠올리자니 이런 수식어를 붙이기가 참 민망하지만— 남자였으나 원칙이 없는 자는 아닌 듯했다.
“아르망이라고 합니다.”
“흔한 이름이군. 어디에 살고 있지?”
담담히 다음 질문을 이어 가는 에드가 앞에서 루비카는 말문이 막혔다.
아르망, 전쟁이 터지기 전 그는 어느 나라 사람이었지? 루비카는 그에게 단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았다. 여러 나라 사람들이 섞여 살았던 휴의 수도원에서 그 질문은 금기에 가까웠다.
그러나 공작 앞에서 차마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이상하게 루비카는 그가 거짓말을 하면 바로 알아차리리란 예감이 들었다. 실제로 루비카는 거짓말하면 티가 잘 나긴 했다. 덕분에 스테판은 진실을 말하는 그녀의 말도 하나도 믿어 주지 않았다.
“모릅니다.”
“나이는?”
“……아마 25살 정도일 겁니다.”
“나와 비슷하군. 좋아, 신분은 어떻게 되나?”
“아마도 귀족입니다.”
에드가의 입가가 떨렸다. 루비카는 시선을 피하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아르망의 뛰어난 교육 수준을 떠올렸을 때 그가 일반적인 평민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설사 평민이었다 할지라도 그 정도의 지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준귀족 작위를 받고도 남았다.
루비카는 적어도 거짓말하고 있지 않으니 자신은 한 점 부끄럼 없다 여겼다.
“아마도, 아마도, 아마도. 아까부터 추측이군. 좋아,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내 피앙세. 그자의 키는 어떻게 되지? 머리카락 색은? 눈은? 영지는 가지고 있나? 학위는? 성은?”
루비카는 에드가의 연이은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입을 벌렸다 닫았다. 그리고 멍하니 공작을 바라보았다.
모른다.
루비카는 모른다. 하나도 모른다.
하얗게 머리가 세기 전의 아르망의 머리카락이 어떤 색인지, 눈을 멀기 전 그가 가진 눈동자는 어떤 식으로 빛났는지, 전쟁이 나기 전 어디에서 나고 자랐는지, 공부는 어디에서 했는지, 루비카는 하나도 몰랐다. 하나도 모른 채 그를 사랑했고 마음에 담았다.
에드가는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기 위해 질문했다.
“그와 지금 연락을 할 방법은 있나?”
결국 루비카의 적갈색 눈동자에서 눈물이 또르르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니요.”
“루비카.”
에드가는 자신의 얼굴을 가릴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눈물을 뚝뚝 흘리는 루비카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눈물을 닦아 주는 대신 양손으로 얼굴을 잡아 그녀의 떨리는 눈동자가 자신으로부터 도망치지 못하게끔 했다.
‘……차가워.’
루비카는 에드가의 시린 눈으로부터 퇴로가 차단당한 채 그리 생각했다.
차갑다.
뺨에 닿는 손가락의 촉감도, 그녀를 내려다보는 시선도, 그리고 살점을 도려내듯 퍼붓는 질문도 차갑기 이를 데 없었다. 루비카는 에드가에 대해서 다른 건 잘 몰랐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
“그는 당신을 사랑하나?”
그리고 에드가가 던진 질문은 루비카의 심장을 에고도 남았다.
“…….”
아르망. 아, 아르망. 그는 나를 사랑했나?
루비카는 확신할 수 없었다.
아르망은 항상 그녀의 곁에 있었다. 루비카가 힘들 때 외로울 때 곤란할 때 아르망은 말없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어깨를 토닥이며 힘을 북돋아 주었다. 눈이 보이지 않음에도 그는 루비카가 어떤 도움을 필요로 하는지 알았다. 그의 다정한 손길에 루비카는 종종 가슴이 뛰었고 내심 어떤 기대를 하게 되었다.
아, 하지만 그는 너무 친절한 사람이었다.
루비카는 수도원 생활을 하는 내내 자꾸만 뛰는 가슴에 헛된 희망을 품지 말라고 달랬다. 아르망, 그의 목에 걸린 푸른 반지를 보며 친절을 사랑으로 착각하지 말자고 몇 번이고 다짐했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한 친절이었을까?
아르망이 베푼 친절은 그저 단순한 동료에게 보이는 것 이상이었다. 그리고 분명 연인의 유품쯤 되었으리라 홀로 짐작했던 반지는 지금 루비카의 가슴에 차가운 감촉을 선사하고 있었다.
그래, 루비카는 확언할 수 없다. 아르망이 자신을 사랑했는지 안 했는지, 현재의 그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루비카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게 있었다. 루비카는 얼굴이 잡힌 채로 에드가를 똑바로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제가 그를 사랑한다는 게 중요해요.”
“헛소리 집어치워!”
순간 루비카는 에드가가 자신을 끌어당겨 키스할 줄 알았다. 그 정도의 격정이 그의 두 눈에 흘렀으니까. 그러나 에드가는 그러지 않았다. 대신 루비카를 집어삼킬 기세로 노려보았다.
“루비카 베르너, 거짓말을 하려면 좀 더 머리를 쓰는 게 좋겠군.”
에드가의 비아냥거림에 루비카는 거짓말을 들킨 사람이 으레 하듯 시선을 피하거나 뺨을 붉히는 등의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한 점 부끄럼이 없었다.
“거짓말이 아니에요.”
“날더러 믿으라고? 얼굴도 키도 신분도 정확히 모르고 어디에 있는지는 더더욱 모르는, 흔해 빠진 아르망이란 이름을 가진 남자를 사랑해 나와 결혼할 수 없다는 말을?”
