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14. 그 황녀님의 두 번째 결말
내 성년식은 어쩌다 보니 흐지부지 넘어가게 되었다. 성년식 생일이 미루고 싶다고 미뤄지는 날짜도 아니고 그렇다고 날이 더 늦어지기 전에 화려하게 하기엔 상황이 정신이 없었다. 그러느니 차라리 안 하고 말지.
그렇게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지나간 성년식 뒤에는 반역자 처단이 남아 있었다. 볼테르를 시작으로 브롬바드 공작을 비롯해 얽혀 있는 귀족 가문들이 하나씩 계보에서 지워졌고 사형 판결이 내려졌다.
그들의 작위를 박탈하고 재산을 몰수하는 것도 계속해서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다. 그걸 정리하는 데 앞으로 몇 년은 걸릴 것 같다.
“대광장으로 정말 안 나가 보실 건가요?”
벨이 물었다. 황궁 앞의 대광장에서 벌어지는 사형 집행을 말하는 것이었다.
“별로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닐 것 같은데.”
내 대답에 그녀가 말했다.
“하긴, 그건 그래요.”
단두대에서 사람의 목이 잘리거나 밧줄에 매달린 채 버둥버둥 몸부림치는 광경을 쳐다보면서 이겼다고, 살아남았다고 기뻐하고 싶진 않다.
“그나저나 폐황자의 사형은 미뤄졌다더라고요. 냉궁에 있는 태후가 뭔가 수를 쓴 게 분명해요. 태후는 냉궁에 갇혀 있어서 반역에 대해 몰랐었다는 이유로 폐위도 안 되고 아직 살아 있다고 하는데…… 생각을 해봐요! 그 여자가 몰랐을 리가 없잖아요?”
벨은 말을 할수록 점점 화가 나는지 아직은 황족인 태후에게 이 여자 저 여자 해가며 열을 올렸다.
벨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키옌이 이 난리 통에서 폐위도 되지 않았고 볼테르도 폐위되는 선에서 그치는 것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떠들었다. 에오넬 황제가 보기와 다르게 잔정이 많았던 것 같다는 둥 심하게는 물러 터진 인간이라고 수군거렸다.
나는 피식 웃으며 흘리듯 중얼거렸다.
“가문도 망하고 냉궁에 유폐된 사람이 어떻게 힘을 쓸까…….”
그러자 함께 있던 유모가 벨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벨의 말이 맞아요. 더구나 그 둘을 살려 두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폐하 성격과 맞지 않고요. 전하께 위험이 될 만한 건 아예 싹을 잘라 버리실 분입니다. 폐황자를 살려 두면 그 자체로 위험 요소인걸요. 그를 복권하려는 움직임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어요. 설령 그를 죽인다고 해도 태후가 자리를 지키는 한 어떻게든 복수하려 들 겁니다.”
“기다려. 곧 알게 될 거야.”
그때 볼테르가 갇힌 감옥으로 염탐을 보내 놓았던 페일이 내 궁으로 돌아왔다.
“전하!”
그는 잔뜩 놀란 목소리를 숨기지 못하고 소리쳤다. 급히 달려와 숨이 차는 듯 한숨에 말을 하고는 여러 번 헉헉거리기를 반복했다.
“폐황자가, 폐황자가! 지병이 도졌다는데. 헉헉!”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벨이 고개를 갸웃했다.
“지병이 있었다고요?”
“지병을. 숨겼다는데. 그 이유가……!”
“알고 있다. 좀 쉬어.”
“예?”
“마나 뒤틀림이겠지. 공국 귀족들에게서 가끔 보이는 유전병. 그거 전하러 온 거 아닌가?”
내 얘기에 페일은 아까보다 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러려고 그를 살려 둔 거니까. 조만간 폐황자의 혈통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생길 거다. 곧 태후도 잡음 없이 폐위시킬 수 있겠지.”
