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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녀님이 두 번째 삶을 사는 방법-148화 (완결) (148/148)

148화

아르에 대해서는 내 궁에서나 한동안 뉴스거리가 되었다. 그러고는 키옌이 국외 추방을 당하고 볼테르가 처형되고 그의 친부의 정체가 밝혀지는 과정에서 어느새 시시한 이야깃거리가 되어 금방 식어 버렸다.

가만히 우리 대화를 듣고 있던 잔느는 우리의 언성이 조금 가라앉자 뒤늦게 대답을 했다.

“제론 자작도 몇 년 동안 볼테르 옆에서 전하께 정보를 제공해 주며 공을 세웠지요. 그가 황도로 오고 싶어 하였으니 슬슬 황도로 불러들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자작의 자녀들에게 아카데미 추천장을 써주시면 자녀 유학을 명목으로 쉽게 황도로 올 수 있을 겁니다.”

“이미 써줬는데 애들만 보낸대. 저번에 죽을 뻔하더니 생각이 바뀌었나. 황도의 권력 다툼은 너무 무서워서 못 오겠다나? 게다가 몰딘 지방이 또 영주를 잃었으니 거기도 수습해야지. 조만간 고모님께서 제론 자작에게 몰딘 지방을 영지로 하사하실 예정이야.”

“그럼 다 끝났군요.”

내가 아지트로 쓰던 집은 로엔에게 아예 선물로 줘버렸다. 어차피 집의 명의가 밀렌의 것이었기 때문에 내가 크게 신경 쓸 건 없었다.

마리에게도 이제 복수도 끝났으니 쉬라고 퇴직금과 함께 금품을 넉넉히 쥐여 주고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며칠 뒤에 그녀의 동생이 찾아와 은혜를 갚고 싶으니 뭐든 하게 해달라고 졸라 대는 바람에 요즘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다.

그녀 딴에는 죽은 줄 알았던 언니가 살아 돌아온 것도 모자라 속 시원하게 복수까지 하고 돌아왔다 하니 얼마나 기쁘겠느냐마는 나는 부담스러워서 죽을 맛이다.

“내가 더 신경 쓸 사람은 없는 것 같아. 나머지는 고모님께서 하실 일이고.”

“더 생각나는 것이 있다면 그때 처리하시면 됩니다. 이제 전하께서도 좀 쉬시고요.”

“보르데넨 협곡에서 있었던 아바마마와 어마마마의 사고도 제대로 조사가 마무리되어 가는 중이고.”

그것도 고모님께서 하고 계신다. 이젠 그 사건을 재조사하는 것에 대해 방해하는 사람이 없으니 순조롭게 잘 되어 가고 있다. 볼테르와 키옌이 죽어 그 죄를 물을 사람이 둘이나 사라졌다는 것이 안타까웠지만 둘이 죽었기 때문에 방해자가 사라진 것이니 참 아이러니하다.

물론 공국 쪽에 공범이 더 있긴 하지만. 이미 누군지는 안다. 공왕의 쌍둥이 형이자 볼테르의 친부.

나도 더 조사하다 알게 된 건데 아바마마께서는 볼테르가 황자가 아니라는 걸 알고 계셨던 것 같다. 키옌이 아바마마를 죽인 이유는 황위가 탐나서이기도 했겠지만 거기에 공국의 제 내연남을 끌어들일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들에 관해서 입막음해야 했기 때문이겠지.

서로의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맺었던 나와 공왕 사이의 오래된 거래는 그렇게 끝이 나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그래서 내 약혼식은 언제 해주신대?”

내가 투덜거리자 잔느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사안이 마무리되면 이야기가 나오겠지요.”

“이번 공적을 프란츠 공작과 분배하는 과정에서 크로이젠 공작이 꽤 마음이 상했다며. 그럼 얼른 약혼식이라도 해서 조금은 잠재워야 하는 거 아니야?”

잔느가 가만히 듣고 있다가 말했다.

“전하께서도 말씀은 대의를 위하는 척하시지만 사심이 더 많으시군요.”

“흥! 누가 국혼을 해달래? 국혼은 일 다 마무리되면 성대하게 할 거야. 약혼은 좀 간단하게 해도 되잖아.”

“폐하께서는 약혼식도 성대하게 해주시려는 요량이신 것 같습니다. 전하의 성년을 너무 급하게 치르느라 다시 했던 성년식은 조그맣게 지나가서 서운하고 미안하셨던 모양인지…….”

“내가 괜찮은데…….”

잔느도 말은 나 듣기 좋게 하려는 것 같지만 누가 고모님을 모를 줄 알고? 고모님 주변의 시녀들도 크로이젠 공작가와 얼른 약혼이라도 하라고 간언한다는 걸 나도 다 알고 있다. 그런데 한사코 버티는 이유가 궁금해서 슬쩍 황제궁의 시녀들에게 물어봤는데 그들의 말은 잔느의 말과는 좀 달랐다.

“폐하께서는 전하가 아까운가 봐요. 호호호!”

이렇게 된 이상 약혼이든 국혼이든 앞당길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고모님께서 미룬다고 하셔도 내게는 수가 있다.

나는 잔느를 방 밖으로 내보내고는 슬쩍 창문 쪽을 내다보았다. 비록 서월궁이 잘 보이지는 않지만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는 아르에게 말했다.

