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2화
* * *
“언……니?”
안젤라가 머리를 빗다 말고 멍한 표정을 짓는 루비카를 불렀다.
“아, 이런. 미안, 미안. 내 정신 좀 봐.”
안젤라의 부름에 루비카가 정신을 차렸다. 다시 생각해 봐도 참 이상한 일이었다. 자신이 여기에서 이렇게 주름살 하나 없는 얼굴로 안젤라의 머리를 빗겨 주고 있다니…….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생각에 잠기는 사치마저도 지금의 루비카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루비카는 일단 안젤라의 머리를 빗기기 시작했다.
‘어제 해 준 머리 같은 거 기억 안 나는데…….’
그러나 보드라운 안젤라의 머리를 만지는 순간 마음속의 불안과 혼란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포슬포슬 부드러운 촉감이 루비카의 마음을 진정시켰다.
아, 루비카는 가끔 안젤라를 떠올릴 때 그녀의 눈이나 코보다 이 머리카락을 떠올릴 정도로 안젤라의 머릿결을 사랑했다.
루비카는 안젤라의 머리를 적당히 빗은 다음, 머릿결의 탄력과 부드러움을 강화해 줄 장미수를 뿌렸다. 곧 향긋한 내음이 났다.
‘행복해.’
루비카는 안젤라의 머리를 다듬는 이 시간이 좋았다. 안젤라의 머리는 정말이지 꾸미는 보람이 있는 근사한 최상등품이었다. 심지어 안젤라의 머리를 이렇게 만질 수 있다면 삼촌 내외가 자신을 하우스키퍼처럼 부리는 것도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어느새 루비카의 손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그녀의 손은 제 할 일을 알고 있었다. 베르너 가문의 특징인 숱 많고 포슬하니 보드라운 머리카락은 풍성함을 살린 머리 모양이 어울린다. 루비카는 빗을 이용해 솜씨 좋게 머리카락에 공기를 넣어 부풀려 땋기 시작했다.
“어머?”
“좀 모양이 어제랑…….”
“쉿!”
양옆의 하녀가 어제와 다른 머리 모양을 지적하려 하자 안젤라가 입을 모아 저지했다. 분명 머리는 어제와 달랐다.
‘……예뻐. 마음에 들어.’
안젤라는 루비카의 솜씨에 새삼 감탄했다. 루비카는 단순히 머리를 아름답게 땋아 올릴 뿐 아니라 안젤라의 다소 동그란 얼굴을 좀 더 귀엽고 매력적으로 보이게 변모시키고 있었다.
이건 아무나 가지는 솜씨가 아니다.
안젤라가 자신의 머리에 흡족해하고 있던 그때, 루비카는 안젤라의 머리를 만지는 동시에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그건 꿈이었을까?’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루비카의 따뜻한 보살핌에 안정을 찾아가던 부상자들, 어떤 불행에서도 신의 가르침을 잊어선 안 된다고 역설하던 수사님.
그리고 고개를 돌리면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던 아르망. 그를 떠올리자 루비카의 가슴 한구석이 찌르듯 아팠다. 분명 자신은 지금 이 자리에서 안젤라의 머리를 만지고 있는데 현실이 꿈처럼 아스라이 느껴졌다. 안젤라의 머리카락을 손보는 자신의 손가락이 주름투성이가 아닌 게 이상했다.
이게 어찌 된 걸까? 거울을 보다 잠시 정신을 놓고 긴 망상의 나래 속에 있다 돌아왔다 치더라도 그녀가 느꼈던 감각은 지나칠 정도로 생생했다.
아르망이…… 아르망이…… 꿈이었을 거라고? 말도 안 돼.
어느새 안젤라의 머리를 완성한 루비카는 마무리를 하기 위해 액세서리함을 열었다. 아르망에 대한 것과 현실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뒤엉킨 루비카는 한참 핀을 고르질 못했다. 액세서리함에 있는 머리핀 중에 루비카의 눈을 끄는 게 없었다.
‘어울리지 않아.’
루비카의 조국인 세리토스 왕국은 검소함을 미덕으로 삼는다. 그러나 베르너가는 대대로 무역에 종사했기 때문에 액세서리함에는 신분에 비해 과하다 싶은 머리핀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하나같이 비싸 보이지만 안젤라의 머리색에 어울리지 않아.’
그때 루비카의 눈에 액세서리함 옆, 빗과 인두를 묶어 놓은 비단 끈이 눈에 들어왔다.
안젤라의 머릿결에 어울리는 옅은 황금빛.
