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그때 로이드의 목소리가 상념을 깼다.
“끝까지 전하께 사실대로 말하겠다고는 안 하네.”
로이드의 말에 알테어가 희미하게 웃었다.
역시 머리로는 알아도 마음으로는 안 되는 모양인가 보다 하며 로이드는 먼 곳을 보며 숨을 한 번 쉬었다.
“좀 괜찮은 해결책이 하나 생각났는데.”
아르와 엘비어스의 고개가 동시에 갸우뚱 기울었다.
“전하한테 키스해 봐. 그 정도는 실패하더라도 시도해 볼 수 있는 관계니까 이런 고민도 하겠지?”
“……?”
“……!”
한 명은 놀랐고 다른 한 명도 놀랐다. 서로 다른 의미로 놀란 것 같았지만 이미 충분히 예상했던 반응이라 로이드는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남녀 관계는 거기서부터 시작이야.”
큰형의 주먹이 작은형의 정수리에 날아든 건 그 직후였다.
“자랑이다, 이 자식이 파혼 아닌 파혼당해 놓고 정신을 덜 차렸나!”
“아니, 누가 다짜고짜 하래? 그러다가 뺨 맞아! 내 말은 분위기 봐서 좀 그럴듯할 때 눈치 봐서 잘 하라는 거지! 장담하는데 내가 보기엔 이거 확실히 효과가 있을 거야. 뒤탈도 없을 거고.”
***
더 얘기하다가는 기가 빨릴 것 같아 아르는 로이드를 힘으로 방 밖으로 끌어냈다. 얼결에 엘비어스도 로이드를 따라 방 밖으로 쫓아낼 수 있었다.
꽉 닫은 방문에 기대어 서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손을 뒤로 더듬어 방문의 잠금장치를 아예 걸어 버렸다.
두어 번 잠금장치를 확인한 아르는 자리로 돌아와 아까 만지작거리기만 하고 미처 꺼내지도 못한 편지봉투를 들었다.
공작저로 돌아오자마자 부랴부랴 예전 날짜를 적어 편지부터 보냈었다. 황녀의 알리바이를 입증할 편지였다. 방금 도착한 편지에는 뭐라고 적혀 있을까. 부탁을 들어줘서 고맙다는 내용이 있을 것 같았다.
편지를 열어 꺼내 읽었다. 그러나 예상했던 것과 달리 예전과 다름없는 일상적인 편지였다. 지난번, 그러니까 사건 전에 보냈던 편지에 대한 답장만 있을 뿐 다른 내용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저택을 비운 동안 편지가 왔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 마땅히 방에 와있어야 할 그 편지가 없었다.
서둘러 집사를 찾아가 황궁에서 황녀의 편지가 온 적이 있느냐 물었으나 집사는 고개를 저었다. 황녀 전하께서는 자작령에 다녀오셔서 그사이에 편지가 왔을 틈이 없었다는 건 도련님이 더 잘 아시지 않느냐는 대답이 되돌아왔다.
방으로 돌아와 다시 읽어도 마치 예전과 같은 일상적인 편지. 마치 처음부터 그런 부탁 한 적 없었다는 것처럼 깔끔하게 지워진 내용.
어쩐지 서늘한 기분이 들었다.
***
암살자를 찾아가 의뢰한 것으로 밝혀진 태후의 시녀는 사형이 확실시되고 시녀의 가문은 작위 몰수 절차를 밟았다. 태후가 냉궁으로 쫓겨난 건 그 다음 날이었다.
아르가 나를 찾아온 것도 태후가 냉궁으로 쫓겨났다는 소문이 황궁 바깥으로 슬슬 퍼질 오후 늦게 즈음이었다.
“그대가 내 궁으로 올 날이 아닌데?”
“괜찮으신가 해서 왔습니다.”
“약속도 없이?”
“예……. 안 됩니까?”
원래대로라면 정해진 시간이 아니니 알현 신청을 하고 만나는 것이 황궁의 법도에 맞지만, 시녀나 호위기사 정도 되는 측근들은 그런 거에 제약은 사실상 없다고 봐도 된다.
그런데도 그걸 굳이 안 되냐고 콕 짚어서 묻는 게 조금 어색해서 나는 엉겁결에 뒤로 살짝 물러나며 대답했다.
“뭐…… 이미 왔으니 됐어. 근데 뭐가 괜찮냐는 거야?”
“세간에는 전하께서 아직 충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는 소문이 돕니다.”
“흐응, 그 소문 때문에 왔어? 계획대로 잘 되고 있는 일이야. 안 괜찮을 이유는 없지 않나? 아니면 병문안까지 위장하는 건가? 그럴 필요는 없다.”
