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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4화 (4/212)

# 4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4화

* * *

클레이모어 공작? 그 클레이모어 공작?

루비카의 입장에서는 너무 대단해서 말을 걸기는커녕 평생 단 한 번 스쳐 지나갈 인연도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루비카의 삼촌, 마틴 베르너 씨는 루비카의 불안을 알아차릴 눈치가 없었다. 그는 루비카가 너무 기뻐 망설이는 줄 알고 활짝 웃으며 두 팔을 벌렸다.

평소였다면 적당히 장단에 맞췄을 루비카였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나지 않았다.

“그분이 대체 왜 제게?”

종달새의 울음처럼 가냘프고 힘없는 목소리였다. 작은 눈을 끔벅이며 층계 위에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는 루비카를 베르너 씨가 바라보았다. 왜 이 엄청난 제안에 루비카는 기뻐하지 않는가?

“그걸 내가 어찌 아느냐? 알아도 네가 알겠지.”

어느 날 불현듯 루비카를 본 클레이모어 공작이 그녀에게 반해 청혼한 게 당연하지 않느냐는 투였다. 하지만 루비카는 정말 단 한 번도 클레이모어 공작과 마주친 적이 없었다. 그녀의 소녀 시절은 아버지가 남긴 막대한 빚과 어머니의 병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럴듯한 드레스를 입고 수도 무도회는커녕 인접한 남작가의 무도회조차 참석한 기억이 없다. 루비카로서는 영문을 모를 일이었다.

“무얼 그리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거니?”

그때 루비카의 숙모, 베르너 부인의 목소리가 계단에서 들렸다. 여느 때처럼 세리토스 왕국민치곤 지나치게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베르너 부인이었다. 다만 오늘 아침은 차마 루비카의 손길을 받지 못해 예쁜 금발을 끈 하나로 질끈 묶어 평소보다 화려함이 덜했다. 그녀는 붉고 고운 입을 가차 없이 움직였다.

“루비카, 네 입장에서는 상상도 못할 혼처야. 심지어 공작 각하께서 자신의 사비를 내어 네가 치러야 할 혼수 값을 대신 내주겠다고 하더구나.”

베르너 부인은 이미 주판을 다 두드렸다. 루비카의 결혼이었으나 모든 일이 당사자인 루비카를 빼고 진행되었다. 루비카는 베르너 부인의 차가운 눈에서 거부를 절대 허락하지 않으리라는 걸 읽었다.

“하지만 저는 그분을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걸요? 갑작스럽게 제게 청혼을 할 리 없어요. 혹 다른 영애의 이름을 착각한 게 아닐까요?”

루비카는 그 차가운 눈초리에도 용기를 쥐어짜 반문했다. 제 의문이 부디 정당하게 들리길 기도하며 베르너 씨를 향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착오가 틀림없다. 루비카란 이름은 절대 흔하지는 않았으나 아예 드문 이름도 아니었다.

공작처럼 잘난 사람이 이런 준남작에 지참금도 없는 여인에게 청혼을 할 리 없다. 그러나 루비카의 정당한 의문은 베르너 씨의 대답에 무참히 부서졌다.

“오, 절대 착각이거나 그런 게 아니란다. 그쪽은 네 보호자인 내 직업이 무언지 알고 있었고, 우리 집 주소와 내 형님, 그러니까 루비카 네 돌아가신 아버지의 이름도 정확히 대더구나! 하하, 모든 걸 확인하고 돌아갔단다.”

“집 주소를요?”

점점 불길한 예감이 루비카를 엄습했다. 정말 공작이 다른 어떤 루비카가 아니라 루비카 베르너, 자신에게 청혼한 것이란 말인가? 그러나 이 공간에서 두려워하고 있는 사람은 오직 루비카뿐이었다. 베르너 씨는 환히 웃으며 어서 내려오라는 듯 루비카에게 손짓했다. 할 수 없이 루비카는 현기증과 싸우며 조심조심 층계를 내려갔다.

2층에 다다르자마자 숙모가 청혼 받은 걸 축하한다는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루비카의 손을 잡았다.

“부럽구나. 그래도 아버지 덕에 네 이름이 준남작으로나마 귀족 명부에 올라가 있어 이런 결혼이 가능하구나.”

루비카는 평생 처음 보는 숙모의 다정한 미소에 소름이 돋았다.

‘준남작이나마……’

그래, 준남작. 그 빌어먹을 귀족 작위.

지난 삶에 루비카는 그저 하루하루 살아가기 바빴다. 그래서 어둡고 슬픈 과거를 차마 꺼낼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러서야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삼촌과 숙모는 날 일부러 결혼시키지 않은 게 아닐까?’

루비카의 아버지는 흉년 때 폭풍우란 위험을 무릅쓰고 배에 곡식을 가득 싣고 왔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준남작 작위를 받았다. 그처럼 사람 좋았던 그가 바다에서 유명을 달리한 후 루비카와 그녀의 어머니는 엄청난 빚을 발견한다.

