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3화
* * *
‘미친 건가? 나는 정녕 미친 게 아닐까?’
자그마한 다락방의 낡은 침대에 머리를 처박고 루비카는 그리 반문했다. 갑자기 들이닥친 일은 그녀가 충격으로 그 자리에서 바로 실성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죽은 자신이 되살아난 것도 아니고 과거로 돌아오다니, 천지가 경노할 일이었다.
하지만 일흔 살까지의 삶이 거짓이고, 잠시 꾼 꿈을 착각한 거라고 할 수는 없었다. 실제로 루비카는 죽기 직전에 있었던 일과 그녀가 예순아홉 살에 겪었던 기근에 대해서는 생생히 기억해 낼 수 있었지만 스물두 살인 올해 있었던 일은 40여 년 전의 일을 떠올릴 때 으레 그런 것처럼 모든 것이 뿌옇고 희미했으며 간혹 기억이 뒤죽박죽 섞여 있었다.
무엇보다 그녀가 과거로 돌아왔다고 믿을 수밖에 없는 건…….
루비카는 슬픈 눈으로 가슴께의 반지를 바라봤다. 반지를 장식하는 푸른 돌은 아름다웠지만 사파이어도 블루토파즈도 아닌 그냥 돌이었다. 그러나 아르망은 무슨 소중한 물건이라도 되는 양 이 반지를 항상 몸에서 떼지 않았다.
루비카가 아르망에게 사랑한다 말하지 못한 데는 반지도 한몫했다. 그녀는 그가 옛 연인을 잊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건 절대 아르망의 것이야.’
그녀가 그리 확신하는 이유가 있었다. 루비카가 태어난 날 그녀의 어머니는 아이의 눈에 붉은 기운이 감도는 것을 보고 기뻐했다.
–휴 신의 축복이 네게 있을 거야.
붉은 눈을 가진 사람은 사랑의 신, 휴의 축복을 받아 반드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행복하게 산다지. 그 빨간 눈은 자라나면서 평범한 적갈색 눈이 되리란 사실을 몰랐던 그녀는 직접 아이를 ‘루비카’라고 이름 지었다.
그 뒤 루비는 루비카의 보석이었다. 지금이야 모두 빚 때문에 숙모에게 빼앗겼지만 루비카의 장신구함이 오직 새빨간 보석만으로 채워졌던 때도 있었다. 이후에도 루비카는 빨간 것 이외에는 액세서리를 착용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기도 했고, 죽은 어머니가 좋아했기 때문이다.
‘아르망…….’
죽을 때 분명 가슴 위에 무언가 차가운 것이 떨어지는 걸 느꼈다. 설마 그게 이 반지였던 걸까? 루비카는 자신과 함께 과거로 돌아온 반지를 손에 꼭 쥐었다. 언제나 루비카의 버팀목이 되어 주었던 아르망이 그녀가 미치지 않도록 반지를 함께 보내 준 것 같았다.
다른 건 다 빼앗겨도 이것만은 절대 못 뺏겨!
물건에 대한 욕심이 크지 않았던 루비카였으나 아르망의 반지는 달랐다. 그녀가 정신을 잃지 않도록 해 주는 물건이자 어떤 단서였다. 하나 숙모에게 빼앗길까 덜컥 겁이 났다. 일단 금줄이 달린 반지를 천에 곱게 싸 가슴 안쪽 깊숙한 곳에 숨겼다.
그리고 침대에 앉아 눈물을 닦고 천천히 하나씩 짚어 가기로 했다. 일단 왕국력 473년, 루비카의 나이는 혼기가 꽉 차다 못해 늦어 버린 스물두 살. 여기까지 떠올리고 루비카는 입술을 콱 깨물었다.
‘6년만 더 일찍 돌아왔어도…….’
그럼 병상에 누워 있는 모습이나마 어머니를 볼 수 있었을 거다. 그때 루비카는 어머니와 그리 일찍 이별하게 될 줄 몰랐다. 심지어 철없던 그때는 다른 친구들은 무도회에 가는데 자신은 약품 냄새를 맡으며 종일 병간호나 하고 있어야 한다고 살짝 한탄했었다.
