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그제야 더디게 흐르던 사고가 제시간으로 돌아왔다. 방금의 기억이 빠르게 되감겼다.
“서로 동등하지 못한 관계에서 일방적으로 장난을 당하는 게 어떤 기분인지 전하께서는 모르시겠지요. 전하께선 그런 걸 당해 본 적이 없으실 테니.”
거기까지 생각나자 다시 머리가 멍해졌다. 눈을 깜빡거리면서 아르를 쳐다보는데 그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마치 표정으로 지금 내 기분이 어떠냐고 묻는 것 같았다.
‘기분이 어떠냐고?’
내 상태를 천천히 꼼꼼하게 훑었다.
아직도 심장이 두근거린다. 방금 일이 어디서부터 장난이고 어디까지가 진심인지도 알기 힘들다.
그보다 나도 마치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넘어가야 맞는 건지도 판단이 안 된다. 단순한 보복심리였던 것인지 아니면 사실은 그걸 가장해서 떠보려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벌떡 일어나 침대로 성큼성큼 걸었다. 뒤꿈치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나는 재빨리 침대 위로 숨듯이 기어올라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이불을 덮고 꼭꼭 숨어 버렸다.
머리맡에 놓인 베개들을 몇 개 집어 이불 속으로 끌어당겼다. 베개를 품에 안고 몸을 웅크리자 이불이 사락사락 소리를 내며 어깨와 팔다리에 감겼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는 마치 그것이 누군가의 손길처럼 느껴졌다.
눈을 더 질끈 감고 고개를 끌어안은 커다란 베개 속에 파묻었다. 입술 끝에 폭신하고 부드러운 베개가 닿았다.
보송한 비누 냄새 사이로 어쩐지 목화솜의 풀 냄새가 섞인 듯한 착각이 일었다.
닿을 듯 말 듯 했던 그 순간이 떠올랐다. 닿았다면 어땠을까, 어떤 느낌이었을까?
이불 속보다 더 따뜻하고 솜을 채운 베갯잇보다 더 부드럽고 말랑말랑하고 그러면서 나를 아득히 뛰어넘는 강한 힘에 속수무책으로 짓눌리는 상상이 겹쳐졌다. 순식간에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이불을 걷어차고 앉았다.
‘내가 드디어 미쳤나 보다. 반역이다 뭐다 정신이 없어서 사람이 한계에 몰리니 미쳐 가는 게 확실하다!’
고개를 휙 돌려 아르가 있는 쪽을 바라보자 그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소파에 앉아서 눈을 감고 잠이 든 듯 가만히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쳐다보자 그가 슬며시 눈을 떴다.
“왜 안 주무십니까?”
천연덕스러운 질문에 화가 불쑥 솟구쳤다.
“……너 같으면 잠이 오겠느냐!”
나는 이불을 다시 뒤집어쓰고 눈을 꼭 감았다.
***
어느새 아침이 되었다. 밤사이 황궁에서 벌어졌던 일은 슬슬 마무리되어 간다는 소식도 들렸다.
프란츠 공작과 그의 가족들은 저택으로 무사히 돌아왔고, 할바마마와 고모님께서는 각각 크로이젠 공작 저택과 파피란 공작 저택에 계신다고 했다.
아르는 새벽녘 승전 소식이 들리고 나서는 내가 일어나기 전에 다른 방에서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하다가 오후가 되어서야 얼굴을 비추었다.
“그런데 전하,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뭐가?”
“왜 하필이면 프란츠 공작저로 온 겁니까. 가만 생각해 보니 이럴 거였다면 크로이젠 공작저나 파피란 공작저로 가셔도 되었습니다.
그쪽은 이미 확실한 아군이 아니었습니까. 게다가 저번에 로이드 크로이젠과 민티아 사이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도 그렇고……. 그때 황실이 발을 빼면서 크로이젠에게 볼테르가 일으킬 반역에 대해서 전공을 일체 넘기기로 말을 맞추었다고 알고 있는데요.”
