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태후를 냉궁에 가둔 지 한 달이 넘었다. 그동안, 그리고 아직도 황궁 안은 몹시 흉흉했다.
냉궁에서는 억울하다는 태후의 목소리가 며칠째 담을 넘어 들리다가 목이 쉰 듯 조용해졌다. 그래도 태후의 식사를 만드는 냉궁의 주방 하녀들 말로는 자신들이 식사를 만들고 설거지도 하고 있으니 태후가 살아는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어제 저녁 무렵에는 태후마마께서 덥다고 열사병이 나신 것 같다며 의원이라도 출입하게 해달라고 소리를 지르셨다 합니다.”
이따금 에오넬의 명령으로 태후의 동태를 살피러 냉궁에 다녀오는 시녀가 말을 전했다.
가뜩이나 여름이라 덥고 습한데 냉난방 시설이 갖춰 있지 않은 냉궁에서 저리 소리를 지르고 열을 내니 지칠 만도 했다.
“엄살이 심하시네. 여름 끝 무렵이라 그렇게 덥지는 않았을 텐데. 열대야도 끝나고 있고. 열사병이 걸리신 어마마마의 식사는 어땠다고 하더냐?”
“그래도 저녁으로 나온 연어 스테이크는 남김없이 드셨다고 합니다.”
“냉궁 밥이 입맛에 맞는 모양이구나. 여름에 냉방도 잘 되지 않는 곳에서는 식중독이 우려되니 주방 하녀들에게 어패류는 삼가도록 전해라.”
“그럼 냉궁에서 고기도 사치라고 못 드시고 어패류도 제한하시면 드실 것이 곡류와 채소뿐이라…….”
에오넬이 코웃음을 쳤다.
“스트레스가 심하실 때 드시기 좋은 건강식이구나. 황도 바깥의 낙후된 지역에서는 제국민들이 곡류와 채소와 우물물만 마시고도 잘들 산단다.”
“그래도 일단 태후의 말대로 주기적으로 상태를 확인할 겸 저 대신에 주치의를 보내시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황궁에는 보는 눈도 많으니 어차피 누군가가 냉궁을 드나들며 태후의 상태를 확인한다면 저보다는 주치의를 보내어 감시하는 편이 남들 보기에도 좋지 않겠습니까?
황궁에는 보는 눈이 많으니까요. 그리고 겨울이 되기 전에는 상황 폐하와 함께 황궁 밖을 여행하며 지내도록 하는 편이 그림이 나을 것 같습니다. 그 핑계로 아예 황도 밖으로 쫓아내서 황도가 시끄럽지 않게 하는 건 어떠십니까?”
“적어도 냉궁에 가셨다면 거기서 겨울은 나셔야지. 그런 식으로 황도 밖으로 내보내면 다시는 안 올 것 같은가? 자네가 보기엔 태후가 그럴 사람으로 보이나?”
“하긴, 생각해 보니 그것도 그렇네요.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황궁으로 돌아올 구실을 만드실 것 같네요.”
“황궁 안살림 걱정하는 척하면서 들어올 거다. 멜리가 성년의 국서를 들여 황궁의 안살림을 맡겨 버린다고 해도 새사람이 뭘 알겠냐며 오히려 그 국서를 가르치겠다는 핑계로 황녀에게 간섭하려 들 사람이다.”
시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은 에오넬 황제가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키옌 태후를 싫어해서 괴롭힌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실상은 조금 달랐다.
그녀는 키옌 태후을 증오해서 괴롭히려는 게 아니다. 죽은 오빠에 대한 복수심 같은 것도 없었다. 사실 에오넬에게는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는 표현이 더 맞았다.
권력을 가운데 두고 벌이는 이 전쟁에서 일단은 살아남아 더 큰 권력을 움켜쥐는 것이 더 중요했다. 복수, 아니 정의 구현은 다음이었다.