나는 곧 이번 일을 해결해 줄 중요한 증인, 오래전 황후궁에서 쫓겨났던 시녀 마리를 떠올렸다. 그녀는 아직도 이름을 메리로 바꾼 채 내 궁에서 드레스룸의 청소 하녀로 생활하고 있다.
“때가 되었다. 이제 메리를 고모님께 보내.”
***
같은 시각, 키옌은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었다.
곧 밖으로 심부름을 나갔던 시녀가 돌아왔다. 태후의 시녀들은 대부분 가문이 이번 반역에 연루되어 작위를 박탈당했고 그녀는 키옌에게 딱 한 명 남은 시녀였다.
키옌은 자리를 박차고 달려나가 그녀를 붙잡고 다급히 물었다.
“가져다주었느냐?”
“그, 그것이…….”
시녀는 울상을 지으며 유리병을 키옌 앞에 꺼냈다. 가지고 나갔던 것을 그대로 들고 돌아온 것이었다.
“왜 또 그냥 가져오느냐?”
“황자 전하께서 몸이 좋지 않다고…… 사식을 들이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이것이 약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리 말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폐하께서 궁의를 보내어 병의 원인을 찾고 있고 그 전까지는 궁의의 진단 없이 아무 약이나 함부로 드시는 것이 더 위험하다면서…….”
마나 뒤틀림이라는 사실이 세간에 밝혀져도 위험하고, 그걸 찾지 못한다고 해도 이렇게 계속 약을 먹이지 못하는 상황이 와도 위험하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상황에 키옌의 속이 타들어 갔다.
“게다가 혹시 독일지도 모른다면서 이 약의 성분이 확인되면 그때 들이는 것을 허락해 준다고 폐하의 명으로 궁의가 약을 한 잔 받아서 가지고 갔습니다.”
시녀가 그나마 희망적이라면서 다독였다. 하지만 그 말을 듣는 키옌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이 시녀는 시키는 대로 약만 전달하려는 것일 뿐 볼테르의 지병이 뭔지, 이 약이 무슨 약인지 모른다. 진실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아서 측근에게도 숨긴 것이 도리어 화근이 되었다.
그때 갑자기 기사단 하나가 냉궁으로 들이닥쳤다.
“폐후를 끌어내라!”
“폐후라니 그게 무슨……! 놔! 놓으란 말이야!”
키옌이 기사단에 의해 질질 끌려나가고 그것을 말리려던 시녀 역시 함께 끌려 나왔다. 냉궁 앞에는 일찌감치 소식을 접했던 궁인들이 몰려나와 힐끔거리며 수군댔다.
“어떻게 된 거래요?”
“못 들었어요? 폐황자가 그동안 숨겨온 지병이 있었는데 약을 못 먹어서 그게 감옥에서 도졌대요. 근데 그게 황실에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유전병이었다잖아요.”
아멜리아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자신의 궁에서 의도적으로 궁인들에게 소문을 퍼뜨렸고, 그 궁인들은 폐위되어 끌려 나오는 태후를 구경하며 소문을 더욱 널리 퍼뜨렸다. 그들은 자신들이 퍼뜨리고 있는 소문이 황녀의 의도였는 줄도 모르면서 뜨겁게 달아오른 이슈를 가장 먼저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운 듯 굴었다.
“어머, 어머! 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뻔하지, 뭐. 씨가 달랐는데 태후가 숨겼던 거겠지.”
“왜, 폐황자가 이른둥이였다잖아요. 그게 진짜 이른둥이였겠어요? 뭔가 있었던 거지. 그때도 잠깐 말이 나왔다는데 상황 폐하께서 황실을 욕되게 하지 말라고 하시는 바람에 여태 살아남은 거지.”
“세상에나! 상황 폐하께서 그때 죽을 걸 살려 줬더니 모자가 은혜를 원수로 갚았네.”
경멸에 찬 시선 속에서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끌려나가는 키옌의 얼굴은 수치심으로 물들었다.
“이건 모함이다! 모함이란 말이다! 이미 몇십 년 전에 상황 폐하께서 근거 없는 소문이라고 하신 말씀을 잊었느냐?”