“그건 고모님과 크로이젠 공작 사이의 일이고, 나는 모르는 일이야.”
“그래도 사실은 전하의 계책이 아니셨습니까.”
“그건 맞는데,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일이라고 하기로 되어 있으니까. 그러니 내가 프란츠 공에게 반역자를 잡는 공을 조금 떼어 넘긴다 해서 크로이젠이 나한테 뭘 어쩔 건데? 그리고 난 몸을 피하고자 이곳에 온 게 아니야. 프란츠 공을 끌어들이러 온 거지.”
내 말에 아르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동시에 그 밑에는 크로이젠이 가져갔어야 할 공적의 절반을 내가 뚝 떼어다 프란츠 공작에게 넘겨 버린 것이 불만스럽다는 분위기도 깔려 있었다.
“프란츠 공이 황궁 안에 갇혀 있으니 나는 이곳에서 프란츠의 기사에게 프란츠 공작을 구하러 가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로 꼬드겼어.
그리고 그러기 위한 훌륭한 명분도 만들어 주었고. 그렇게 죽기 살기로 안전한 중립을 고수하던 프란츠 공작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공식적으로 내 편이 된 거야. 황녀파 귀족이라는 프레임을 강제로 쓰게 된 거지. 그 프레임을 다시 벗고 싶어도 무르기 힘들걸? 이미 승리한 이상 굳이 벗어 버릴 이유도 없고.”
“프란츠 공작을 확실한 아군으로 만들어 버린 황족은 아마 전하께서 처음일 겁니다.”
“그렇겠지.”
나는 자랑스럽게 어깨를 폈다.
“그런데 전하.”
“응?”
“자정이 지나면 서월궁에서 보자고 하셨던 이유가 뭡니까?”
“아!”
그러고 보니 내 생일 전야 파티 날 자정이 지나면 서월궁에서 줄 것이 있다고 쪽지를 남겨 놨었는데 정신이 없어서 잊고 있었다. 나는 아르의 허리에 매달린 검을 검집째로 쥐었다.
“이거 좀 잠깐 줘봐.”
곧 그가 검집을 풀어 내밀었다. 그러고는 내가 하는 모양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바닥에 앉아 봐.”
그러자 그가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뭘 하시려고요?”
“좋아. 그대로 눈 꼭 감고 있어 봐.”
나는 그가 눈을 제대로 감았는지 눈앞을 손가락으로 찌르는 시늉을 한 번 하고는 검집째 검을 들어 올려 그의 머리 위에 얹었다. 생각보다 묵직했다.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오래전부터 성년이 되면 가장 먼저 하고 싶었던 일을 진행했다.
“나 아멜리아 플라티나 체르무트는 그대를 나의 기사로 임명하여 군주로서 그대의 기사 작위와 명예를 인정하고 신의(信義)를 지킬 것을 맹세한다.”
“……!”
“뭐 해? 무거워. 얼른.”
“나…….”
그가 한참을 뜸을 들였다. 그러다가 하라는 건 않고 물었다.
“그런데 갑자기 기사 서임은 왜 시킵니까?”
“여태 안 했다며. 나 때문에 서임식 못 했다며.”
“그거 꼭 지금 해야 합니까?”
“내가 성년이 되면 할 수 있게 되는 일 중에서 가장 하고 싶었던 거니까! 가장 먼저 하고 싶었던 일인데 일이 이렇게 되어 버려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아니라 좀 아깝네. 그래서 내가 주는 기사 작위는 받을 거야, 말 거야?”
그는 3초 정도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알테어 폰 크로이젠은…….”
“……?!”
이걸 이렇게 말한다고?
“아멜리아 플라티나 체르무트 황녀를 주군으로 모셔 주군의 안전과 명예를 위해 헌신하며 명이 다할 때까지 충성을 바칠 것을 맹세합니다.”
나는 잠시 얼떨떨한 기분에 휩싸여 손에 힘이 풀렸다. 검집에서 잘그락거리는 소리가 울리자 황급히 검을 가로로 들어 아르에게 하사하듯 돌려주었다. 그는 두 손으로 공손히 검을 들고는 다시 허리께, 제자리에 매었다.
