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5화
“네 나이를 생각해 보렴. 어디 가서 이런 혼처는 두 번 다시 못 찾아. 사랑 같은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할 나이는 지났잖니? 솔직히 말해 공작 각하와 혼인이 성사될 수 있었던 건 네 어머니가 백작가의 딸이었기 때문이란다. 안젤라는…… 안젤라는, 백작가 친척 명단은커녕 준남작 귀족 명부에 이름을 못 올린 그 애는 그런 분이 청혼해도 이루어질 수 없어.”
베르너 부인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 마지막 말에 담긴 마음만은 진심이었는지 비췻빛 눈동자에서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그러자 가정 내 평화를 사랑하고 또 그것이 깨지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베르너 씨가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루비카에게 비난의 눈길을 보냈다.
루비카는 자신이 완전히 말려 버렸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공작과 결혼하기 싫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리 외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녀의 마음은 아직 이번 삶에서 만나지도 못한 사내의 것이었다. 그러나 루비카는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지켜보고 있는 하녀와 하인들이 너무 많았다. 루비카는 일단 한발 물러나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영 내키지 않는 질문을 했다.
“……그럼 저처럼 비천한 여성에게 청혼한 공작 각하는 언제쯤 뵐 수 있을까요?”
“루비카!”
비꼬는 말에 베르너 부인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오늘따라 루비카가 이상했다. 루비카는 지나치게 사람 좋았던 아주버님과 철없을 정도로 순순했던 동서를 닮아 평화를 사랑하는 소녀였다. 아주 날 선 말 하나, 눈초리 하나로 루비카는 재까닥 베르너 부인에게 복종하며 인형처럼 움직였다.
그런 루비카가 아까부터 제 의사를 지나치리만큼 확실히 밝히다 못해 지금은 비꼬는 말까지 하고 있었다. 그러나 루비카의 변화를 눈치챈 베르너 부인과 달리 베르너 씨는 특유의 낙천적 기질을 발휘했다. 그는 언제 루비카에게 비난의 눈길을 보냈냐는 듯 환히 웃었다.
“내일 저녁때쯤 특별허가증을 들고 오실 거라는구나. 그래,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집사, 당장 만찬 준비를 하게. 아이린, 우리 칠면조는 넉넉했던가?”
베르너 부인은 이 자리에서 루비카의 변화를 지적해 봤자 좋을 게 없다고 판단했다. 그녀는 금세 상냥한 목소리를 꾸며냈다.
“요리사에게 최고로 준비하라고 이를게요. 루비카, 너는 내일 입을 드레스를 골라야지! 이제 공작 부인이 될 참인데 더는 구질구질한 옷은 입지 말아라. 내 당장 안젤라에게 말해서 좋은 옷을 골라 놓으라고 하마. 안젤라는 기꺼이 줄 거야. 너도 알지? 그 애가 얼마나 마음씨가 고운지.”
루비카는 쓰게 웃었다. 그러나 이제 더는 베르너 부인과 기 싸움을 할 기운이 남아 있지 않았다.
“옷은 고를 필요 없어요. 내일 대충 주는 대로 입을게요. 그리고 전 머리가 어지러우니 방에서 이만 쉴게요.”
루비카는 차갑게 일갈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사람들 앞에서 낡은 나무문을 “쾅!” 닫았다.
“그래, 루비카. 침대에 누워 머리를 식히면 너도 알 수 있을 거다. 뭐가 진정으로 널 위한 것인지.”
낡은 문을 뚫고 베르너 씨의 사람 좋은 체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그의 말에 맞장구치는 듯한 하인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철없는 루비카가 곧 자신이 거머쥔 엄청난 행운을 눈치채고 소스라치게 놀랄 거라는 둥 실없는 소리를 하며 공작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다락방은 그 소리를 막아 주기에 너무 낡고 얇았다. 루비카는 침대에 누워 이불로 귀를 막았다. 그래도 분함은 가시지 않았다.
‘젠장, 젠장!’
억울함에 베개를 퍽퍽 때렸다. 병상에 누워 있다 하더라도 루비카의 어머니가 살아 있었다면 오늘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현 베르너 부인의 말대로 그녀는 우아하고 고귀한 백작 집안의 딸이었다. 준남작의 딸이 공작과 결혼하기는 사실 애매모호했지만 황족의 방계인 백작 가문의 피가 루비카에게 흐르는 한 그건 영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루비카의 어머니가 살아 있었다면 결코, 루비카의 의사를 무시하고 그런 말도 안 되는 결혼을…….
