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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6화 (6/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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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6화

루비카는 눈물로 얼룩진 안젤라를 보았다. 안젤라는 지금 어이없는 항의를 루비카에게 하고 있었다. 그러나 루비카는 그런 안젤라를 보고 화가 나기는커녕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젤라는 귀여운 인형이었다. 마틴 삼촌과 숙모는 안젤라를 그냥 귀여워만 했지 결코 예절 같은 교육을 해 주지 않았다. 반면에 아카데미에 가 있는 아이작이 공부하는 데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매해 아이작의 우수한 성적표가 날아올 때마다 기뻐하며 실습비라는 명목으로 돈을 부쳤다.

—아이작은 아카데미에서 학위를 따서 못해도 남작 정도는 수여받을 거야.

—그럼, 안젤라 너랑 결혼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줄을 설 거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2년 뒤 아이작은 노름판에서 시비가 걸려 죽는다. 그의 시체는 그간 남몰래 즐긴 불법 약물 때문에 시퍼런 보라색이었다고 한다.

‘……성적도 다 가짜였지. 그동안 필요하다고 말했던 실습비, 실험비, 책값도 모두 유흥비가 모자라 생각해 낸 거짓말이었어.’

루비카는 기본적으로 마음이 모질지 못한 사람이었다. 지금 제 앞에서 잘난 척을 하는 숙모나 안젤라가 이윽고 받게 될 소식에 상심했던 모습을 생각하니 차마 매섭게 대할 수 없었다.

루비카는 대신 상냥하게 웃었다. 미소 앞에 장사 없다지 않은가.

“내가 언제 네가 내 동생이 아니라고 했니? 안젤라, 누가 네 어머니에 대해 나쁘게 말하면 넌 가만히 있을 거니?”

“아, 아니.”

“그리고 숙모가 아프면 넌 돈을 아껴 치료하지 않을 거니? 아님, 네가 지금 신은 스타킹이라도 팔아서 치료비를 마련할 거니?”

루비카의 말에 안젤라는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련할 거야.”

“나도 그랬던 거야, 안젤라.”

안젤라가 한풀 꺾여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오늘 아침 열심히 공들인 머리에 팔랑이는 황금빛 매듭이 눈에 들어왔다. 안젤라의 성격상 핀으로 간신히 고정한 매듭은 쉬이 풀리기 일쑤였다. 그러나 오늘 매듭은 튼튼히 그녀의 머리카락에 달려 있었다.

‘꽤 마음에 들었나 봐. 뛰는 것도 참다니…….’

문득 루비카는 안젤라가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버릇없긴 하지만 그게 안젤라의 잘못만은 아니잖아. 루비카는 자신의 옆, 침대 빈 곳을 툭툭 쳤다. 안젤라는 기다렸다는 듯 싱긋 웃으며 루비카의 옆에 앉았다. 어쨌든 귀여운 소녀다.

루비카는 최대한 부드럽게 화제를 전환했다.

“청혼하신 분은 클레이모어 공작 각하야.”

“알아, 나는 꿈도 못 꿀 자리라고 엄마가 화냈어. 대신 루비카가 공작 부인이 되면 난 후작이라도 소개받을 수 있을 거라 그랬어.”

안젤라에게 그리 말했다고? 루비카는 자꾸 싸늘해지려는 눈을 필사적으로 다정하게 만들어 안젤라는 바라봤다.

“그런 대단한 사람이 대체 왜 루비카에게 청혼한 거야? 루비카는 지참금도 없는데!”

“그래, 안젤라. 나도 궁금해. 심지어 그 사람이 사비까지 턴다는구나.”

무심한 루비카의 대답에 안젤라의 입가가 부들부들 떨렸다. 그 아이는 곧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은 얼굴로 루비카에게 질문했다.

“……결혼할 거야? 결혼해서 떠날 거야? 이 집을?”

결혼은 추호도 할 생각이 없었지만 몰래 떠날 계획이긴 했다. 루비카는 안젤라에게 진실 그대로 말하기보다 모호하게 표현하기로 했다.

“아마도 떠나겠지.”

그러자 비췻빛 눈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안젤라는 눈물이 고였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루비카는 들썩거리는 안젤라의 어깨를 황망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안젤라가 대체 왜 이러는지 그녀로선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이거.”