그 빚 때문에 루비카의 어머니는 약 한 첩 제대로 쓰지 못하고 병으로 죽게 되었다. 바람 앞의 등불이었던 루비카의 앞에 죽은 아버지의 동생이 등장했다.

‘우리가 네 보호자가 되마.’

그때는 그저 기뻤다. 사람 좋은 아버지처럼 삼촌이 육친의 정에 이끌려 기꺼이 좋은 일을 해 주는 거라 여겼다. 삼촌은 본인이 빚을 다 처리하는 조건으로 베르너 저택까지 사들였다. 루비카는 기꺼이 관청에 가 신고했다.

「준남작의 작위를 상속받은 루비카 베르너의 보호자, 마틴 베르너」

그 증서는 아직 사회생활을 하지 못하는 루비카 대신 마틴 베르너가 준남작의 권리를 대행해도 됨을 의미했다. 아버지와 똑같이 무역에 종사하는 삼촌 마틴 베르너에게 이는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귀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증서가 날아온 날부터 삼촌 내외는 태도를 바꿨다.

‘……결혼하는 순간, 증서는 힘을 상실하지.’

당시 루비카는 영문을 몰랐다. 아직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에 밝지 않은 탓이었다. 그녀가 결혼하지 않아야 삼촌은 루비카의 보호자로 준남작 지위가 주는 권리를 맛볼 수 있었고, 그녀가 후계 없이 죽어야 그 작위는 가까운 혈족인 마틴 베르너나 그의 아들인 아이작 베르너에게 갈 터였다.

설사 루비카가 알았다 해도 아버지의 빚을 대신 갚아 준 삼촌에게 지참금을 내놓으라고 멱살을 잡을 성격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건 아니다. 자신의 결혼을 제멋대로 결정하고 마치 은총이라도 베풀어 주는 듯한 저 태도!

분명 그들은 신분이 월등히 뛰어난 남자에게 시집을 갈 시 친정에 작위를 돌려주고 가는 관례까지 계산해 공작의 청혼을 수락했겠지. 과거의 루비카라면 숙모와 삼촌에게 고개를 수그렸겠지만 지금의 루비카는 달랐다.

“삼촌, 클레이모어 공작 각하의 전령이 돌아갔다는 건 무슨 소리인가요? 설마 공작의 청혼을 받아들이셨다는 소리인가요?”

“두말하면 잔소리지.”

“어떻게! 그런!”

루비카는 분노로 숨쉬기가 힘들 정도였다. 삼촌이 어떻게 그런 사고를 쳤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누구보다 루비카를 이해할 수 없는 게 바로 베르너 씨였다. 그는 루비카가 대체 왜 그리 화를 내는지 영문을 몰라 눈을 껌뻑였다.

마음 같아서야 루비카는 베르너 씨에게 한참 소리를 지르고 싶었으나 그랬다간 아직은 웃고 있는 숙모에게 따귀를 맞을지도 모른다. 루비카는 심호흡 후 차근차근 운을 떼었다.

“제 의사를 물어보셨어야지요.”

루비카의 지적은 정당했다. 베르너 씨는 그제야 제가 무엇을 놓친 줄 깨닫고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선천적으로 낙천적인 베르너 씨는 곧 모든 상황을 자기 식대로 해석하고 빙그레 웃었다.

“깜짝 놀라게 해 주려고 그랬지.”

루비카가 거절할 것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태도였다. 루비카는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전 그분과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루비카의 말에 베르너 부인과 베르너 씨는 물론 몰래 그들의 대화에 귀 기울이고 있었던 저택의 사용인들도 깜짝 놀랐다.

클레이모어 공작. 3년 전 불의의 마차 사고로 공작 내외가 갑작스레 사망한 이후 20대의 젊은 나이에 공작 자리에 오른 그는 세리토스 왕국 최고의 신랑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유능해서 국왕의 오른팔이 된 것은 물론, 사교계에 미남이란 평이 자자했다. 고작 준남작에 무역상이란 일을 해 먹고 사는 집안 소생인 루비카로서는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는 남자였다.

하지만 루비카는 그가 싫었다.

에드가 테일러 클레이드 윈드모어. 어찌 그 이름을 잊을 수 있으랴. 그가 바로 하늘 위에서 포탄을 떨어뜨리는 ‘스텔라’를 발명한 남자였다.

클레이모어 공작가는 그 태생부터 뛰어난 발명가로, 세리토스 왕국이 최첨단 군사 무기의 생산지로 우뚝 서는데 일조한 가문이었다. 클레이모어 공작가가 어떤 물건을 발명해 내느냐에 따라 세리토스 왕국의 한 해 예산이 결정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루비카에게 청혼을 넣은 제24대 클레이모어 공작인 에드가 테일러 클레이드 윈드모어는 역대 클레이모어 공작 중 가장 뛰어난 두뇌를 가졌다고 일컬어졌다. 그리고 그는 그 뛰어난 두뇌로 결국 끔찍한 괴물 ‘스텔라’를 만들어 냈다.