그런 면에서 에오넬은 철저히 계산적이었다. 키옌 태후를 냉궁에 보내 버린 것도 그녀의 권력을 누르기 위한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좋아, 태후의 소원대로 의원을 보내. 그리고 태후가 화병으로 앓아누웠다고 말하도록 하게. 더위를 먹었다느니 뭐라느니 하면서 동정표 얻어 나올 생각은 하지도 못하도록 해. 자네 말대로 태후를 오래 가두어 두려면 조금은 바깥 시선을 신경 쓸 필요가 있겠어.”
“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얼음을 마음대로 쓰는 것 정도는 허락하도록 하지. 정 더우면 얼음이라도 끌어안고 계시라고 해. 아무리 황족이라도 여름 냉궁에 유배된 사람이 얼음을 마음대로 쓴 전례는 찾아보기 힘드니 그래도 덥다는 소리를 하면 벌을 덜 받았다는 소문은 저절로 돌겠지.”
그렇게 키옌 태후에 대한 일을 처리한 에오넬이 한숨 돌리려던 때였다. 다른 시녀 하나가 집무실로 들어왔다. 볼테르의 동태를 살피도록 한 시녀였다.
그녀가 쪼르르 에오넬의 옆으로 와서 귓속말을 속닥거렸다.
“폐하, 방금 들은 소식이 있습니다.”
남작령을 볼테르에게 넘기기 전에 에오넬은 남작령을 정리하면서 남작령의 관리들과 하인 하녀들도 대거 갈아치웠는데 그때 사람을 꽤 심어 두었다.
물론 볼테르가 그곳으로 가면서 키옌 태후가 볼테르에게 붙여 둔 시종을 통해 절반은 다시 갈아엎어 버렸다. 그래도 그 와중에 쫓겨나지 않고 버틴 이가 꽤 되었다.
그쪽 사람들을 관리하는 시녀가 귓속말로 전한 것은 잔뜩 벼르며 기다리던 소식이었다.
“그렇다면 아멜리아의 생일 전야가 되겠구나……. 온 귀족이 황궁에 다 모이는 때이니 가둬 놓고 도륙할 생각이군.”
여러 사람이 물어 온 정보는 산산이 조각 나 있었지만 그 퍼즐을 잘 맞추면 군대가 움직일 거라는 것 정도는 쉽게 알 수 있다.
“황궁으로 온다는 보장은 아직 없습니다.”
“올 거야. 멜리가 성년이 되는 날이 그들에게는 마지막 기회다. 일단 멜리가 성년이 되면 뭐가 됐든 움직이기 더 힘들어져. 고작 날짜 하나 바뀐다고 하기에는 어마어마한 권력이 멜리에게로 이동하는 날이 될 테니까. 그들의 입지가 줄어드는 건 당연하지.”
“그날은 체리에 후작가와 연관이 깊은 귀족들도 많이 옵니다. 비밀리에 움직이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니 아군에게도 대부분 숨길 텐데 일을 모르는 사람들은 어떻게 할 작정일까요?”
“지금 이 상황에서 나나 멜리가 죽는다고 우리 쪽 귀족이 항복할 리는 없을 테니 후환을 없애려면 그날 가둬 놓고 도륙해서 완전히 피바다로 만드는 것이 볼테르가 할 발상에 가까워. 걘 뒤는커녕 옆도 돌아보지 않는 녀석이니까. 눈앞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인 녀석이지.”
에오넬이 끔찍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방심한 틈에 피비린내 나는 역겨운 상상을 해버린 시녀가 속으로 구역질을 하며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에오넬이 말을 이었다.
“이 일이 멜리의 귀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고 그날 난리가 나면 조용히 피신시킬 준비를 해. 아바마마가 멜리한테 물려줬다는 무슨 나이트인가 하는 암살자들한테도 그렇게 전할 수 있겠지?”
“황녀 전하의 호위 기사들에게 그리 전하겠습니다.”
“좋아. 이만 물러가.”
