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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녀님이 두 번째 삶을 사는 방법-144화 (144/148)

144화

“네가 무슨 자격으로 그런 걸 결정해!”

“저요? 섀도 나이트의 단장 자격으로요! 그래서 전하를 궁 밖으로 데려갈 호위는 예동님이 하기로 했어요. 전 보시다시피 제 누이를 지켜야 해서요. 저랑 아르 말고 나머지는 지금 파티장에 계신 황제 폐하를 지키기로 했고요. 사실 전 이 계획에 찬성하기 싫었는데 제 누이가 전하 대신 여기 있겠다고 자처해서 어쩔 수가 없었네요.”

내가 로엔을 쳐다보자 로엔이 싱긋 웃어 보였다.

“전하가 아니었다면 동생을 만나지 못했을 거예요. 은혜를 갚고 싶었어요. 그러니 이번에도 전하 대신 여기 있게 해주세요.”

말문이 막혔다.

‘내가 한 게 뭐가 있다고?’

나는 밀렌이 필요했고 그의 진심 어린 충성을 받아 내기 위해서 그녀를 찾아냈을 뿐이었다. 내게는 그것만 있어도 충분했다. 로엔의 마음까지는 처음부터 고려 대상이 아니었기에 지금의 이런 상황은 어찌 보면 사치였다.

곧 내 호위대장이 다가와 몸을 낮추고 말했다.

“이쪽에 호위가 몰려 있을수록 그들은 여기에 전하께서 갇혀 있다고 생각할 겁니다. 저희가 시간을 벌고 있겠습니다. 부디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게 조심해서 다녀오시길 바랍니다.”

어쩐지 내가 더더욱 나쁜 사람이 되어 가는 것만 같았다.

“그대들은 나를 내 사람들을 버리고 도망치는 비겁한 군주로 만들 셈이냐? 안 가! 아니, 못 간다!”

그 순간 밀렌이 뒤에서 나를 감싸 안으며 입과 코에 젖은 손수건을 가져다 대었다.

“그럴 줄 알았어요…….”

그들이 무엇을 하려는지 눈치챈 나는 있는 힘껏 숨을 참았지만 더는 버티기 힘들었다. 결국에 견디지 못하고 숨을 들이마시자 처음 맡는 냄새가 훅 끼쳤다. 그것이 어떤 향인지 채 파악하기도 전에 머리부터 멍해졌다.

***

어느새 희미하게 의식이 돌아올 무렵 내가 정신을 잃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동안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모르겠다.

어딘가에 들려서 아니, 업힌 건가? 어쨌든 하염없이 흔들리며 어딘가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몽롱했고 기운이 없었다. 손가락을 힘겹게 꼼지락거리자 흔들리던 것이 멈추었다. 그러자 주변 환경이 실눈 사이로 들어왔다. 한밤중이었고 산속이었다.

‘아, 산을 타고 도망치는 중이구나.’

산의 흙냄새에 섞여 들풀 냄새가 났다.

“그래서 전하를 궁 밖으로 데려갈 호위는 예동님이 하기로 했어요.”

거기까지 떠오르자 내가 지금 아르의 등에 업혀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어디 가?”

“황도 밖으로 피신해 있다가 상황이 정리되면 황궁으로 돌아갈 겁니다.”

“그래서 황도 밖 어디?”

“아직 계획은 없습니다. 어디든 일단 볼테르의 군대가 진격하는 방향과는 최대한 멀리, 안전한 곳으로 갈 겁니다.”

“내려 줘. 이제 걸을 수 있어.”

나는 아르의 등에서 내려와서 뒤돌아 황궁 방향을 쳐다보았다. 황궁의 몇몇 건물들이 불에 활활 타고 있었다. 그 때문에 한밤중임에도 이 산속까지 환한 느낌이었다.

“전하께서 옥새를 들고 도망쳤다는 걸 태후가 알면 곧 추격대가 붙을 겁니다.”

