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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8화 (8/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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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8화

공작은 아까와 달리 눈가에 노기가 가득한 얼굴로 루비카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마치 대리석 조각 같았던 얼굴보다 그 표정이 생기가 있어 차라리 더 보기 좋다고 생각했다.

“공작 부인이 될 생각이 없다. 그게 무슨 말이지? 나와의 결혼을 원하지 않는다는 소리인가?”

“네.”

마음속의 불안을 필사적으로 잠재우며 루비카는 담백하니 대답했다. 곧 노기는 분노로 변했다. 클레이모어 공작은 거절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분노로 부들부들 떨며 루비카를 내려다보다 손을 들었다.

설마 때리려는 건가?

루비카는 반사적으로 눈을 꾹 감고 손을 올려 얼굴을 가렸다. 그러나 눈이 번쩍 뜨이는 아픔은 한참이 지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당황한 루비카가 슬며시 눈을 떠 손가락 사이로 공작을 봤다. 공작은 할 말을 잊은 듯 아연한 표정으로 루비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가 든 손은 뺨을 때리기 위한 것이 아닌 사용인을 부르는 모양새였다. 루비카와 눈이 마주치자 정신이 든 듯 공작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칼.”

낮은 음성이었으나 그것으로 충분했다. 집사로 보이는 노인이 즉시 그의 곁으로 왔다.

“전령은?”

“죄송합니다. 각하, 그는 지금 없습니다.”

“그자의 말에 의하면 루비카 베르너 양은 이 결혼을 수락했다고 들었는 데.”

“……착오가 있었나 봅니다.”

집사 칼이 고개를 숙였다. 분위기는 마치 살얼음이 낀 듯했다. 하나 루비카는 이 와중에 희망을 품었다. 오가는 이야기를 보았을 때 클레이모어 공작은 분명 자신이 청혼을 수락한 줄 알고 있는 듯했다.

그에게 자세한 사정을 말하면 청혼을 철회하지 않을까?

비록 남자의 얼굴이 아름다운 것과 별개로 피도 눈물도 없이 비정해 보였으나 루비카는 용기를 내어 입을 떼려 했다.

“세상에, 루비카!”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보다 베르너 부인이 루비카를 발견하는 게 더 빨랐다. 사라진 루비카를 찾기 위해 직접 하인들을 대동하고 대문 밖으로 나선 베르너 부인은 문 앞에 있는 루비카를 발견하자마자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가 그녀의 머리채부터 잡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런 베르너 부인의 자비 없는 손은 루비카의 머리채를 비켜 나갔다.

“무슨 짓입니까?”

루비카 옆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던 스테판이 재빨리 일어나 베르너 부인의 손을 꽉 잡았다. 깜짝 놀란 베르너 부인의 눈에 그제야 화려한 마석마차가 들어왔다.

문장은 어디서 많이 본 듯하지만 언뜻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녀의 손을 꽉 잡은 남자도 비록 얼굴을 가리고 있었으나 품새가 예사롭지 않다. 베르너 부인은 즉시 무언가 일이 잘못 흘러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고위 귀족이 하필이면 베르너가를 지나가던 중이었나? 베르너 부인은 혹 자신이 루비카의 머리채를 잡았다는 사실이 소문 나 클레이모어 공작의 귀에 들어갈까 두려웠다.

“아, 저. 그게, 제가 너무 걱정되고 놀라서 그만.”

“상인은 걱정되고 놀라면 사람의 머리채를 먼저 잡고 보는 게 예의인가 보군.”

힐난 섞인 어투에 베르너 부인은 얼굴에 열이 확 뻗쳤다. 그녀는 그런 무례한 말을 한 작자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베르너 부인은 일단 그가 미남자란 사실을 확인했다. 그러나 그것은 루비카와 달리 베르너 부인에게 어떠한 감동도 가져다주지 못했다. 베르너 부인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그가 입고 있는 옷이었다.

베르너 부인은 영지 수입만으로 살 수 있는 귀족이 아니었으나 무역상의 아내이기에 이 세상의 온갖 귀한 것을 보았다. 그가 입고 있는 것은 값을 따지기 어려울 정도로 비싼 견직물이었다. 소매에 달린 단추는 그녀가 장님이 아닌 이상 다이아몬드가 틀림없었다.

