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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1화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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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화

“아르망.”

루비카는 포탄이 떨어지는 와중, 자신의 안전은 안중에도 없이 그녀를 보호하려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아르망.”

“더는…… 더는 말하지 말아요.”

벌써 허리에 감각이 없다. 루비카는 이미 자신이 틀렸음을 직감했다. 맞이한 죽음이 슬프지 않았다. 파란만장했으나 평범한 삶이었다.

“난 이미 틀렸어요.”

“루비카, 안 돼.”

루비카는 남은 힘을 몽땅 끌어다 입가에 희미한 미소라도 지으려 애썼다. 누군가 그런 루비카를 보았다면 가슴을 움켜쥘 만큼 슬픈 미소였다. 루비카는 그저 점점 뿌옇게 변해 가는 시야에 아르망의 하얗게 센 머리와 선하게 주름진 눈가를 마지막으로 제대로 담기 위해 노력했다.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그것이 마지막 말이라는 사실을 아는 아르망이 고개를 저었다. 그는 절대 루비카의 유언 따위 듣고 싶지 않았다. 루비카가 아직 자신이 가망 있음을, 살 수 있음을 믿었으면 했다. 그녀가 없는 그의 삶이란 상상할 수 없었다.

“아르……망.”

루비카는 입을 열었다. 벌써 일흔 살, 루비카는 잘 버텨 왔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의 자그마한 수도원에서 일하며 얼마나 궂은 고생을 했던가.

그래도 루비카는 자신의 삶이 제법 괜찮았다고 느꼈다. 자신처럼 전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부상자를 치료하는 데서 삶의 기쁨을 찾았다.

전쟁이 터지기 전, 오히려 루비카는 자신이 있을 곳을 찾지 못했다. 어처구니없게도 전쟁이 루비카에게 있을 곳을 마련해 주었다. 하지만 그런 루비카의 마음에 딱 하나 남은 후회가 있었다. 그건 아르망에게 여태껏 ‘사랑한다.’라고 말하지 못한 것이다.

아르망은 십여 년 전 루비카가 의탁하고 있는 휴의 수도원에 나타난 남자였다. 그 또한 전쟁의 피해자였다. 눈도 보이지 않는 남자. 그러나 루비카는 그처럼 유능한 남자를 보지 못했다. 그는 여러 나라 사람들이 섞인 수도원에서 소통에 불편함이 없을 정도로 많은 나라의 언어를 알았고,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아! 루비카는 그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그토록 많은 사람을 치료하고, 살리지 못했으리라.

그리고 그는 루비카에게 얼마나 친절했던가. 루비카가 조금이라도 무리하려 하면 원기를 회복해 주는 음식을 만들어 주었고, 나서서 궂은일을 했다. 어느덧 루비카는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하지만 도저히 입을 열어 그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하루하루 시들 날만 남은 나이 든 여자가 사랑을 고하면 그건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겠지. 루비카는 노인이 되어서야 찾아온 봄이 부끄러웠다. 그래서 차마 아르망에게 그 사실을 고백하지 못했다.

죽음의 순간이 되어서야 후회하게 되다니, 인간이란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어리석기 그지없는 존재구나. 루비카는 힘없이 손을 뻗어 아르망의 뺨을 만졌다.

그녀만큼이나 퍼석퍼석한 피부, 아르망은 제법 잘생겼으나 저처럼 나이가 든 노인이었다.

어째서 그를 사랑하게 된 걸까?

하지만 젊고 잘생긴 남자보다 그를 바라보는 게 더 즐거웠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입에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왜 망설였을까. 왜 주변이 망측하게 여기리라 생각하고 물러섰을까. 삶은 절대 기다려 주지 않는 걸 그토록 처절하게 경험했는데.

“아르망, 나는…….”

“루비카, 나는…….”

두 사람은 동시에 입을 열었다. 루비카의 오래된 심장이 뛰었다. 그녀는 아르망에게 자신의 마지막 남은 진심을 들려 주고 싶었다.

‘아…….’

하지만 너무 늦었는지도 모른다. 루비카의 뿌연 시야가 새카맣게 변해 버렸다. 귓가를 드문드문 울리던 포탄 소리도 더는 들리지 않았다.

귓가에는 이명뿐이었다. 루비카는 마지막 말을 하려 했지만 입술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와 똑같아졌어.’

눈이 보이지 않는 와중에 루비카는 그리 생각했다. 그러자 이상하게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비참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르망에게 마지막으로 간절히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녀를 슬프게 했다. 그리고 그 슬픔은 자그마한 이슬로 변해 그녀의 눈가에 고였다.

이윽고 무언가 차가운 것이 루비카의 가슴에 닿았다. 연이어 귓가에 마치 속삭이는 것처럼 따뜻한 숨소리가 느껴졌다.

‘아르망이 내게 말을 걸고 있는 건가.’

안타깝게도 루비카는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 사실을 아르망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노파일지라도 자신의 마지막이 아르망에게 아름답고 행복해 보였으면 했다.

설사 아르망이 앞을 보지 못할지라도…….

루비카는 아르망이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더듬는 걸 느꼈다. 그의 손가락이 입가에 닿자 그녀는 마치 아르망이 하는 말을 다 알아들은 것처럼 미소 지었다.

그녀의 미소를 눈치챘을까?

아르망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 연이어 울음을 참는 듯 떨려 왔다. 그는 얼굴을 더듬던 손을 내려 루비카의 손을 꾹 잡고 어깨를 토닥이기 시작했다.