아주 오래전 꿈속에서 보았던 풍경과 비슷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첫 번째 삶. 어쩌면 여기는 그때 내가 죽었다던 그 산속일지도 몰랐다.

“똑같구나.”

“……이번엔 다를 겁니다. 확실히 다른 상황입니다. 볼테르의 반역을 예상했고 대비도 해왔지 않습니까.”

아무리 대비했다고는 해도 황궁의 문이 뚫린 것은 여기서도 보였다.

“우리가 대비한 건 황도 성곽에서의 공성전이었을 뿐, 그 엄청난 대군이 황도로 잠입한 상황을 대비했던 건 아니야.”

게다가 황위 계승권자가 옥새를 들고 황궁을 탈출한다는 것은 정말 최후의 보루였다. 그 정도 상식은 나도 있었다. 나는 그런 상황을 비꼬듯 아르에게 물었다.

“네가 보기엔 유리하냐?”

그가 잠시 말을 아끼더니 대답했다.

“……사실 군사학은 저도 잘 모릅니다.”

“정말로 검술밖에 배운 게 없구나. 그렇담 군사학은 나중에 배우면 되겠지.”

나는 계속 황궁 쪽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볼테르와 태후, 그리고 그들의 측근이 황궁 안에 있었다고 해도 반역을 위한 군대는 어제까지 외부에 있었을 거다. 그런데 저 군대는 갑자기 다 어디서 나타난 걸까.

“저런 규모의 군대가 황도에는 어떻게 몰래 들어왔으며 황궁 문은 어떻게 뚫었을까?”

“내부에 예상하지 못했던 조력자가 있던 모양입니다.”

그의 생각도 내 예상과 일치했다.

“적들의 방향을 보니 황도의 서문이나 북문으로 들어왔구나. 황도를 조용히 들어올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아 내부 조력자는 적어도 후작급 이상일 거고.”

나는 여전히 산비탈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반란군의 진격 방향을 확인하며 중얼거렸다.

“제국의 4공작과 2후작 중, 세르피스 후작, 파피란 공작 그리고 크로이젠 공작은 확실한 아군, 체리에 후작은 확실한 적이니 남은 건…….”

“프란츠 공작과 브롬바드 공작입니다.”

“그리고 둘 다 중립이었지. 그럼 그대의 첫 번째 기억 속에 있는 프란츠 공작과 브롬바드 공작은 어땠지?”

“그보다 전하, 얼른 황도 밖으로 나가셔야 합니다.”

그가 침착하게 말했다. 아르의 말대로 나는 몸을 피하는 게 지금 상황에서 최선이다. 어차피 황궁으로 돌아가 봤자 나는 전력으로 하등 쓸모가 없다. 오히려 아군에게 짐짝이 될 게 분명하다. 게다가 내가 그 난리에 휘말려서 죽거나 인질이라도 되면 그게 더 골치가 아플 거다.

차라리 옥새를 들고 나와 있는 이 상황이 잘된 것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대로 도망간다고 해서 우리에게 승산이 있느냐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었다.

“묻는 것에 대답해. 나는 모르고 그대만 아는 프란츠 공작과 브롬바드 공작은 어땠지?”

나를 강제로 잡아끌려던 아르가 멈칫했다. 그리고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프란츠 공작은 전하께서 냉궁에 갇히자마자 어느 쪽 편도 들지 않고 황도 생활을 정리한 다음 자신의 영지로 돌아갔습니다. 브롬바드 공작은…… 잘 모르겠습니다.”

둘 다 겉으로 보기엔 중립이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건 내가 기억하는 모습과 일치했다.

내가 기억하는 지난 삶의 프란츠 공작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에오넬 황제와 대적하지 말라. 폐하께서는 그저 엄하실 뿐이지 결코 전하의 적이 아니다.’

그 말은 그가 중립을 고수하면서도 내게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충언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 고모님의 엄격하고 차가운 모습이 그저 무섭기만 했던 열두 살의 나에게는 너무나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였다.