“머리채를 잡을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나리.”

에드가는 자신이 입은 옷을 확인하자마자 비굴하게 고개를 숙인 여인의 모습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실망스럽지도 혐오스럽지도 않았다.

그에게 그런 광경은 일상 중의 하나였다. 다만 자신의 신분을 모르는 상태라 할지라도 숙녀로 불릴 만한 여성이 자신을 ‘경’ 이 아니라 ‘나리’라고 호칭한 게 신경 쓰였다.

고개 숙인 여인에게 이를 알려 줄까 하다 자신을 보는 루비카의 눈매가 매서워 그만두었다. 루비카는 그가 달려드는 여인의 행태를 비꼰 뒤부터 명백히 비난을 담은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무례하긴 했지. 직업을 얕잡아 비꼬았으니.’

하지만 흥미로웠다. 여태 그가 만난 모든 사람은 그가 다소 무례한 행동을 한다 해도 지적하지 않았다. 오히려 클레이모어 공작이라면 응당 그래야 한다는 듯 웃는 낯으로 그를 대했다.

그러나 루비카는 달랐다. 심지어 그의 청혼을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건 정말 의외였다. 그는 여태 자신과 결혼하고 싶어 안달 난 여자밖에 만나 보지 못했다.

그리고 그는 이 사실을 확인해야 했다. 그는 베르너 저택에 다녀온 전령으로부터 분명 루비카가 결혼을 ‘수락’했고 그녀의 보호자인 삼촌 내외가 이 일을 ‘허락’했다 들었다. 그러나 실제로 만난 루비카는 결혼을 원하지 않았다.

‘원하지 않아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테지만.’

에드가는 자신 앞에 고개 숙인 나이 든 여인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그가 입수한 루비카의 신상 명세에 따르면 여인은 베르너 부인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에드가는 루비카의 앞에서 괜히 그녀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음을 드러내 봤자 좋을 게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부인, 성함을 밝히시오.”

“아이린 베르너입니다. 나리, 저 애는 저희가 맡아 기르고 있는 질녀입니다. 잠시 아이가 잘못된 생각을 하고 가출해 찾는 와중에……. 제가 그만, 너무 걱정이 되어 이성을 잃었습니다.”

베르너 부인은 손님을 구슬릴 때 종종 사용했던 특유의 화법으로 이 일을 넘어갈 속셈이었다. 다른 때였다면 에드가도 그 뻔히 보이는 속내를 알면서도 넘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방금 그의 약혼녀로부터 ‘결혼을 원하지 않는다.’라는 소리를 들었다. 에드가는 그것이 무척 거슬렸다.

그는 이미 국왕의 특별허가증을 받았다. 망신당하고 싶지도 않았고 제 질녀 하나 제대로 설득하지 못한 베르너 부인의 꼴도 보기 싫었다.

“내 약혼녀는 가출한다고 머리채가 잡히기에도, 맡아 기른다는 표현하기에도 적절하지 않은 나이로 알고 있네만.”

베르너 부인의 눈이 떨렸다. 그녀는 그제야 제 앞에 있는 이 귀공자의 정체를 눈치챘다.

“나리, 아, 각, 각하!”

베르너 부인이 황급히 몸을 숙여 클레이모어 공작의 발을 잡으려 했다. 그러나 더러운 것에 몸이 닿고 싶지 않았던 공작은 슬그머니 발을 빼 버렸다. 스테판 또한 베르너 부인이 공작을 붙잡게 둘 생각이 없었다. 그는 달려 들려는 베르너 부인을 잡은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제, 제가 설명드리겠습니다.”

“그쪽 설명은 필요 없네.”

루비카는 소란을 떠는 숙모 쪽은 쳐다도 보지 않고 곧장 제게 다가와 손을 내미는 남자를 보았다.

“이 자리에 내게 설명을 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 건 내 약혼녀뿐이니까.”

‘아, 눈이 정말 시린 바다 같아.’

입가에 차가운 미소를 띤 남자를 올려다보며 루비카는 그리 생각했다. 그녀는 공작의 아름다운 푸른 눈에 홀려 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리고야 말았다.

그러자 차가운 미소가 아주 조금 따뜻하게 변했다.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기도 전 공작은 루비카의 손을 꾹 잡더니 그녀를 그대로 이끌어 마차 안으로 에스코트했다.