‘내일 저녁때쯤 특별허가증을 들고 오실 거라는구나.’
문득 삼촌이 지나치듯 했던 말을 떠올린 루비카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특별허가증.”
너무 오랜만에 들어 바로 떠올리지 못했다. 그녀로서는 60여 년 전의 기억을 더듬어서 떠올리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준남작 정도인 베르너가와는 인연이 없는 문구였으나, 루비카의 어머니는 종종 그녀에게 이야기했다. 영지를 가진 자작 이상 가문의 후계자나 작위 당사자가 결혼하게 될 시 국왕에게 반드시 결혼을 허락하는 증서를 받아야 한다.
귀족들은 이를 보통 ‘특별허가증’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루비카의 어머니는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그리 말했다.
“특별허가증은 국왕 폐하께서 결혼을 허락하는 동시에 명령하는 거란다. 만약 특별허가증을 받은 상태에서 뚜렷한 이유 없이 파혼하게 된다면 이는 폐하를 기만한 것과 같은 행위야.”
특별허가증이 나오면 더는 수를 쓸 수 없다. 무조건 결혼해야 한다. 루비카는 본 적도 없는 클레이모어 공작의 술수에 헛웃음이 나왔다. 클레이모어 공작이 결혼하겠다고 마음먹으면 이 세상의 모든 여자가 당연히 ‘네.’라고 대답하리라 여긴 것인가?
베르너 부인의 말처럼 꽃을 들고 등장해 무릎을 꿇고 청혼하는 건 꿈도 꾸지 않았다. 루비카는 적어도 결혼을 하려는 남성이라면 상대 여성의 의견 정도는 물어야 한다 여겼다. 그러나 클레이모어 공작은 루비카의 의견을 물어보지 않았다. 만약 물어보았다면 루비카는 일언지하에 거절했으리라.
‘왜 나지? 나처럼 지참금도 없는 가난한 여자에게 청혼해서 무슨 이득이 있다고…….’
돈 이외에 원하는 게 있는 걸까? 그러나 아무리 골똘히 생각해 보아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녀는 특별히 아름답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뛰어난 능력을 가지지도 않았다.
그에 반해 클레이모어 공작은 대륙을 통틀어 손꼽이는 부자였으며 아론의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졸업할 정도로 똑똑했다. 게다가 풍문으로 듣기에 깜짝 놀랄 정도의 미남이라고 했다.
공작이 청혼한 이유는 그녀로선 알 수 없었다. 중요한 건 루비카가 그와 결혼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느끼는 점이었다. 아니, 죽어선 안 된다.
‘아르망, 당신을 만나고 싶어.’
루비카는 언제나 자신의 곁에서 미소 지으며 그녀를 도와준 남자를 떠올렸다. 나이든 노인의 모습이었으나 그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다. 결혼도 하지 못했고 고백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으나 루비카는 그의 여자였다.
가슴 속에 아르망을 두고 다른 남자와 결혼하다니……. 그것도 아르망의 눈을 잃는데 일조한 남자였다. 루비카는 굳세게 마음먹고 장롱에서 낡고 오래된 가죽 가방을 꺼냈다.
“튀자.”
과거의 순종적인 루비카였다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결혼식장에 들어섰을 것이다. 그러나 전쟁은 루비카의 고운 마음씨에 생채기를 내지 못한 대신 온갖 고생을 그녀에게 주었다. 그리고 루비카에게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 처리할 수 없는 일이 생겼을 때 도망치는 수가 있다는 깨달음을 주었다.
자신이 야반도주하면 베르너가의 위신이 땅에 떨어지긴 하겠지만 뭐…….
‘어차피 4년 뒤 전쟁이 터지면 이런 일 따위 모두 잊을 거야.’
돌아가신 어머니의 친정인 백작가에서야 좀 신경 쓰긴 하겠지만 베르너가는 어차피 상업으로 먹고사는 가문.
루비카는 위신과 예의를 따지다 자신의 삶을 진흙탕에 처박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혀를 콱 깨물어 죽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에겐 목표가 있었다.
‘최대한 몸을 피신할 수 있는 곳에 숨어 있다 전쟁이 터지면 수도원으로 가자.’
그리고 거기에서 루비카는 사람들에게 봉사하며 아르망을 기다릴 것이다. 아르망을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루비카는 그 어떤 고통과 슬픔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번에는 아르망을 만나게 되면 더는 망설이지도 말고 부끄러워하지도 말고 그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리라. 루비카는 가슴 한쪽에 숨겨둔 반지의 금속성을 느끼며 굳게 다짐했다.