그게 얼마나 소중한 시간이었는지, 루비카가 누렸던 모든 것은 어머니의 다정함 아래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다는 사실을 그녀는 한참 뒤에 깨달았다.
-루비카 자매님, 어쩔 수 없는 일을 떠올리고 자책하는 건 자매님을 불행히 만들 뿐입니다. 자, 우리 자책할 시간에 신이 자매님을 위해 주신, 바꿀 수 있는 현실에 대해 먼저 떠올립시다.
루비카는 처음 수도원에 도착했을 때 현실을 개탄만 할 뿐이었던 자신을 이끌어 주고 조언해 줬던 수사의 말을 떠올렸다. 세상은 촘촘한 그물처럼 만들어져 있다. 아무리 자신이 한탄하고 안타까워해도 고칠 수 없는 일이란 게 있다.
일단 눈앞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고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면 어느덧 그물이 새로 짜일 것이라고 수사는 그녀에게 말했다. 위로에 불과했던 그 말은 이후 루비카를 변모시켰다. 루비카는 그때처럼 일단 지금 현실에서 할 수 있는 것을 먼저 떠올리기로 했다.
‘4년 뒤 전쟁이 터져.’
루비카의 조국, 세리토스 왕국은 험준한 세리스 산맥에 자리 잡았다. 별다른 특산물도 없었고 작황도 좋지 않았다. 못살고 가난한 동네. 그러나 세리토스의 건국왕이 세리스 산맥 깊숙한 곳에서 마석 광산을 발견하는 순간 이야기는 달라졌다.
‘마석’은 강렬한 에너지를 품은 돌이었다. 당시에는 그 에너지를 활용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하지만 건국왕의 옆에는 우수한 발명가가 있었다. 후일 클레이모어 가문을 세운 그 발명가는 마석의 에너지를 이용한 무기를 만들어 냈다. 그가 만들어 낸 무기는 무척 정교했고 엄청난 파괴력을 자랑했다.
너도나도 세리토스의 무기를 사 대륙에 판을 치고 있던 마물들을 쫓아냈다. 세리토스는 그렇게 무기를 판 돈으로 곡식을 사 왕국을 풍요롭게 했다.
400여 년이 흐르는 동안 클레이모어 가문은 꾸준히 발명을 하였고 왕은 세계의 복잡한 정세를 이용해 마석과 무기를 팔았다. 세리토스 왕국을 제외하고 그런 순수한 마석을 캘 수 있는 곳은 드래곤의 권역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4년 뒤인 왕국력 477년, 세리토스를 풍요롭게 만들었던 발명품이 그동안의 대가를 받아 내겠다는 듯 세리토스를 멸망시켰다.
* * *
“글쎄, 세상에 클레이모어 공작이 이번에는 하늘을 나는 무기를 발명했대.”
“하늘을 난다고? 뭐, 아기 손가락만 한 걸 날리나?”
“아니, 쩨쩨하게 그럴 리가. 거의 배만 하다고 했어.”
“그렇게 큰 걸? 말이 되는 소리를…….”
“예끼! 이 사람아. 불가능한 걸 가능하게 하는 게 클레이모어 아닌가!”
26살, 지참금이 없는 루비카는 시집가지 못하고 베르너에서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으며 일하고 있었다. 하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그녀는 밭에 뿌릴 이삭을 열심히 골랐다.
“이제 드래곤이랑 한판 할 때가 된 거지.”
“잠자던 드래곤은 왜 건드려?”
“드래곤만 아니었어 봐! 당장 우리 먹는 감자가 고기였겠다.”
루비카는 하인들의 말에 웃음을 참으며 이삭이 든 통을 들고 나갔다. 사실 세리토스 왕국은 바로 인접한 곳에 거대한 평원을 두고 있었으나 그 평원은 욕심 많은 드래곤 이오스의 것이다.
‘정말 드래곤을 건드리려나?’