겨우 진정이 된 안젤라가 주머니 안쪽에서 꾸깃꾸깃 접은 손수건을 꺼내 루비카에게 건넸다. 루비카가 손수건을 펼치자 그 안에 루비가 달린 예쁜 귀걸이와 반지, 그리고 목걸이가 나왔다. 오래전 안젤라가 달라고 해서 줬던, 돌아가신 어머니의 유품이었다.

“……이건.”

목소리가 절로 잠겼다. 십 년 만에 다시 보게 된 어머니의 유품. 루비카는 그 아름다운 장신구 세트를 한 어머니의 모습을 바로 어제처럼 떠올릴 수 있었다.

“언니가 시집가면 주려고 내가 맡아 놨던 거야.”

루비카는 당장 유품을 주지 않으면 종일 울 것처럼 굴던 과거의 안젤라를 떠올리며 제 앞에서 변명하듯 떠듬떠듬 말하고 있는 안젤라를 보았다.

“엄, 엄마는 언니 물건을 자꾸 가져가서 팔아 버리니까.”

루비카는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 안젤라를 꼭 껴안았다. 말로 할 수 없는 감정이 차올랐다.

“안젤라, 너는 정말 착한 아이야.”

인형처럼 귀여워만 할 뿐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는 부모를 만나 비록 행동이 다소 거칠고 배려심이 없었으나 적어도 안젤라의 속마음만은 이 집의 다른 누구보다 따뜻했다.

“그, 그럼. 당연하지.”

루비카의 칭찬에 안젤라는 어색해 어쩔 줄 몰라 헤매더니 입을 삐죽였다.

“오늘 아침도 그 반지, 혹시 엄마한테 뺏길까 봐 내가 대신 맡아 주려고 했던 거라고.”

그리고 잠시 망설이더니 작은 은제 브로치 하나를 루비카에게 내밀었다.

“결혼 축하해, 언니.”

루비카는 잠시 안젤라에게 클레이모어 공작과 결혼할 생각이 없음을 알릴까 고민했다. 그러나 이 어린아이에게까지 그런 고민을 떠넘길 필요가 없다 여겼다.

“고마워, 안젤라.”

루비카는 안젤라를 향해 씁쓸히 웃었다. 루비카의 대답에 안젤라의 얼굴도 환해졌다. 안젤라는 잠시 고민하더니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언니, 결혼하고 나서도 가끔은…… 놀러 올 거지?”

“……글쎄.”

“있지, 언니.”

루비카의 옷자락을 잡고 안젤라는 망설이고 망설이다 숨을 ‘흡’ 뱉으며 말했다.

“언니가 떠나면 누가 날 혼내지?”

“……안젤라.”

“언니가 떠나면 누가 내게 책을 읽어 줘?”

루비카는 눈물이 치미는 걸 참았다. 이 버릇없지만 착한 사촌 동생은 사실 누가 자신을 진심으로 아끼는지 잘 알고 있었다.

* * *

기다리던 밤이 되었다. 루비카는 잠옷 대신 허름한 회색 외출복을 입었다. 그녀는 아르망의 반지를 옷 속에 착용한 뒤 회색 모자 안에 숱 많은 다갈색 머리를 숨겼다. 날이 밝으면 모자 위에 검은 베일을 올려 얼굴을 가릴 생각이었다.

가방에는 간단한 옷가지와 돈이 될 만한 것만 넣었다. 엄마의 유품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안젤라가 준 은제 브로치는 챙겨 넣을까 하다 그만두었다. 다른 거면 몰라도 그걸 팔아치울 마음이 영 생기지 않아 안젤라 앞으로 짧은 편지를 써서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

루비카는 침대 시트를 찢어 1층으로 충분히 내려가고도 남을 만한 끈을 만들었다. 그리고 기둥에 끈을 묶은 다음 창문 밖으로 던졌다.

“좋아, 밑은 잔디니 살짝 떨어져도 다치지 않을 거야.”

심호흡했다.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다. 루비카는 이보다 더한 사지에서 살아남았다. 포탄을 피하고자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3층 높이에서 뛰어내린 적도 있었다. 지금은 그녀가 의지할 든든한 끈도 있으니 이 정도쯤은 식은 죽 먹기지. 루비카는 마지막으로 구두에 이상은 없는지 발을 톡톡 털어 점검한 다음에 가방을 들었다.