“서월궁의 단풍이 끝물이구나. 서월궁의 단풍과 호수의 절경이 기가 막히니 놓치기 전에 서월궁에서 지내.”

“내년에도 단풍은 있습니다.”

“내년 단풍은 내년 단풍이고, 올해 단풍은 올해 단풍이고.”

“아직 서월궁을 제가 차지하기엔 이릅니다. 뒷말이 나올 겁니다.”

“내가 그 정도도 못 막아 줄 것 같으냐? 명분은 얼마고 있으니 그대가 걱정할 일이 아니야.”

고요한 방 안에서 우리는 가만히 신경전을 벌였다.

“제 일입니다.”

“내 일이기도 하지.”

“전하께서 혼자 일방적으로 결정할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약혼하기 싫으냐?”

“그 얘기가 왜 나옵니까?”

“그럼 잔말 말고 서월궁에 가 있어. 이따 밤에 넘어갈 테니.”

아르가 대답하려다 말고 고개를 갸웃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예?”

“폐하께서는 국혼이든 약혼이든 날 보낼 생각이 아직 없으시다. 언제까지 생각이 바뀌실지 알 수도 없어. 그럼 나라고 아예 넋 놓고 기다리기만 할 줄 알고?”

“스캔들이라도 크게 터뜨리시게요?”

“그럴 생각이다.”

“어지간한 것으로 안 될 겁니다.”

알고 있다. 우리 둘이 그저 붙어 있는 것만으로는 어림없다. 그는 아직 내 호위 기사이고 검술 예동이다. 그가 내 옆에 24시간 붙어 있는 건 당연했다. 스캔들 같은 거 어지간해서 쉽게 터지지도 않을 거다.

“어지간한 거면 되지.”

“뭘 하시게요?”

“황손을 만들어야겠다.”

“…….”

그는 내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 건지 충격을 크게 먹은 건지 잠시 말이 없었다. 나는 그런 그를 향해 쐐기를 박았다.

“그저 소문만 내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그 정도 벌이면 여기저기서 서두르라 말이 나오겠지.”

“전하께서 하시는 소리가 무슨 소린지 아십니까? 역대 그 어느 황태자도 그런 기행은 벌인 적 없습니다! 300년 전의 황실 기록에는 그런 일을 벌였다가 파혼까지 간 사례도 있고요.”

“그때 파혼했던 황태자와 예비 황태자비의 일과는 많이 다를 거다. 그때는 여자 쪽의 부정이 어쩌고 하면서 모함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파혼까지 갔던 것이고.”

“뭐가 다릅니까?”

“이번에는 황태자가 아니라 황태녀니까. 감히 누가 나를 의심하겠느냐? 그대가 협조만 잘해 준다면 완벽한 계획이다.”

내가 배시시 웃자 그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제가 협조해 드릴 것 같습니까? 안 됩니다. 위험합니다. 전하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위험하지 않다. 내게는 책임질 수 있는 충분한 권력이 있다.”

“그건 알지만 제가 책임질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럽니다.”

“그대는 왜 책임을 질 수 없는데? 그대는 예정대로 국서가 되면 되는 것이고 크로이젠이라는 이름은 그대를 충분히 보호할 수 있는데? 대체 뭐가 문제인데?”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그럼 고자냐?”

장난치듯 그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내 발언에 그가 발끈했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저번에도 하려다 말더니 의학적인 문제가 있던 모양이구나.”

“그건 장난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장난도 하다 말고 사람이 그리 뜨뜻미지근해서야……. 어차피 하다가 말 것을 장난은 왜 시작했느냐? 할 거면 나처럼 끝이라도 보든가.”

“뒤끝이 몹시 기십니다.”

“그걸 이제 알았어? 난 그리고 그때 그대의 장난을 용서해 준다고 한 적 없다.”

“상당히 쪼잔하시고…….”

“그러니 뒷감당이 가능한 장난을 쳤어야지.”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면서 방 안에 그림자가 졌다. 분위기 좋게 어두워졌다.

나는 자리에서 슬며시 일어나 아르가 앉아 있는 곳으로 다가가 그의 무릎 위에 앉았다. 그러자 눈높이가 딱 맞았다.

“뭐 하시는 겁니까.”

“유혹하는 건데?”

그가 가소롭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걸로 되겠습니까?”

“유혹하려거든 이렇게 하시는 겁니다.”

그러고는 순식간에 나를 붙잡고 몸을 돌렸다. 세상이 뒤집어지듯 빙글 돌았다. 순식간에 시야 가득 천장이 들어왔다. 기다란 소파에 누워 있는 채로 꼼짝없이 그에게 갇혀 버렸다.

등 뒤로 푹신한 감촉이 느껴졌고 옆으로도 소파의 등받이가 벽처럼 가로막았다. 반대쪽 테이블 방향으로 뚫린 공간마저 단단한 팔이 울타리처럼 막았다. 그의 무릎이 내 양 종아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무심결에 손으로 밀어내려 하자 그가 반대쪽 손으로 내 두 손목을 한꺼번에 잡아 머리 위로 올렸다. 순식간에 팔도 다리도 무엇하나 꼼짝도 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곧이어 입 안 가득 들풀 향이 밀려들었다.

<본편 완결>

By.[Y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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