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7화
큰 소리를 내면 베르너 저택에 들릴까 루비카는 조용히 남자에게 간청했다. 그러나 남자는 꿈쩍하지 않았다. 힘이 어찌나 센지 그저 팔목을 잡혔을 뿐인데 루비카는 그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결국 루비카는 평소의 신념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동생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나오던 중이었어요.”
거짓말은 큰 죄악이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일단 가장 무난한 변명을 대었다.
“몰래 담을 넘어서 말인가?”
그러나 남자는 루비카의 말에 넘어가 줄 생각이 없는 듯 빈정거렸다.
“내일 클레이모어 공작 각하를 맞이할 준비 때문에 일손이 모자라서 도저히 절 보내 줄 분위기가 아니었어요. 하지만 제가 지금 가지 않으면…… 동생이 어떻게 될지 모른단 말이에요.”
루비카는 술술 거짓말을 내뱉는 자신의 입에 놀랐다. 꽤나 그럴듯한 말이었다. 남자 또한 속아 넘어갈 마음이 생겼는지 밝은 갈색 눈으로 루비카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루비카는 남자를 설득할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에 그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 바라보았다.
‘……어머, 그러고 보니?’
얼굴 아래는 복면으로 가리고 있었으나 제법 오뚝한 코였다. 눈썹뼈 아래 푹 들어간 눈은 쌍꺼풀이 옅게 져서 제법 우수 어려 보였다. 거기에 밝은 갈색 눈은 동자에 가까워질수록 오묘한 푸른빛이 돌아 묘한 느낌을 주었다.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만들어 낸 그림자는 또 어떠한가!
‘잘생겼다.’
루비카는 남자를 속여야 한다는 본래의 목적도 잊고 그만 홀린 듯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얼빠진 모습에 결국 남자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속이려면 좀 더 성의를 가지고 긴장 풀지 말고 속이시지.”
그리고 그는 루비카가 든 가죽 가방을 거칠게 뺏었다.
“하녀가 들기에는 지나치게 좋은 가방이야.”
그는 가차 없이 가방을 열어 안의 내용물을 바닥에 던졌다. 안에 든 낡은 옷가지들이 쏟아졌다. 사내는 그 안에서 자신이 찾아야 할 물건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떨어지는 물건 속에서 곱게 포장된 천을 휙 잡아 재빨리 펼쳤다. 그러자 루비 장신구와 은화 몇 개가 그의 손에 떨어졌다.
“도둑질까지 하다니 정말 뻔뻔스럽군. 이건 누구의 장신구지? 설마 공작 부인이 될 분의 것이냐?”
남자가 루비 장신구를 위협하듯 루비카의 앞에 들이댔다. 남자의 말이 맞긴 하다. 문제는 공작 부인이 될 예정이라는 게 바로 루비카라는 거지만.
하지만 말한다고 해서 이 남자가 믿어 줄까. 루비카는 너무 허름한 옷을 입고 있었다. 실제로 아까 남자에게 루비카 베르너라고 자신의 정체를 밝히려 했을 때 그는 벌컥 화를 냈었다. 루비카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저 멀리서 어떤 불빛이 베르너 저택을 향해 다가왔다.
불빛이 점점 가까워지자 루비카를 잡고 있던 남자가 긴장하더니 몸을 쭉 폈다. 마치 군인이 상관을 기다리는 듯한 자세에 루비카도 깜짝 놀라 그가 보고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차? 말이 없어. 마석을 사용한 건가?’
다그락거리는 말발굽 소리도, 히이이잉 우는 소리도 없이 양쪽에 밝은 램프를 단 화려한 마차가 베르너가 저택을 향해 오고 있었다. 마석을 이용한 마차는 어지간한 귀족은 꿈도 꾸지 못할 사치스러운 물건이었다. 게다가 저택을 향해 오고 있는 마석마차는 하나가 아니라 못해도 셋은 되어 보였다.
저 정도 급의 재력을 뽐내려면 후작 이상은 되어야 했다. 일순 불길한 예감이 루비카를 덮쳤다. 그녀가 제발 자신의 예감이 현실이 아니길 바라고 있을 때 남자가 옆에서 쐐기를 박았다.
“네 처분은 각하께 맡기지.”
베르너 저택을 향해 오는 마차의 문에는 도끼를 든 검은 독수리가 그려져 있었다. 루비카의 기억이 맞는다면 그것은 클레이모어 공작가의 문장이었다.