결국에 사춘기의 내가 숙부의 꼬드김에 넘어가 고모님이 죽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냉궁에 갇히자마자 프란츠 공작은 황도 생활을 청산하고 자신의 영지로 내려갔다.

그가 에오넬 황제가 죽고도 황도에 남아 있었다는 이야기는 뒤집어 말하면 만약 내가 정신을 일찍 차렸다면, 그래서 내게 승산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힘이 되어 줄 생각은 있었다는 뜻. 동시에 도박 따위는 하지 않는 사람.

‘그런 프란츠 공작이 나와 고모님이 유리한 이 상황에서 갑자기 볼테르의 편에 붙어 버렸을 것 같지 않아.’

브롬바드 공작 역시 표면적으로는 중립을 지키다가 내가 냉궁에 유폐되고 나서는 별다른 소식이 없었다. 그저 조용히 지낼 뿐이었다. 그의 진짜 속내가 어땠는지는 사실 모르겠다.

그리고 그 두 사람에 대한 내 기억은 아르가 기억하는 것과 일치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도 이상했다. 체리에 하나의 세력만으로 반역에 성공했다는 건 쉽게 이해하기 힘들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내가 고모님을 배신했기 때문에 중립 귀족들이 볼테르 쪽으로 대거 움직인 것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이 그 이유의 전부라고 보기에 볼테르의 세력은 그 전부터도 과했다.

그리고 이제는 확실해졌다. 이미 볼테르의 세력 안에 두 공작 중 하나가 있었던 거다.

‘그 숨은 세력이 브롬바드 공작이었겠지.’

이윽고 나는 결정을 내렸다.

“우리는 지금 바로 프란츠 공작에게 간다.”

13.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

황궁의 소란과는 거리가 먼 부촌. 귀족들의 저택이 늘어선 동네였다.

조용했다. 황궁의 파티에 참석한 귀족들이 많기 때문이었다. 볼테르의 파벌에 속한 귀족들의 집들만 몇몇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도 보이콧에 동참하기 위해서 파티에 참석만 하지 않았을 뿐, 아직 황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잘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듯 평온했다.

그리고 나는 곧 프란츠 공작의 대저택 입구에 다다랐다. 그 앞에 서자 문지기 둘이 나와 아르를 막아섰다.

“누구냐!”

“저택의 집사에게 아멜리아 플라티나 체르무트 황녀가 왔으니 지금 이 저택에서 공작의 대리인 자격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에게 안내하라고 전해.”

내 말에 문지기들이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웬 거지새끼들이 별…….”

문지기 하나가 위협하듯 다가와 밀치려 하자 아르가 문지기의 목에 검을 겨누었다. 그러고는 황궁 기사 패를 내보였다.

“감히 누구에게 손을 대려는 거냐. 전하께 손대면 이 자리에서 네놈을 즉결 처분하고 프란츠 공작을 반역자와 한패로 간주하겠다.”

곧 남은 문지기 한 명이 엉거주춤하며 다가올 듯 물러날 듯 눈치를 보더니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곧 공작 저택의 경비 대장이 나와 다시 한번 아르의 기사 황궁 패를 확인했고 그다음에는 공작가의 기사가 나와 한 번 더 확인했다.

행색이 이 모양인 데다가 워낙 갑작스럽게 찾아와서 저택에 들어가기부터 까다로울 거라는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어려웠다. 그렇게 복잡한 과정을 거치고 난 후에야 공작저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곧 저택의 집사와 공작가의 기사단장이 나왔다.

“저희 식솔이 무례를 범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전하. 방금 황궁 근처에 은밀히 사람을 보내어 소란을 확인했습니다. 가까이 가지는 못해 자세한 건 모릅니다만 어떻게 된 상황인지 이야기를 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집사가 내 앞에 따뜻하게 데운 우유를 내려놓으며 정중하게 물었다.

“볼테르 숙부가 반란군을 일으켜 파티장을 점령했다. 프란츠 공작도 아마 지금쯤 파티장 안에 갇혀 있겠지. 그래서 이곳으로 왔다.”

내 말을 듣고는 집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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