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바, 반역이요? 그게 제가 알고 있는 그 단어가 맞습니까? 세상에……!”
집사가 혼이 나간 사이에 공작가의 기사단장이 정신을 가다듬고 침착하게 내게 말했다.
“몸을 피하러 오신 거라면 숨겨 드리거나 황도 밖으로 도망치도록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그가 진지하게 제안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도망치러 온 것이 아니다. 폐하를 구해야 하니 공작의 대리인에게 제국 귀족의 의무를 다하라 전하러 온 것이지. 더구나 그대들은 공작을 구해야 할 테니 내게 반기를 들 이유가 없지 않겠느냐?”
곧 그가 곤란하다는 듯 침음성을 흘렸다.
“흠……. 그러나 저희는 전하를 피신시키는 것 이상의 행동을 하기 힘듭니다. 첫째로 문이 닫힌 황궁에 쳐들어갈 확실한 명분과 뒷일을 책임질 사람이 필요합니다.
물론 명분은 있으나 저는 그 일을 책임질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둘째, 제국법에 따라 황도 내에서 귀족은 경비와 경호를 위해서 필요한 일정 숫자 이상의 사병을 주둔시킬 수 없습니다. 따라서 현재 저희에게는 반란군을 진압할 만큼 충분한 병력이 없습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시계를 슬쩍 바라보았다. 자정까지 세 시간.
“그건 내가 만들어 줄 수 있다. 앞으로 세 시간만 나를 보호해.”
기사단장의 시선이 나를 따라 시계로 향했다. 그러고는 갑자기 얼굴을 굳히고는 내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나는 심호흡을 크게 하고 목에 빳빳하게 힘을 준 채 또박또박 말했다.
“세 시간 후, 자정이 지나면 나는 성년이 된다. 나의 명분은 반역자 볼테르가 무단 점거한 황궁을 되찾고 황제 폐하와 상황 폐하를 무사히 구출하는 것이다.
황제가 억류된 지금, 성년이 된 황녀는 황제의 대리로 그 일을 책임질 수 있는 위치에 있다. 그리고 앞으로 세 시간 후 나는 황제의 대리인 자격으로 제국의 비상사태를 선포할 것이며, 제국법에 따라서 그대들을 비롯해 황도에 있는 귀족들의 사병을 제국군으로 징집하고 그대를 사령관으로 임명하도록 하겠다.”
***
나는 세 시간 동안 프란츠 공작저의 공작 집무실에 앉아 서류를 작성했다. 제국의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황도 내에 있는 귀족들의 기사들과 사병을 제국군으로 징집하겠다는 내용의 명령서였다.
‘황궁이 점령되었을 때 황태자가 옥새를 들고나오는 이유는 이것 때문이야. 옥새를 지키기 위함도 있지만, 황제의 대리인 자격을 행사하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서류에 옥새를 선명하게 찍었다.
‘이게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이야.’
마지막으로 황도 성곽의 남문을 열도록 명령서를 하나 더 작성해 옥새로 찍었다. 황도 밖에서 미처 들어오지 못하고 있던 크로이젠 공작령, 파피란 공작령, 세르피스 후작령에서 온 우리 군대가 황도로 들어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곧 자정을 알리는 시계의 종소리가 적막과 긴장에 휩싸여있던 저택을 울렸다.
뎅- 뎅- 뎅-
열두 번의 종이 울리자 프란츠 공작저의 마당에 기사단장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황녀 전하께서 황제 폐하의 대리인 자격으로 내리는 명령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황명이다. 황명을 황도 내의 모든 귀족에게 전하라!”
곧 기사들이 병사들을 데리고 저택 밖으로 나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황도의 귀족 저택에서 경비와 경호를 맡는 사병은 각각 놓고 보면 그 수가 많지 않지만 한데 모아 놓으면 그 규모가 제법 될 거다.
한참이 지나 나는 황도 밖에 있던 아군의 군대와 함께 방금 징집한 귀족의 사병들이 황궁 안으로 진입해 반란군을 제압하고 있다는 보고를 들을 수 있었다.
“이기고 있나?”
“아직 승리를 확신하기 이르지만 무난하게 진압되고 있다 합니다.”
집사는 전령이 보내온 편지를 내게 건네었다.
그렇게 보고를 듣고 잠시 후 나는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몹시 피곤한 밤이었다.
***
잠에서 깨어난 건 새벽녘이었다. 분명 프란츠 공작의 집무실에 있던 소파에 앉아 있다가 잠깐 눈을 감은 것 같은데……. 나는 어느새 다른 방의 침대에 누워 있었다. 손님용 방인 듯했다.
옷도 황궁에서 입고 나왔던 가죽옷이 아니라 사이즈가 조금 큰 잠옷 차림이었다. 땀에 젖었던 몸은 깔끔한 것이 아무래도 공작가의 하녀들이 물수건으로 닦아 준 듯하다.
창문에 친 커튼 틈으로 횃불 빛이 일렁이며 들어와 방 안은 불그스름했고 밖은 약간 소란스러웠다.
몸을 일으켜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러자 침대 근처의 길쭉한 소파에 아르가 옆으로 누워 새우잠을 자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터벅터벅 걸어가 그 앞에 주저앉았다.
‘자나? 그래, 너도 힘들었겠지.’
손가락으로 쿡 찔러 보려고 조심스럽게 팔을 드는 순간.
“안 잡니다.”
깜짝 놀라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안 자는데 왜 이러고 있어?”
“지금 경호 인력이 충분하니 좀 쉬는 겁니다. 전하께서도 체력을 비축하십시오. 무슨 일이 다시 생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그는 몸을 일으켜 소파에 앉아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을 보자 다시 슬쩍 장난기가 돋았다.