그녀는 옷장과 서랍에서 돈 될 만한 것을 찾아 가방에 넣었다. 하지만 베르너 부인이 좋은 것을 대부분 가져가는 바람에 영 마뜩한 게 없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이 주일 정도는 이동하는 데 쓸 수 있을 거야.’
어머니의 유품인 고급 장갑마저 전당포에 맡길 결심을 하고 가방에 넣었을 때였다.
“똑똑.”
갑작스레 들린 노크 소리에 루비카는 가방을 싸던 손놀림을 멈췄다. 슬슬 점심시간이었다. 하녀가 간단한 요기라도 하라고 부르는 건가. 하지만 기분이 좋지 않았던 루비카는 밥 생각이 전혀 없었다.
“됐어.”
루비카가 짧게 대답하자 문 너머에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곧 바깥의 사람은 루비카가 짐을 마저 싸지 못할 정도로 거세게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루비카! 루비카!”
거친 숨소리가 섞인 목소리의 주인은 안젤라였다. 숨넘어갈 듯한 소리에 루비카는 싸고 있던 짐을 황급히 침대 아래에 숨기고 문을 살짝 열었다. 적당히 달래 보낼 생각이었는데 안젤라는 열린 문틈으로 몸을 비집고 말릴 새도 없이 들어와 버렸다.
“청혼 받았다며!”
드레스가 구깃구깃 변한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안젤라가 얼굴이 새빨개져 씩씩거렸다. 클레이모어 공작과 결혼할 맘은 없었으나 청혼받은 건 사실이었다. 하는 수 없이 루비카가 고개를 끄덕이자 안젤라의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차마 받아들이기 싫은 사실을 들은 안젤라는 작은 얼굴로 뭐가 그리 초조한지 루비카의 방을 한 차례 돌더니 격앙된 어조로 외쳤다.
“언니는 지참금이 없잖아! 언니 엄마인지 뭔지가 아픈 거 치료한다고 다 써 버렸다고 했잖아!”
사실 숙모는 세리토스 왕국 출신이 아닌 저 멀리 사르망 출신이었다. 그녀가 사르망에서 했던 대로 행동하면 근방의 숙녀들이 비웃었다. 숙모는 이 사실을 삼촌에게 하소연했는데 삼촌은 그 사람 좋은 낙천적 기질을 십분 발휘해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 했다.
하지만 괜찮아지지 않았다. 그래서 숙모는 아예 그들을 ‘못돼 처먹은 여인네들’이라고 말하며 어울리는 걸 포기했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문제는 안젤라에게까지 세리토스의 법도 따위 따를 필요 없다며 제대로 교육을 하지 않았다는 거다.
제멋대로 공주님 안젤라. 그녀가 자신에게 거칠게 구는 건 상관없었으나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해 함부로 하는 건 넘어갈 수 없었다. 루비카는 안젤라에게 엄한 표정을 지었다.
“안젤라, 내 어머니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지 말아 줄래?”
“몰라!”
루비카가 그리 말하자 안젤라가 발을 동동 구르며 오히려 화를 냈다.
“언니 지참금까지 다 써 버린 사람이야! 난 절대 좋게 말 못해.”
“안젤라! 어머니의 치료비에 지참금까지 다 쓴 건 내 의지야! 그리고 제발, 부탁인데 제대로 숙모라고 불러. 숙모!”
“싫어! 지금 언니 곁에 있고 언니를 보호하는 건 우리 가족이야! 언니는 언제까지 죽은 엄마만 찾을 거야! 내가, 내가 언니 가족이야! 언니 동생이라고.”
어느새 안젤라의 두 눈에 눈물이 방울지기 시작했다. 숙모를 닮은 비췻빛 눈동자, 거기에는 루비카의 비난에 오히려 억울해하는 감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루비카는 그런 안젤라의 태도에 어이가 없으면서도 예전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무엇을 들여다본 기분이 들었다.
‘언제까지 죽은 엄마만 찾을 거야.’
……내가 그랬었나?
확실히 루비카는 병상에 누워있던 엄마가 죽고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래서 덜커덕 삼촌 내외의 호의를 믿었다. 그리고 그 호의에 배신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루비카는 매일 밤 슬픔에 빠져 어머니의 초상화를 들여다보며 눈물만 흘렸다.
정신을 차린 건 모든 것이 폐허가 되었을 때, 아이러니하게도 베르너 삼촌이란 나쁜 버팀목이라도 있는 게 나은 상황에 닥친 후였다.
‘돌아가신 엄마만 찾을 수밖에 없잖아. 이 집에서 내게 친절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