“각하는 누군가를 가슴 시리도록 사랑해 본 적이 없나요?”
에드가의 새파란 눈에 서린 분노를 보는 순간 루비카는 자신이 그의 가장 건드려선 안 되는 무언가를 건드렸단 사실을 직감했다. 에드가는 루비카의 얼굴을 밀 듯이 놓아주었다. 그리고 괴로운 듯 시선을 피해 이마를 짚었다.
“내가 들어 본 말 중 가장 역겨운 말을 지껄이는군.”
“각하, 이제 제가 질문할 차례예요. 왜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제게 청혼하셨죠? 저야말로 그리 말하고 싶군요. 딱히 제가 아니어도 되잖아요.”
루비카는 숨을 몰아쉬며 질문에 박차를 가했다. 소심한 자신이 어떻게 공작을 상대로 이런 말을 내뱉을 수 있는지 스스로가 신기할 정도였다.
그러나 루비카의 말은 에드가의 귀에 닿지 않았다. 이마를 짚고 한참 생각에 빠진 에드가는 곧 감정이 갈무리가 되었는지 대리석 조각 같은 얼굴로 돌아와 루비카를 바라보았다.
“그대가 좋아하는 단어로 말해 주지. 그대를 사랑해서 그러네.”
“하.”
루비카의 입에서 미처 누르지 못한 웃음소리가 나왔다. 그러나 모든 감정을 의식 아래로 눌러 버리는 데 성공한 에드가의 표정에는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각하는 사랑을 믿지 않으세요. 아니, 오히려 역겨워하세요.”
“아니, 그대를 사랑하오.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고 말해도 결혼하고 싶을 정도로.”
“지금 저를…… 놀리시는 건가요? 제게 왜 거짓말을 하시는 거죠?”
“그대가 내게 거짓말로 일관했는데 나라고 못할 건 없지.”
루비카는 아니라고, 아르망에 대한 자신의 마음은 거짓이 하나도 없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동시에 에드가가 그 말을 절대 믿어 주지 않으리란 사실을 깨달았다.
첫 만남부터 잘못되었다.
비록 루비카는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고 해도 에드가는 충분히 루비카를 거짓말쟁이로 오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르망에 대한 것도 이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진실이라고 믿는 것보다 공작처럼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판단하는 쪽을 선택하리라.
“믿지 않으면 서로 부부가 될 수 없어요.”
“드디어 나와 결혼할 결심이 섰나 보군.”
루비카는 얄미울 정도로 아름다운 입술을 노려보았다.
“비꼬는 건 버릇이신가요? 아니면 특기이신 건가요?”
루비카의 말에 에드가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고집스러운 입매 안에 치열은 곧고 하얘서 붉은 입술과의 밸런스가 좋았다.
‘정신 차려!’
루비카는 또다시 그의 외모에 홀리려는 자신을 꾹 누르며 적의를 담아 에드가를 바라보았다.
“내게 그렇게 대놓고 말하는 건 당신이 처음인데…….”
“그 말이 버릇이신가 보군요.”
이상한 일이었다. 에드가의 입꼬리가 살짝 기분 좋게 실룩였다.
“동등하게 불만을 말할 수 있는 건 부부의 미덕이지.”
“서로 비꼬며 말싸움이나 하는 부부는 파국을 맞이할 뿐입니다.”
“나와 그렇게 결혼하기 싫나?”
“네.”
에드가는 자세를 바로 하고 루비카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베르너 저택 앞에서 스테판에게 붙잡힌 채 오들오들 떨고 있는 루비카를 보았을 때 그는 그녀가 퍽 심약해 보인다 판단했다. 설사 자신과 결혼하고 싶지 않다고 해도 어쩌랴.
이처럼 연약한 여인은 상황에 끌려 가족의 안전과 자신의 불행을 저울질하다 결국 그와의 결혼을 받아들이리라 여겼다. 그러나 마차 안에서 고작 십여 분 이야기한 것만으로 에드가는 루비카에 대해 오판했음을 인정했다.
그녀는 얼렁뚱땅 밀어붙인다고 넘어갈 타입이 아니었다. 베르너 부인이 하는 모양새로 보아 삼촌 일가의 안전을 인질로 루비카를 설득하기도 불가능해 보였다.
에드가는 영지와 수많은 사업체를 운영하는 경험을 십분 활용해 협상가다운 태도로 루비카를 대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쨌든 그는 그녀와 결혼할 생각이었다.
“국왕 전하의 특별허가증을 이미 받았네. 결혼하지 않으면 나도 그대도 함께 기만죄로 처벌받게 돼.”
루비카의 동공이 살짝 흔들렸다. 에드가는 그의 방식이 루비카에게 먹혀들고 있음을 확신했다.
“저는 수락한 적이 없으니 착오로 일어난 일임을 전하면 국왕 전하께서도 공작 각하를 벌하지 않으실 거예요.”
“대신 거짓말을 한 그대의 삼촌 일가와 전령은 처벌을 면할 수 없지. 전령은 아마 목숨을 잃게 되겠지.”
삼촌 일가로는 루비카를 설득할 수 없어도 죄 없는 사람을 끌어들였다는 죄책감과 양심으로는 그녀를 설득할 수 있었다.
“그건, 그건 너무 잔인해요. 그분은 삼촌에게 속았을 뿐이에요.”
“전령은 그대를 직접 대면해 의사를 묻지 않은 죄를 피할 수 없네.”
“하지만…… 그럼 애초에 청혼의 예에 따라 공작 각하께서 왜 직접 오지 않으셨나요? 그럼 이런 일을 피할 수 있었을 텐데…….”
“바빴네.”
에드가는 루비카의 질문을 딱 잘라 끊어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