“그때는 근거가 없었지만, 지금은 근거를 찾았습니다. 시녀를 통해 사식으로 넣으려던 민트티가 마나 뒤틀림을 누르는 약이라고 하더군요.
아카데미에 그쪽 분야를 몇 년째 꾸준히 연구하고 계신 교수님께서 약의 정체를 확인하셨습니다. 그 교수님께서 마나를 볼 수 있는 능력자를 조수로 데리고 있어 폐황자의 병도 정확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태후께서는 폐황자가 앓는 병이 무슨 병인지 알았으면서도 숨겼다는 말이 되겠지요.”
아멜리아가 후원하던 아카데미의 고대 마법학 교수와 로엔의 합작으로 사건은 누가 손을 쓸 새도 없이 빠르게 드러났다. 손을 쓸 수 있는 살아남은 볼테르파 귀족들의 이목이 온통 사형장에 쏠려 있는 사이, 에오넬은 온 황궁을 입맛대로 들쑤실 수 있었다.
그렇게 한 시대를 풍미했던 권력자가 가장 비참한 때에 가장 추하게 몰락하고 있었다.
***
반역에 연루된 귀족들이 사형당한 직후에는 볼테르가 상황의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이 제국 전역에 퍼져나갔다. 사람들은 경악했고 태후를 욕했다.
사람들은 태후도 사형을 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에오넬 황제는 그녀를 외국으로 추방했다. 키옌은 추방되는 길에 독을 먹고 자살했다고 한다. 그것이 자살한 것인지 자살을 당한 것인지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그녀는 그렇게 사람들에게 강력한 충격을 안겨 주었던 것치고는 꽤 조용히 죽었다. 덕분에 그녀가 죽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이 더 많았다.
처음부터 황자가 아니었던 볼테르는 더는 폐황자라고도 불리지 않게 되었고 반역 주모자로 처형당했다.
또한 볼테르의 친부가 누구인지 찾는 과정에서 마나 뒤틀림은 상당히 중요한 증거가 되었고 태후의 부정을 목격했었던 황후궁 옷방 시녀 마리는 중요한 증인이 되었다. 그걸 근거로 라파트니 공왕은 자신을 위협하던 쌍둥이 형제를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빠진 거 있나? 반란을 진압한 공적은 크로이젠 공작가랑 프란츠 공작가가 사이좋게 나눠 가지기로 했고…….”
내 말에 아르가 대놓고 인상을 찌푸렸다.
“사이좋게 나눈 건 아닙니다. 전하께서 프란츠 공작가로 가시는 바람에 폐하께서 그 공적을 나누느라 얼마나 골머리를 싸매신 줄 아십니까?”
“약간 공적 분쟁이 있었다고는 들었어. 너는 괜찮았냐?”
“괜찮았겠습니까? 전하를 프란츠 공작가로 모시고 간 게 저였습니다. 아버님께서 곧 황족이 될 몸이라 죽이지 못하게 된 게 한이라고 하시는 걸 어머니께서 간신히 말려 주셨습니다.”
“설마 진짜 죽일 생각이셨겠느냐?”
“적어도 저는 그날 아버지 손에 죽는 줄 알았습니다. 한동안 집에는 못 들어가게 될 것 같습니다.”
“서월궁이 다 정리되었으니 거기서 지내든가.”
아르에 대한 이야기는 더욱 크고 굵직한 사건들이 연달아 터지면서 크게 소란이 일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흘러가 버렸다.
사실 이런저런 소문이 돌거나 뜨거운 이슈가 되는 것보다는 그의 기사단 서류가 과거에 세탁되었던 것을 손보는 것이 더 골치가 아플 줄 알았는데 생각 외로 그렇지는 않았다. 황궁에 피바람이 부는 사이에 기사단도 바빠진 모양인지 생각보다 허술해져 있어서 서류를 전부 다시 세탁하고는 얼렁뚱땅 넘어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