그 ‘스텔라’는 4년 뒤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을 죽게 만들었다. ‘스텔라’로 인해 일어난 전쟁으로 아르망은 눈을 잃었고, 많은 사람이 부모와 아이와 친구를 잃었다.

루비카의 마지막은 또 어땠는가. 자비 없는 그 무서운 무기는 피아의 구분이 없었다. 아픈 사람과 고아를 보살피는 휴의 수도원에까지 포탄이 떨어졌고, 일흔 살의 루비카는 결국 목숨을 잃었다.

루비카에게 클레이모어 공작이란 원수나 다름없었다. 다른 남자라면, 심지어 호호 할아버지가 다 된 백작과 결혼하라고 명령한다면 두 눈을 꾹 감고 참아 볼 수 있으련만 클레이모어 공작만은 결단코 안 되었다.

입을 꼭 다물고 생애 처음으로 삼촌을 반항적으로 바라보는 루비카 때문에 베르너가의 공기는 마치 살얼음을 낀 듯했다. 언제나 순종적이고 얌전한 루비카가 그리 거칠게 반항하리라 예상치 못한 베르너 씨는 그 자리에 굳은 채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호호호.”

적막을 깬 것은 베르너 부인의 웃음소리였다. 그녀는 모두 굳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분위기에 웃음이라는 돌을 던졌다.

“루비카, 어린 10대 소녀도 아니고 공작 각하께서 네게 무릎을 꿇고 꽃을 바치지 않았다고 이러는 거니? 오, 이런. 네 나이를 생각해 보렴. 그리고 각하의 입장을 생각해 봐. 그분의 신분을 고려했을 때 동네 실없는 청년처럼 네게 쪼르르 와 청혼하는 게 가당키나 하겠니? 가문 대 가문으로 네 보호자인 삼촌에게 청혼 수락 신청을 넣으셨잖니! 그걸로 할 일 다 하신 거지. 또 네가 그분에게 어울릴 만한 여성인지 보호자에게 의견을 구하는 게 맞아.”

베르너 부인은 루비카의 분노를 나잇값 못하는 치기로 분류해 버렸다. 그녀의 말대로 클레이모어 공작의 일 처리에 문제가 없었으나 루비카는 그대로 물러나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제 의사를 물으셨어야지요. 방금 온 손님은 클레이모어 공작 각하의 전령이었나요? 그 자리에 저를 부르지도 않은 건 정말 너무 하셨어요.”

완곡하고 간곡한 지적이었다. 베르너 씨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베르너 부인은 차가운 눈으로 루비카를 바라보았다. 베르너 부인은 만약 베르너 씨가 그 자리에 루비카를 끼우고자 했어도 허락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세리토스 왕국 제일의 부자 클레이모어 공작은 자신의 부인이 될 지참금 하나 없는 가난한 여인, 루비카에게 통 크게 지갑을 열었다. 그녀가 마련해야 할 혼수 값을 공작의 사적 재산에서 지급하는 것은 물론, 공작 부인의 친정에 대한 품위 유지비 명목으로 베르너가에 꽤 많은 돈을 지급하기로 하였다.

게다가 공작이었다.

이렇게 신분 높은 자를 남편으로 맞이하게 될 시 부인은 격에 떨어지는 자신의 작위를 친척에게 주고 가는 것이 통례였다. 베르너 부인은 쌍수 벌려 환영하는 대신 상인의 부인답게 속내를 감추고 아침 내내 응접실에서 루비카를 최대로 비싼 값을 쳐 팔기 위해 내내 공작의 전령과 입씨름을 하였다.

그리고 클레이모어 공작가에서 뜯어낸 돈을 누구 앞으로 돌리고 어디에 신탁할지에 대해서 제 뜻대로 정하는 데 성공했다. 적어도 현재 아카데미에서 수학 중인 그녀의 아들, 아이작 베르너는 졸업할 때까지 돈 걱정하지 않으리라.

결국, 전령은 두 손 두 발 다 들고 베르너 부인이 원하는 바를 모두 적어 갔다. 전령에 말에 따르면 공작은 반드시 이 결혼을 성사시키라고 했다. 아마 모두 베르너 내외가 원하는 대로 굴러가리라.

거기에 베르너 부인은 한술 더 떠 공작이 혼수값을 보내면 적당히 구색이나 맞춰 마련해 준 다음 그 차액을 착복할 계획이었다. 그 생각을 하면 베르너 부인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미웠던 루비카가 제법 사랑스럽게 보일 지경이었다.

“루비카, 그런 자리에 너를 보이는 건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겼단다. 너도 알다시피 혼수니 이런 대화에 신부가 직접 개입한다는 건…… 좀 우아하지 못하잖니?”

“그건 아이린의 말이 맞구나.”

비난당하는 입장에 익숙하지 않은 베르너 씨가 금세 얼굴 주름을 펴며 베르너 부인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루비카는 하는 수 없이 클레이모어 공작과 결혼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재차 밝혔다. 그러자 베르너 부인의 비췻빛 눈동자에 눈물이 방울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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