봄의 싱그러운 기운이 흐르는 안젤라에게는 차가운 보석으로 만들어진 핀보다 바람결을 따라 살랑이는 비단 매듭이 더 어울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손이 먼저 움직였다. 루비카는 반쯤 넋 나간 상태로도 비단 끈을 이용해 어떤 매듭을 만들었다. 흔히 소파나 커튼을 꾸미기 위해 만드는 여타 매듭과 달랐다.
복잡하게 서너 번 묶고 그 끝을 바람결에 따라 펄럭이게 한 다음 핀을 이용해 안젤라의 머리 위에 고정했다.
“뭐야, 이건!”
익숙지 않은 매듭이 머리에서 나부끼자 안젤라는 처음에 인상을 썼다. 그리고 머리를 양옆으로 흔들어 보았다. 그러자 붉은 머리 뒤편에서 황금빛 끈이 쑥스러운 듯 모습을 보여 줬다 보이지 않았다 숨바꼭질을 시작했다.
“흐음.”
제법 재밌고 예뻤다. 끈이 지나간 자리에 잔상처럼 남은 황금빛이 안젤라의 머리카락을 좀 더 밝고 화사하게 만들어 주었다.
“괜찮은데?”
“맞아요, 안젤라 님. 무척 어울려요.”
“정말 예쁘네요.”
기뻐하는 안젤라와 하녀들과 달리 루비카는 자신이 만든 매듭을 보며 경악에 차 있었다.
‘이건…….’
* * *
수도원에서 치료 중이었던, 두 다리를 잃은 선원이 알려 준 매듭 묶는 방식이었다. 파나스 섬 출신인 선원은 철이 들 무렵부터 온갖 종류의 닻을 묶어 왔다. 그는 가구나 머리를 묶을 때 사용하는 매듭에 착안해 아무런 기능 없이 그저 화려하기만 한 매듭 방식을 개발했다.
-어머, 크리스 씨. 방금 그건?
-아, 가끔 장난삼아 이렇게 닻을 묶기도 했지요.
선원은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심심풀이로 자신이 만든 매듭을 가리려 했다. 하지만 루비카는 그가 만든 매듭에 매료되어 눈을 반짝였다.
-저도 그렇게 한번 묶어 보고 싶네요. 알려 주세요.
-……이건 튼튼하지도 않는 방식인뎁쇼?
-그래도 예쁘잖아요.
예쁘잖아요. 평생 들을 일 없다 생각한 칭찬을 들은 선원은 얼굴을 긁적이면서도 기꺼이 루비카에게 매듭 묶는 방식을 알려 줬다.
‘그게 아마…… 내가 마흔 살 무렵이었지.’
분명 현실에서, 지금 이 나이의 루비카는 알지 못하는 방식이었다. 생소한 건 지켜보고 있는 하녀도 안젤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대체 어쩜 이런 방식으로 비단을 묶을 수 있는지 감탄하며 안젤라의 머리 위에서 살랑살랑 흔들리는 비단 끈을 바라봤다. ‘그건 네가 잠깐 꿨던 꿈같은 게 아냐. 모두 진짜 있었던 일이야.’
루비카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안젤라의 머리 위에 있는 매듭이 그리 말을 걸고 있었다. 하지만 루비카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만약 그게 진짜 있었던 일이라면…….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이 아이는, 이 가여운 안젤라는…….
“언니?”
루비카가 여느 때처럼 부드러운 크림을 목과 손에 발라 주지 않자 안젤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돌아봤다.
그리고 안젤라의 커다란 녹색 눈에 루비카의 가슴에서 반짝이는 무언가가 들어왔다. 마치 푸른 하늘을 한 조각 떼어다 만든 듯한 돌이 박힌 반지가 금줄에 걸려 루비카의 가슴에 대롱거렸다. 안젤라는 손을 뻗어 루비카의 가슴에서 그 아름다운 반지를 휙 낚아채려 했다.
하지만 루비카의 동작이 안젤라의 손보다 빨랐다.
“나 줘!”
원하는 걸 얻지 못한 안젤라는 체통을 잃고 콘솔 위에서 두 다리를 동동 굴렀다.
베르너가의 작은 폭군.
루비카는 그런 안젤라가 떼를 쓰면 가끔 그리 행동하면 안 된다 말하기는 하였으나 항상 들어주었다. 지금도 안젤라가 갑작스레 손을 뻗는데 놀라 물러났을 뿐이다. 루비카는 안젤라를 달래며 그녀가 탐내던 것을 확인하려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안젤라에게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가슴 위에서 달랑거리는 반지를 확인하였을 때, 루비카의 동공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세상에…… 이건.
“안 돼!”
가슴에 달린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자마자 루비카는 빼앗기기 않기 위해 손에 꼭 쥐었다. 그녀의 가슴에서 달랑거린 것은 아르망이 항상 하고 다녔던 푸른 반지였다.