말도 안 되는 소리. 루비카는 밭에 씨앗을 뿌리며 그리 중얼거렸다. 그때 검고 거대한 그림자가 루비카를 덮쳤다. 처음에는 비를 머금은 짙은 구름인 줄 알았다. 그러나 루비카가 고개를 올리자 거기에는 햇빛을 다 가릴 정도로 크고 검은 무언가가 떠 있었다.
후일 그 이름을 알았다. ‘스텔라’. 하늘을 나는 건 평생 새밖에 보지 못했던 루비카는 신기함에 입을 벌렸다. 그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뭐지?
-새는 아닌 것 같은데?
-잠시, 뭔가 안에서……?
검은 철로 만든 듯한 미끈한 표면에서 무언가가 열리더니 철컥 튀어나왔다. 루비카는 그것이 대포와 비슷하다 생각했다. 곧 불길한 예감이 그녀를 덮쳤다.
-모두…… 피해요!
앞뒤 생각하지 않고 루비카는 가까운 지하 식료품 창고로 뛰었다. 이윽고 그 신기한 ‘스텔라’는 지상에 불꽃을 내렸다. 폭탄이 하늘 위에서 떨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날이었다.
스텔라가 지나간 자리는 폐허만 남았다. 루비카의 할아버지가 세워 그녀가 어린 시절을 보냈고, 부모가 죽은 지금 삼촌 내외가 차지한 베르너 저택도 마찬가지였다. 무역상을 하느라 언제나 외국을 떠돌아다녔던 삼촌이 왜 하필 그날만은 집에 있었는지, 루비카는 새카맣게 변한 시체 앞에서 목 놓아 울었다.
그 무렵엔 제법 철이 들어 루비카를 너무 차별하지 말라고 숙모에게 조잘거리던 안젤라의 시신은 또 어떠했던가. 그 끔찍한 순간은 떠올리는 것만으로 가슴이 찢어졌다.
‘어쩌지, 어떻게 하면 모두 살 수 있을까? 안젤라에게 같이 산책 가자고 해서 창고로 피신할까? 아, 숙모가 허락을 안 할 텐데……. 삼촌에겐 뭐라고 해야 하지?’
아무리 해도 루비카의 머리로는 사람들을 살릴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애초에 루비카는 전쟁이 어찌 일어났고, 그날의 공습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몰랐다. 어째서 세리토스의 발명품이 세리토스를 멸망시켰을까? 초조함에 루비카는 입술을 뜯었다.
‘아냐, 일단 이건 나중에 생각하자.’
입가에 비릿한 피 맛이 번졌을 때 루비카는 자신이 지나치게 흥분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심호흡하고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먼저, 먼 미래나 과거가 아닌 현재에 집중하기로 했다.
‘이즈음 이렇게 이른 아침에 베르너가를 찾아온 손님이 있었나?’
루비카는 눈썹을 찌푸렸다. 아무리 기억을 샅샅이 뒤져도 그런 일은 없었다. 하지만 단언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 스물두 살의 일이란 40여 년 전의 기억을 떠올리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10년 전의 일도 가물거리고 가끔 왜곡되기 마련인데 40여 년 전은 더욱 자신이 없었다.
“루비카! 루비카!”
그때 자신을 다급히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루비카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으로 나갔다. 다락 층계에서 내려다보니 응접실에서 갓 올라온 듯 삼촌인 마틴 베르너 씨가 2층 계단에서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삼촌?”
루비카가 의아한 목소리로 부르자, 마틴 베르너 씨가 고개를 들어 루비카 쪽을 보았다. 곧 그의 얼굴 가득 미소가 번졌다.
“얘야, 놀라지 말아라. 아니, 네가 너무 놀라 기절한다 해도 이해하마. 클레이모어 공작 각하께서 네게 청혼했다!”
층계 위에서 루비카는 현기증을 느껴 잠시 비틀거렸다. 루비카는 지난 삶에서 평생 독신으로 살다 죽었다. 바야흐로 운명이 바뀌어 루비카의 지난 삶에서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