***
시간이 흘러 내 생일이 되었다.
「자정이 지나고 서월궁에서 만나. 줄 것이 있으니.」
***
솜씨 좋기로 유명한 미용사를 황궁으로 불러 화장과 머리를 정돈하고 미리 골라 둔 드레스와 액세서리를 갖추었다. 이제 내 방에서 한 시간 정도만 기다리면 된다.
그런데 불안했다.
‘왜 이렇게 숙부가 조용하지?’
볼테르는 어제 황궁에 오자마자 키옌이 아직도 갇혀 있는 냉궁에 들어가서 어마마마를 뵈어야겠다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고모님께서는 정해진 의원 그리고 호위 겸 감시자나 식사를 들고 드나드는 시녀와 하녀 몇 명 이외에는 아무도 출입하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렸다. 입구에서 막힌 그가 깽판을 쳤다고 하던데 거기까진 관심이 없어서 귀담아듣지 않았다.
어쨌든 중요한 건 오늘 파티였다.
사람들은 볼테르는 참석하지 않을 거라고들 수군거렸다. 그것이 그리 이상할 건 없었다. 어차피 오늘 파티에 볼테르파에 속한 귀족들은 거의 오지 않았다. 키옌 태후가 냉궁에 갇혀 있으니 일종의 시위를 하는 셈이었다.
그들이 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규모는 충분히 컸다. 더구나 내일 저녁과 모레에는 성년 의식과 황태녀 즉위식이 남아 있는데 생일 전야 파티가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지는 않았다. 그날에는 아무리 아니꼽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참석하게 되어 있다.
내 치장을 마친 미용사가 궁 밖으로 나갔을 정도로 시간이 조금 흘렀을 때, 갑자기 잔느를 비롯한 시녀들과 유모가 다가와 액세서리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뭐, 뭐야?”
그와 동시에 호위 기사들이 일제히 내 방의 창문 앞으로 다가가 밖을 감시하고는 방문 앞을 가로막고 섰다.
“뭐냐니까!”
내가 소리치자 벨이 내 입을 막았다. 그러곤 내 앞에서 허리를 숙여 눈을 맞추며 말했다.
“쉿! 도망치셔야 해요. 폐하의 명령입니다.”
그 순간 볼테르가 생각보다 조용해서 이상하다 여겼던 것이 기우가 아니었음을 직감했다. 오래전부터 계획했던 일의 파편이 떠올랐다.
“바, 반란이냐?”
“예. 방금요.”
“그런데 왜 벌써……?”
고모님이 결정적인 순간에는 나한테 숨길 거라는 건 예상했다. 그러나 이건 생각보다 이상했다. 볼테르가 데려온 군대가 황도를 둘러싸고 황도의 성곽에서 공성전이 벌어졌다면 내가 여태 모를 리가 없었다. 그때는 이미 숨길 수도 없이 시끄러웠을 테니까.
그런데 나한테 도망을 가라니, 그건 공성전에서 밀린다는 소리가 아닌가!
그때 잔느가 어깨에 힘을 준 채 침착한 어조로 설명했다.
“반란군이 황도 밖이 아니라 황도 내에 침입해 있었습니다. 지금 황도가 아니라 황궁이 뚫리기 직전입니다.”
“그걸 왜 이제 말해!”
“전하를 피신시키기 전까지 말하지 말라는 폐하의 명입니다.”
그때 방문을 열고 제니가 로엔과 함께 들어왔다. 언제 준비한 것인지 로엔은 내가 내일 저녁에 입기로 했던 파티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나와 최대한 닮아 보이도록 분장 수준의 화장까지 하고 있었다.
그 옆에는 밀렌도 함께였다.
“밀렌! 그대도 나를 속였구나!”
“죄송해요, 전하!”
그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전하의 안전을 위해서 비밀에 부치라는 폐하의 명령에 충분히 일리가 있다고 여겨서 보고하지 않았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