놀란 루비카가 눈을 두 번 깜빡거리기도 전에 마차는 소리 없이 베르너 저택 정문에 도착했다. 남자는 루비카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손을
꾹 잡은 상태에서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공작 각하, 스테판입니다. 각하께서 베르너가에 도착하기 전 수상한 사람은 없는지 저택 주위를 수색하던 중 베르너가의 보물을 가지고 달아나려던 하녀를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스테판이 루비카의 어깨를 꾹 눌렀다. 그 강한 힘에 루비카는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처분을 내려 주십시오.”
백작 이상의 귀족은 평민에 대한 즉결 심판권을 가지고 있다. 루비카는 평민이 아닌 말급 귀족이었으나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은 지나치리만큼 남루했다.
‘주인의 물건을 훔쳐 달아나는 사용인에 대한 처벌은…… 그래, 손목을 자르는 거야.’
세리토스 왕국은 엄격한 법치 국가였다. 법도 주변국보다 엄중하기 이를 데 없었다. 루비카는 애처로이 제 손목을 보았다. 클레이모어 공작이 자비로이 하녀의 사정을 들어 본 다음에 결정하리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가 마차 너머에서 형을 명하면 옆에 있는 스테판이 바로 허리춤의 칼로 그녀의 손목을 자를 것만 같았다. 자꾸 생각이 나쁜 쪽으로만 뻗어갔다.
‘손목을 자르면 양심이 있는 한 내게 결혼해 달란 소리를 안 할 거야.’
긴박한 상황에 눌린 루비카는 상대가 손을 자른 대가로 평생 책임을 지겠다고 말하는 선택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저 끔찍한 공작에게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팔 하나쯤은 기꺼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루비카는 고통을 감당하기 위해 눈을 꼬옥 감았다.
철컥.
그러나 루비카의 귀를 두드린 것은 형 집행을 명하는 공작의 차가운 목소리가 아닌 마차 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곧이어 열린 마차 문에서 한 남자가 내려 루비카 앞으로 걸어왔다. 곧 스테판이 그에게 장신구를 보여 주며 구체적인 설명을 시작했다.
루비카는 더욱 겁이 나 몸을 움츠리고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팔이 잘리는 걸 바로 곁에서 지켜보려는 건가?’
사디스트! 공작에 대한 루비카의 평이 더욱 바닥을 향해 처박혔다. 그녀가 두려움에 오들오들 떨 때 머리 위에 떨어진 것은 뜻밖의 질문이었다.
“무슨 연유로 달아나려 했는가?”
루비카의 감긴 눈이 번쩍 뜨여졌다. 목소리는 전혀 다정하지 않았다. 차갑기 이를 데 없었다. 질문하는 어투 또한 지극히 사무적이었다.
“주인의 물건을 훔치려 한 합당한 이유를 대라.”
관청도 이런 일이 벌어지면 죄인의 사정을 묻지 않고 처리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공작은 루비카에게 이유를 물었다. 루비카는 공작이 상상했던 것보다 최악이 아닌 것에 안도했다.
‘정직의 신 에르네 님, 거짓말을 하려는 걸 부디 용서해 주세요. 하지만 제가 달아날 기회는 이번밖에 없어요. 거짓말의 신 키르네 님, 부디 저를 도와주세요.’
루비카는 침으로 입술을 적시고 제 앞에 선 클레어모어 공작, 에드가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눈앞의 남자를 본 루비카의 동공이 커졌다.
밤하늘을 뚝 베어다가 만든 것처럼 윤기 나는 검은 머릿결, 대리석같이 하얀 피부, 그리고 그 검은 머리칼 아래에는 대조적인 푸른 눈이 마치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날렵한 턱 위에 꽉 다물린 입술은 그의 얼굴에 약간 신경질적이고 섬세한 기운을 잉태하게 했다. 큰 키에 적당히 말라 군살 없는 근육을 가진 몸은 피복 너머로도 남성적인 미를 충분히 어필하고 있었다. 아까 잘생겼다 느낀 스테판이 그의 옆에 서자 물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못생긴 물고기처럼 보였다.
단언컨대, 루비카는 이처럼 잘생긴 남자를 이전에도 보지 못했고 앞으로도 보지 못할 것이다.
“아!”
루비카는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걸 느꼈다. 빌어먹을, 못된 버릇이 또 나왔다. 제발 이 고장 난 듯 뛰는 심장이 멈추길 바라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루비카, 얌전하고 상냥하며 제자리에서 항상 자신이 할 일을 하는 차분한 여인.