아직 험한 일을 많이 하지 못한 젊은 시절이라 악력은 그다지 세지 않지만 1층으로 내려갈 때까지는 어떻게 손이 버텨 줄 듯싶었다. 가방을 왼쪽 팔에 끼우고 루비카는 두 손으로 끈을 잡고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다행히 베르너가는 하인들마저 오늘 있었던 루비카의 결혼 소식 때문에 술을 마시며 떠들썩해 루비카가 몰래 탈출 중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정문으로 나가면 무조건 들킬 거고 뒷문은 만찬 준비니 뭐니 때문에 한참 물건을 받는 중일 거야.’

루비카는 어쩔 수 없이 숙녀로서 다소, 아니, 많이 채신머리가 없지만 담을 넘기로 마음먹었다. 베르너가의 담은 크게 높지 않아 못할 것도 없었다. 다행히 루비카는 발돋움으로 적당한 나무 상자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었다. 먼저 가방을 담 너머로 휙 던졌다.

그다음은 루비카 차례였다.

루비카는 감자를 보관하는 데 쓰는 상자를 디딤판으로 삼아 담을 넘었다. 착지를 잘못해 루비카는 철퍼덕 넘어졌다. 다행히 잔디밭 쪽이라 무릎만 조금 까진 게 다였다.

루비카는 옷에 묻은 먼지를 털고 일어났다. 상쾌한 밤공기가 루비카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짜릿한 흥분이 루비카를 지배했다. 스물두 살로 돌아와 베르너가에 있었던 시간은 하루가 채 되지 않았으나 루비카는 지긋지긋했다.

‘어디로 갈까? 일단 돈을 벌려면 수도에 가는 게 나으려나? 하녀 일이라도 해서 3년 정도 악착같이 돈을 모은 다음에 남쪽으로 도망가야 해. 거긴 마물이 많지만…… 돈을 모으면 어떻게 방어구 정도는 구할 수 있을 거야. 그동안 안젤라에게 도망치란 편지를 보내자.’

루비카는 앞으로의 계획을 짧게 세운 뒤 수도로 가는 길을 향해 몸을 틀었다. 그리고 그대로 내달릴 예정이었다. 누군가 그녀의 손목을 거칠게 잡기 전까지는.

“누구냐?”

“꺅! 누구야!”

루비카는 자신을 거칠게 잡은 사내를 올려다보며 반사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깜짝 놀라 입을 가렸다. 혹 베르너 저택까지 소리가 들렸을지도 모른다. 루비카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루비카의 그런 행동은 사내의 눈에 수상쩍어 보이고도 남았다.

“놓아주세요.”

“이 시간에 무슨 연유로 담을 넘었는지 타당한 이유를 대면.”

루비카가 순간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남자는 루비카의 그런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재빨리 루비카를 아래위로 훑었다. 하녀나 입을 법한 허름한 외출복,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문제는 그녀가 비록 낡았으나 귀족이나 들 법한 가죽 가방을 들고 있었다는 거다.

곧 그는 더 물어볼 것도 없다는 듯 루비카를 거칠게 끌고 가기 시작했다.

“앗! 놓아, 놓아주세요. 설명드릴게요.”

달빛 아래 남자의 허리춤에 찬 검을 본 루비카가 겁에 질려 소리쳤다. 어째서 이 밤에 무장한 남자가 베르너 저택 근방에 있었는지 연유를 알 수 없었다. 남자의 정체를 알지 못하는 루비카는 이대로 건달의 소굴에 끌려가는 건 아닌지 두려웠다.

“전 베르너가에 신세 지고 있는 루비카……”

루비카가 이름을 채 다 밝히기도 전에 남자가 불끈 화를 냈다.

“이제는 공작 부인이 될 분의 이름을 함부로 들먹이는 거냐?”

남자의 대꾸에 루비카의 머리가 멍해졌다. 확신할 수 없지만 그녀의 기억이 맞는다면 이 남자는 이 일대에서 본 적이 없는 자였다. 그런데 어떻게 공작의 청혼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걸까? 그러나 그녀가 의문에 대한 답을 찾을 틈은 없었다.

남자는 눈 깜짝할 사이에 그녀를 베르너 저택 대문 앞으로 데려갔다. 아직 루비카의 도망을 알지 못한 듯 저택 대문 앞에는 별다른 기척이 없었다.

“놓아주세요,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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