마차 안은 귀족의 방 그 자체였다.

말이 모는 승합마차와 달리 마석의 힘으로 이동하는 마차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바닥에 폭신한 양털 대신 카펫이 깔려 있었고 안에는 심지어 테이블과 의자가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공작이 바로 전까지 보고 있었던 것 같은 서류가 놓여 있었다. 집사는 재빨리 서류를 치우고 루비카를 반대편 의자에 앉혔다.

“각하, 저는 밖에 나가서 상황을 정리하겠습니다.”

“……여기까지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조용히 처리해.”

정신이 번쩍 들 만큼 차가운 목소리였다. 루비카는 그가 말한 처리와 칼이 말한 정리라는 게 무엇인지 궁금한 동시에 알고 싶지 않아졌다. 집사는 가볍게 묵례한 후 마차 문을 닫고 나갔다.

아무리 승합마차보다 넓고 좋아도 마차는 마차. 루비카는 밀실 같은 공간에 아름다운 남자와 마주 보고 단둘이 남겨졌다는 사실이 불편했다. 그녀는 차마 공작과 눈을 마주칠 자신이 없어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자 공작의 긴 손가락이 눈에 들어왔다.

‘보통 사람 손가락의 1.5배 정도 되는 길이려나? 아, 손톱도 가지런해. 정리한 건가? 피부도 대리석처럼 맑고 고와.’

저 손가락에 어떤 보석이 어울릴까? 의외로 금붙이처럼 따뜻한 반지는 어울리지 않을 듯했다.

루비처럼 따뜻한 보석은 쥐약이다. 그의 손에는 차가운 보석이 어울렸다. 이를테면 사파이어 같은……. 아냐, 이처럼 아름다운 손은 화려한 반지로 치장하는 것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더 돋보일 거야.

예쁜 여자아이를 보며 이런 생각을 종종 한 적은 있어도 남자는 처음이었다. 루비카는 문득 클레이모어 공작의 손을 만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도 모르게 떠오른 망측한 생각에 얼굴이 붉어질 무렵 공작의 손이 갑작스럽게 움직이더니 루비카의 고개를 잡아 들어 올렸다.

“눈도 마주치기 싫은 건가?”

루비카가 자신의 손을 가지고 어떤 상상의 나래를 펼쳤는지 모르는 그의 목소리는 무척 거칠었다. 그러나 루비카의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뺨을 본 에드가는 깜짝 놀라 그만 고개를 잡은 손을 놓치고 말았다.

“어색해서 그랬습니다, 각하.”

“……에드가라고 부르게.”

“그런. 각하, 제게 그럴 자격은 없습니다.”

“그대는 충분히 그래도 돼.”

에드가는 테이블 서랍 아래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더니 그것을 루비카에게 내밀었다. 왕실의 인장이 찍힌 봉투였다.

봉투를 받아 든 루비카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열어 볼 필요도 없었다. 그 안에는 분명 국왕의 특별허가증이 있으리라.

루비카는 받아 든 봉투를 그냥 책상 위에 던지듯 올려놓았다. 아직 봉투를 뜯지 않았다. 열어 보지 않았다. 그렇다면 국왕 전하께 착오가 있었음을 전하고 무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대로한 국왕은 루비카를 귀족 명부에서 제하라는 벌을 내릴 수 있지만 루비카는 그래도 상관없었다. 그녀에게 귀족 신분이란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했다.

“각하,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에드가.”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를 루비카는 정면에서 똑바로 바라보았다. 두려움에 가슴이 꾹꾹 뛰어올랐다.

이처럼 대단하고 신분이 높은 남자에게 정면으로 맞서려 하는 자신이 믿어지지 않았다.

‘……아르망.’

하지만 사랑하는 남자의 이름을 떠올리자 이상하게 힘이 났다. 루비카는 그를 떠올리자 심장이 다르게 뜀을 느꼈다. 눈앞의 남자가 아무리 아름답고 대단하다 할지라도 루비카가 사랑하는 건 아르망이었다.

그래, 공작에게도 제대로 설명하는 게 낫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여자를 부인으로 들이다니, 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루비카는 두 손을 꼭 쥐고 단호히 에드가에게 말했다.

“저는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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