그것이 루비카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들었던 평이었다. 그러나 루비카에게 그런 평과 어울리지 않는 혼자만의 비밀이 있었으니……. 그건 루비카가 아름다운 것을 지독히도 좋아한다는 거였다.
아니, 아름다움에 대한 루비카의 열정은 단순히 좋아한다는 말로 표현하기에 무리가 있을 정도였다.
루비카는 안젤라가 아무리 자신을 구박해도 그 애의 풍성하고 아름다운 머릿결을 만지는 순간 모든 고통을 잊었다. 그 정도로 아름다움을 사랑했다. 그녀는 그저 눈앞에 보이는 아름다움만 좇는 수준을 뛰어넘어 추함 속에 담긴 아름다움도 꿰뚫어 보았으며 지금은 평범하고 깡마른 소녀가 나중에 얼마나 눈부신 미녀가 될지도 바로 눈치챌 수 있는 심미안의 소유자였다.
그 열정과 버릇은 루비카가 일흔이 되는 해까지 떠나지 않았다.
루비카는 아름다운 사람, 젊고 잘생긴 남자를 보면 자동으로 심장이 뛰었다. 그래서 아르망은 루비카에게 더욱 특별했다. 그는 과거의 아름다움 따위 아주 오래전에 잃어버린 나이 든 남자였으나 루비카는 그를 보면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 심장 고동 소리가 아름다운 사람을 볼 때와는 조금 다르다는 사실을 루비카는 그를 좋아하게 된 후 1여 년 정도가 흘렀을 때 겨우 깨달았다. 그전까지 자신은 남에게 쉬이 반하는 사람이라 여겼으나 아르망을 사랑하고 난 다음 그것이 단순히 아름다움에 대한 자동반사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지금 그 자동반사가 발동되었다. 루비카는 붉어지는 얼굴을 숨기기 위해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멈춰, 제발 멈춰! 이러면 저쪽이 오해하잖아.’
루비카는 공작이 자신이 그에게 반한 것으로 오해할까 두려웠다. 실제로 옆에서 루비카를 보는 스테판의 시선이 미묘해졌다. 마차 옆에 달린 환한 마석 램프는 일반적으로 쓰는 양초와 달리 마치 햇살처럼 밝아 어둠도 루비카의 얼굴을 숨겨 주지 못했다.
“변명의 여지도 없는가 보군.”
공작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루비카는 다행히 공작이 자신의 태도에 관심 없는 듯해 안도했다.
아니, 안도할 때가 아니지. 두근거리는 심장에 당황해 채 변명의 말을 쏟아 내지 못한 걸 깨달은 루비카가 다시금 고개를 들 때였다.
“루비카! 루비카!”
“루비카 아가씨, 어디 계세요?”
그제야 루비카의 부재를 깨달은 듯 그녀를 애타게 부르는 목소리가 베르너 저택에서 들렸다. 공작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루비카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맑은 푸른 눈동자가 루비카를 머리 위에서 발끝까지 한차례 쓸고 지나갔다.
눈이 마주치는 것만으로 심장이 멎을 만큼 아름다운 눈이었다.
“갈색 머리, 적갈색 눈. 루비카 베르너, 그대인가?”
청혼한 여인을 향한 애정은커녕 다정함 하나 없이 차가운 음성. 그러나 루비카는 이제 더는 아니라고 주장할 수 없었다.
“……네.”
스테판의 얼굴이 대번에 푸르죽죽하게 변했다. 그는 즉시 루비카 옆에 무릎을 꿇었다.
“각하, 공작 부인이 되실 분을 못 알아본 저를 벌하소서!”
“네가 사과할 사람은 내가 아닌 이쪽이다.”
공작은 스테판 쪽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고 루비카에게 얼굴을 고정한 채 차갑게 일갈했다. ‘이쪽.’ 차가운 호칭에 루비카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공작은 아름다운 남자지만 표정은 마치 대리석 조각처럼 차갑고 무뚝뚝했다. 그녀는 자신을 꼼꼼히 뜯어보는 그의 얼굴에서 어떤 감정도 찾아낼 수 없었다.
“무례를 사죄합니다.”
공작을 더 볼 자신이 사라진 루비카는 얼굴이 바닥에 닿도록 사죄하는 스테판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저는 공작 부인이 될 생각이 없으니 사죄하실 필요는 없…….”
루비카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공작이 그녀의 고개를 잡아 들어 올렸다. 루비카는 고개에 힘을 주어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 싶었으나, 희고 긴 손가락은 보이는 것보다 힘이 억세 그럴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