“깨어 있었으면서 내가 다가와도 자는 척 누워 있고, 이제는 나보다 높은 곳에 앉아서 내려다보고 있다니, 무엄하구나.”
“그럼 전하께서 일어나셔서 상석에 앉으시면 됩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옆에 있는 커다란 1인용 소파를 가리켰다.
“……너 변했어.”
“뭐가 말입니까?”
“옛날에는 이렇게 무례하지 않았단 말이다.”
“부당한 것에 부당하다고 말하고 살기로 했습니다. 가만히 있으니 저를 호구로 보는 사람이 많아서요.”
뜨끔!
순간 가슴에 얇은 바늘이 날아와 꽂혔다.
“그거…… 내 얘기냐?”
“딱히 전하만 지칭한 건 아닙니다. 혹시 찔리는 거 있으십니까?”
나만 지칭한 건 아니라니, 그건 나 말고 다른 사람도 있지만 일단은 나도 맞단 소리 아닌가.
“흥! 나는 그대에게 항상 원하는 걸 말하라고 했어. 제대로 대답하지 않은 건 그대였지.”
“그러니까 지금 원하는 걸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일부러 이런 상황 만들어 놓고 저에게 무례하다 따지면서 놀리지 마시고 주무시라고요. 당하는 사람은 재미없습니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소파 앞에 쪼그려 앉아서 아르를 올려다보았다.
“그럼 앞으로 내가 그대를 놀리지 않으면 되는 거냐?”
“서로 동등하지 못한 관계에서 일방적으로 장난을 당하는 게 어떤 기분인지 전하께서는 모르시겠지요. 전하께선 그런 걸 당해 본 적이 없으실 테니.”
조금 화가 난 듯한 날카로운 눈, 단호한 입술. 그는 화가 났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런 그의 모습에 매료된 듯 어느새 그걸 감상하고 있었다.
그러자 그가 몸을 앞으로 기울여 가까이 다가왔다.
왠지 물러서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가 풍겼다. 이런 느낌은 생소하면서도 짜릿했다. 갑자기 늘 누군가의 위에만 서 있던 내 위로 누군가가 밟고 올라선 기분인데 이상하게 싫지 않았다.
아르의 손이 내 이마를 쓸며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손이 목 뒤로 넘어갔다.
나도 모르게 엉덩이를 움직여 뒤로 물러나려는데 목 뒤로 넘어가 있던 손이 나를 단단히 받쳤다. 곧 그 엄지손가락이 볼을 감싸듯 내려와서 입술 끝을 지그시 눌렀다.
“권력으로 사람을 누르는 장난이 재미있으셨습니까? 그럼 물리적인 힘으로 하는 장난은 어떨 것 같습니까? 둘 중에 뭐가 더 가까울 것 같습니까? 법, 아니면 힘? 설마 힘도 전하께서 위에 계실 거라 여기시는 건 아니겠지요.”
“무, 무례하다.”
“원래 장난이란 건 대개 무례한 겁니다. 그리고 무례는 용서하십시오. 용서하기 싫으셔도 용서하실 수밖에 없을 겁니다. 저는 아직도 앞으로도 전하께 이용가치가 충분하지 않습니까.”
어느새 이마가 맞닿고 까만 눈동자가 내 눈을 집어삼킬 만큼 가까운 거리로 다가왔다. 그가 숨을 쉴 때마다 들풀 향 섞인 바람이 입술 끝에 불어왔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렸다.
배고픈 맹수의 발톱 밑에 깔린 초식동물이 된 듯 숨이 막혔다. 그런데 이대로 잡아먹혀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생겨났다. 아니, 이대로 먹혀 버리고 싶기도 했다.
‘괜찮잖아. 어차피 아르가 알테어고 알테어가 아르니까.’
서서히 자기 합리화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찰나의 순간 희미하게 남은 이성을 아슬아슬하게 붙잡았다.
‘하지만 아직 아르는 내가 그걸 안다는 사실을 몰라.’
그렇다면 이대로 화를 내면 아르는 상처받을까? 반대로 가만히 있으면 알테어는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코앞에 있던 얼굴이 살짝 떨어지는가 싶더니 볼을 스쳤다. 입술이 귓가로 다가왔다. 귓불에 닿을 듯한 입술에서 얇은 숨이 흘러나왔다.
그 순간 나는 가까스로 적절한 말을 생각해 냈다.
“내 약혼자는 그대도 아는 사람일 텐데.”
“마음에도 없는 정략혼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쪽에서는 크로이젠이라는 이름만 빌려올 수 있으면 된다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런 정략혼을 하는 귀족들은 합의하에 각자 따로 정부를 두기도 합니다. 알면서 다들 쉬쉬할 뿐이고.”
“그러니 그대의 말은 지금 나더러 그대를 정부로 두어라…… 이 말이냐?”
“역대 황제 중에서도 정부를 두지 않은 황제가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 에오넬 폐하께도 정부가 최소 셋은 있다더라는 소문을 들어 보셨습니까. 그중에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지낸 호위 기사도 있습니다. 그저 소문일 뿐 진실은 당사자들밖에 모르겠지만요.”
그렇게 말하는 그의 말투가 마치 알테어를 자기 자신과는 별개의 존재로 인식하는 것 같았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그게 그대가 원하는 것이냐?”
그 순간 목 뒤를 받쳐 끌어당기던 손이 느슨해졌다. 그리고 한껏 누그러진 목소리가 들렸다.
“제가 원한다고 하시면 진짜 하실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