이때까지 그는 아무런 설명도 없었다. 뭐라 변명을 할 줄 알았는데 그것도 없다. 마치 내 반응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두 주먹에 힘이 꽉 들어가면서 숨이 거칠어졌다. 몸속에서 방황하는 열기를 주체하기 힘들어 나는 그의 정강이를 냅다 차버렸다.
“윽!”
뒤로 살짝 물러나며 인상을 찡그린 아르가 얻어맞은 쪽 다리를 슬쩍 움직이며 아픈 걸 참는 듯 꿈틀거렸다.
“그대는 내가 바보인 줄 아느냐?”
“예?”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크로이젠 공작가에 혼담을 넣은 줄 아느냔 말이다! 내가 설마 무턱대고 약혼 상대를 바꾸자고 했을까. 물론 그 당시에는 알테어 크로이젠이 누구인지도 몰랐고 크로이젠의 이름이 더 중요했고 지금도 그 이름이 중요한 건 사실이야. 그러니 설령 몰랐더라도 혼담은 어떻게든 밀어 넣었겠지만!”
“……!”
“적어도 나는 그대가 이렇게까지 시간을 끌 줄은 몰랐단 말이다!”
나는 맞은편 정강이도 냅다 차버렸다.
“아윽!”
“내 차마 황실의 후사를 위해서 그대의 고간을 걷어차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기거라!”
그는 아픈 다리를 뒤로 빼내며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저한테 크로이젠의 이름 말고 다른 건 필요 없다고 하신 건 전하십니다. 혼담을 넣은 이유에 그것 말고 다른 가치는 없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래서 내가 물어봤잖아! 정략혼 말고 연애혼을 원하면 연애해 주겠다고!”
“그게 엎드려 절 받는 거 아니면 뭡니까? 그런 건 싫습니다.”
“그게 싫었으면 빨리 사실대로 말했어야지.”
“그걸 말했으면 전하께 제 의미는 크로이젠이라는 이름 말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엥?”
나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서 잠시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대체 무슨 뜻인지 알아먹을 수가 없었다.
“그게 왜 그렇게 되는데?”
그걸 말한다고 해도 아르는 여전히 아르였다. 거기서 추가되는 건 그가 알테어와 동일 인물이라는 것뿐이었다. 그것 말고 변하는 건 없었다.
“그게 그렇게 됩니다. 그리고 그건 제게는 무엇보다 중요한 거였습니다.”
여전히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일단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왜?”
“왜냐니…….”
그 순간 그가 한 걸음 성큼 앞으로 다가왔다. 동시에 시야 가득 그가 들어왔다. 훅 좁혀진 거리감을 제대로 느낄 새도 없이 숨이 턱 막힐 만큼 강한 압력이 입술 위로 올라왔다.
“읍!”
말랑한 촉감과 따뜻한 바람이 얼굴을 감쌌다.
입술 위에서 부드럽게 끌어당겼다 밀어내는 느낌과 함께 숨이 빠져나갔고 그때마다 온몸에서 힘도 함께 빠져나갔다.
몸에 힘이 전부 빠졌다고 생각될 즈음 참았던 숨이 조금씩 돌아왔다. 어디선가 느껴지는 흐름에 몸을 맡기자 세상에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짜릿함이 전신을 휘감았다.
그러다 잠시 후에는 숨을 들이쉴 때마다 들풀 향이 들어왔고 내쉴 때마다 긴장이 한 올 한 올 풀렸다.
이윽고 개울물에 잔잔하게 흐르는 듯하던 시간이 끝났다. 생각보다 심장이 쿵쾅거리지 않았다. 오히려 편안할 정도로 차분했다.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서 되는대로 지껄였다.
“의사 표현이 과격하구나.”
그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대답했다.
“하아……. 애정 표현을 꼭, 항상 그따위 말로 하셔야겠습니까?”
그때였다.
똑똑똑-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전하, 황궁에서 소식이 왔습니다.”
승전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