‘어째서 아르망의 반지가…….’
믿을 수 없는 일이다. 머릿속이 몰아치는 정보 때문에 과부하가 걸렸다. 그러나 이것 하나만은 확실했다. 다른 건 다 내주어도 이 반지는 줄 수 없다.
얼떨떨한 건 안젤라였다. 루비카는 안젤라가 원하면 그게 무엇이든 항상 양보해 주었다. 그런데 입술을 꼭 다물고 눈물이 그렁해 자신을 노려보다니!
너무 황당해 안젤라는 발을 동동거리는 걸 잊고 멍하니 루비카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오히려 하녀들이 긴장하기 시작했다. 한번 화가 나면 안젤라는 온종일 그들을 들들 볶는다.
이 작은 아가씨의 그런 행동을 하소연해도 마님도 주인님도 ‘하하’ 웃으며 귀여운 딸의 앙탈이라고만 여겼다. 하지만 베르너가의 천덕꾸러기 루비카는 달랐다. 액세서리함을 들고 있었던 하녀가 살살 눈치를 보며 말을 꺼냈다.
“안젤라 님은 반지가 보고 싶었던 것 같은데 꼭 그렇게 정색하셔야 했나요?”
“좋게 말씀하시는 법도 있었을 텐데…….”
“맞아요. 동생에게 그렇게 화내는 건 우아하지 못한 행동이에요.”
안젤라는 한마디씩 보태 제 편을 들어 주는 하녀들을 한차례 둘러보고 루비카를 보았다.
오늘 루비카는 평소와 달랐다. 루비카는 안젤라가 어머니의 유품을 탐했을 때도 “네가 가지고 싶다면…….”이라 말하며 기꺼이 주었던 언니였다. 그러나 지금은 하녀들의 거듭된 비난과 설득에도 포기할 수 없다는 듯 반지를 꼭 쥐고 있지 않는가.
문득 안젤라는 짜증이 났다. 그깟 돌로 만든 반지가 뭐기에 언니는 내 속도 모르고!
“됐어! 언니 꼴도 보기 싫어.”
고개를 팽 돌리고 축객령을 내렸다. 루비카는 오히려 안젤라가 반지에 대한 욕심을 버린 것에 안도했다. 옆에 있던 하녀가 안젤라의 목과 손에 크림을 발라 주며 루비카에게 더 큰일이 벌어지기 전에 어서 나가라는 눈짓을 했다.
자그마한 폭군이 명령한 대로 드레스룸을 나가려던 루비카는 아무래도 이상해 하녀에게 질문했다.
“숙모는?”
“손님이 오셔서 주인님과 함께 응접실에 계셔요.”
이른 아침에 손님이 왔다고? 그 방문이 얼마나 배려 없는지 적당히 돌려 지적해 문을 닫지 않고 응접실에서 응대 중이라니. 이건 또 무슨 일일까?
루비카의 숙모는 자신을 꾸미는 걸 무척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인근 숙녀들이 좋게 돌려 그녀의 지나친 꾸밈을 지적했을 때도 숙모는 가난뱅이들의 질투로 치부했었다. 그녀는 자신을 완벽히 치장했을 때에만 손님을 만난다.
특히 머리는 솜씨가 좋단 이유로 루비카 이외에는 맡기지 않았다. 그런 숙모가 아침 치장도 빼먹고 손님을 맞이했다니……. 루비카는 이해가 되지 않아 발걸음을 멈추고 눈을 깜빡였다.
그러자 하녀가 안젤라의 축객령에도 루비카가 빨리 나가지 않고 시간을 지체하고 있는 것에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루비카는 하는 수 없이 질문하는 걸 포기하고 일단 드레스룸을 나왔다. 응접실에 온 손님의 정체가 궁금하긴 하였으나 베르너가의 천덕꾸러기인 자신이 낄 자리가 아니었다.
루비카는 하인들이 사용하는 뒤쪽 계단을 통해 다락에 마련된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마주친 하인에게 지나가듯 물었다.
“올해가 왕국력으로 몇 년이었지? 갑자기 기억이 안 나서 말이야.”
“473년이요.”
식료품을 들고 있던 하인이 별걸 다 묻는다는 듯 무심히 말했다. 루비카는 소름이 오스스 돋는 걸 느끼며 반지를 꽉 쥐었다.
목에 걸린 반지만이 루비카에게 그녀가 미치지 않았음을, 그간 있었던 일이 거짓이 아님을 알려 주고 있었다.
‘맙소사!’
일흔 살에 죽은 루비카는 스물두 살의 자신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