아직 포기하지 말라고, 살라고. 그렇게 루비카에게 몸짓으로 속삭이는 듯했다. 하지만 아르망의 그런 노력에도 루비카의 의식은 멀어지기만 했다. 아르망이 어깨를 토닥이는 손길도, 그의 내음도, 숨소리가 주는 자극도 점점 작아져 마침내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불행했고 파란만장했지만 살 만큼 살았고 행복했으며 또 뜻깊었던 인생. 단지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지막으로 사랑한다 말하지 못했다는 미련만을 남긴 채 루비카의 생이 끝나려 했다.

* * *

거울 앞에서 루비카는 갑자기 정신이 들었다. 눈가에 눈물이 가득 고인 채였다.

“헉!”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 그녀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어 갔다.

‘주름이…… 없어? 머리에 새치도 없고 그냥 갈색이야.’

내 얼굴이 맞는 건가? 루비카는 얼떨떨한 자신의 얼굴을 더듬고, 우윳빛 손을 내려다보았다. 너무 오랜만에 보아 익숙하지 않지만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은 루비카의 젊은 시절 그 자체였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루비카가 주변을 둘러보며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똑똑’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활짝 열렸다.

“아가씨!”

거기에는 익숙한 얼굴의 하녀가 있었다. 하지만 벌써 오십 년 전의 일이라 루비카는 그녀의 이름을 바로 떠올리지 못했다.

“아침 준비를 해야지요!”

“응?”

“어서요!”

하녀는 루비카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그녀는 거칠고 우악한 손으로 루비카의 가는 팔목을 잡더니 쿵쾅쿵쾅 뛰어 내려갔다. 3층 다락방에 있던 루비카는 순식간에 2층 드레스룸에 도착했다.

“언니! 너무 늦었잖아.”

화장대 앞 콘솔의자에 앉은 작은 숙녀가 화가 나는지 발을 동동 굴렀다. 전혀 귀족답지 못한 태도였다. 하녀는 마치 당연하다는 듯 루비카에게 빗을 쥐여 주었다.

“안젤라.”

목소리가 떨렸지만 이번에는 바로 이름이 튀어나왔다.

어떻게 이 소녀를 잊을 수 있을까?

루비카가 16세가 되는 해 루비카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이후 루비카는 쭉 집안 빚을 갚아 준 삼촌 내외의 착취에 가까운 보호 아래에 지냈다. 안젤라는 삼촌의 딸, 즉 루비카의 사촌 동생이었다. 안젤라는 루비카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입을 삐죽이더니 몸을 휙 돌렸다.

“어서 빗어!”

마치 하녀를 다루는 듯한 태도. 어느새 루비카는 눈물이 쏙 들어가서 거울 너머로 안젤라에게 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돼!’

눈이 마주지차 안젤라는 더 화를 내는 대신 눈을 슬쩍 피했다. 루비카는 한숨을 쉬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꿈이라도 꾼 걸까? 복잡한 마음을 숨기고 루비카는 안젤라의 탐스러운 붉은 머리를 빗었다.

아, 안젤라.

언제 봐도 예쁜 광택이 나는 붉은 머리카락이었다. 좋은 음식을 먹고 자라서인지 보들보들 손가락에 닿는 느낌이 퍽 좋았다. 부드럽고 그리운 촉감, 루비카는 목구멍에서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오르는 걸 간신히 참고 질문했다.

“무슨 머리로 해 줄까?”

“어제랑 똑같은 머리로 해 줘. 그거 좋아. 예뻤어.”

어제랑 똑같은 머리?

루비카는 짙은 적갈색 눈동자를 깜빡였다. 그리고 안젤라가 말한 어제를 떠올리려 애썼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루비카는 안젤라가 어제 했던 머리를 떠올릴 수 없었다.

루비카가 어제라는 단어를 생각하자 떠오르는 기억은…….

* * *

“루비카, 내일 인근에 아마눈의 공습이 있을 거랍니다.”

막 환자를 돌보고 온 루비카에게 아르망이 따뜻한 물과 비스킷을 건네 주었다. 루비카는 아르망이 건넨 물로 목을 축이며 아르망의 옆에 앉아 그가 만들고 있는 그물을 보았다. 내일 이 그물을 다 완성하면 냇가에서 아이들과 고기를 낚기로 했었다.

“어차피 저희가 있는 사원 쪽은 비껴가지 않을까요?”

“그게…….”

그물을 만들고 있는 아르망의 손이 멈추었다. 루비카는 의아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피바람 휘몰아치는 전쟁이 계속되는 와중에도 휴의 수도원만은 어떤 나라와 마물도 침략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 수도원에는 ‘원수를 이웃처럼 사랑하라’는 휴 신의 가르침에 따라 많은 난민이 모여들었다. 루비카도, 아르망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아르망은 자신이 알고 있는 걸 루비카에게 알려 줘도 될지 한참 망설이다 결국 입을 열었다.

“그동안 잠들어 있었던 드래곤, 이베르가 깨어났다고 합니다.”

“아.”

“루비카, 느티나무 아래에 은신처를 마련해 놨습니다.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아르망.”

루비카는 그물을 만지던 아르망의 떨리는 손을 잡았다. 그녀는 그의 눈이 보이지 않아 그 손처럼 불안에 흔들리는 자신의 눈을 보지 못해 다행이라 여겼다.

“그리되면 아이들을 먼저 구해요.”

“……루비카.”

“우린 살만큼 살았잖아요.”

자신이 틀린 말은 한 건 아니었다.

일흔 살이나 살지 않았는가. 그보다는 훨씬 더 어리고 젊은 아이들이 살아남는 게 이 고통의 끝에 행복을 마주할 가능성이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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