그 순간 내가 알테어에게 보낸 편지에, 내 병문안을 오기 부담스럽다면 공작저의 파티시에가 만든 초코 마카롱을 먹으면 기운이 날 것 같으니 보내 달라고 했었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혹시 네가 마카롱 가져왔어?”
“……마카롱이요?”
그는 잠시 멈칫하다가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다.
하긴, 마카롱을 그새 구워서 가져올 시간은 안 된다. 그렇다면 아마도 사라진 편지 때문에 왔던 거겠지.
“네가 온 거야, 알테어 공자께서 보낸 거야? 설마 편지 때문에 그런 거라면 신경 쓸 것 없어. 그대가 이중 스파이라는 건 딱히 놀랍지도 않아.”
처음에 떠보겠다고 마음먹은 건 깔끔하게 접었다. 나는 충돌을 피하려고 적절한 핑계를 둘러댔다. 그러나 아르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럼 왜 그런 거짓말을 하셨습니까?”
나는 쌓여 있던 편지들을 읽다 말고 잠시 뭐라고 말할지 고민했다.
“……그대가 어디까지 내 사람이 아닌지 확인하려고? 뭐, 그래서였다고 해두지. 괜찮아, 그래도 그대가 하는 일이 내게 득이 되면 득이 되었지 실이 된 적은 없다고 생각해. 아직은.”
그러자 그가 품에서 편지를 꺼내 건네었다.
보내는 이에 알테어 폰 크로이젠이라고 적혀 있었다.
“보내자마자 답장이 왔네. 달라는 마카롱은 안 오고.”
“마카롱을 더 기다리셨습니까?”
“…….”
나는 아르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그러고는 손에 받은 편지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주제넘지 말라고 했을 텐데. 내 편지는 다음에 보내겠다고 전해.”
“예.”
그 이후로 우리 둘은 잠시간 침묵했다. 먼저 정적을 깬 건 겨우 5초를 좀이 쑤셔 견디지 못한 나였다.
“아, 그리고…… 태후를 쫓아냈으니 서월궁은 곧 준비해 주겠다고 전해. 황궁 안살림은 그동안 태후의 일이었던지라 서월궁을 내 맘대로 가져오긴 힘들었거든. 이제 태후 자리가 비어 버렸으니 그사이에 서월궁을 정리할 예정이야.”
“아깝지는 않으십니까? 그렇게 정리해 버려도……. 특별히 여기셨던 곳이 아닙니까.”
“아깝지 않아. 가봐.”
너에게 주는 것은 아깝지 않다는 말을 목 뒤로 소리 없이 삼켰다.
***
소문은 와전되고 살이 붙어서 키옌 태후가 제론 자작령에서 아멜리아 황녀의 암살을 시도했다고 퍼졌다. 거기엔 에오넬이 의도한 바도 있었지만 사실 사람들은 자극적인 소문을 더 좋아하게 마련이었다.
게다가 이름도 잘 알려지지 않은 제론 자작이 뭐라고 키옌 태후가 암살자까지 보내서 죽이려 하겠느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사건의 진상을 잘 아는 사람들이 듣기에도 그 말은 꽤 설득력 있었다.
태후가 제론 자작을 죽여 얻는 이익보다 황녀를 죽여 얻는 이익이 헤아릴 수 없이 컸다. 물론 제론 자작을 죽였을 때와 황녀를 죽였을 때 감수해야 할 위험도 차이는 그 이상으로 컸다. 그러나 자극적인 것을 좋아하는 대중들의 귀에는 태후가 감수해야 할 위험도 같은 것은 들어오지 않았다.
며칠 전까지 자신의 궁에서 근신하던 태후가 냉궁으로 가게 된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태후가 드디어 냉궁으로 가게 되었다는, 황도에서 갓 내려온 소식을 들으며 볼테르는 손톱을 물어뜯었다.
‘어마마마는 아멜리아를 죽이려 한 게 아니야. 제론 자작을 죽이려 한 거지.’
제론 자작은 이번 일로 심하게 충격을 받아서 요양해야겠다는 핑계로 더는 볼테르를 찾아오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태후가 붙여 둔 시종의 감시는 더 철저해졌다. 그건 태후가 냉궁으로 쫓겨났어도 여전했다.
“어마마마는 일단 황녀를 죽이기로 마음먹으셨다면 그렇게 섣불리 움직이실 분이 아니야. 적어도 수년은 공을 들였겠지. 누명이다.”
“그럴 겁니다. 전 황태자 전하 때에도 황제 폐하 몰래 3년은 준비하셨지요. 이게 전혀 태후마마답지 않다는 건 저도 압니다.”
늙은 시종이 대답했다.
“제론 자작을 내게서 떼어 놓으려고 제론 자작을 노리셨던 것이냐?”
“잘 알고 계시네요. 그자는 못 믿을 자입니다. 애초에 누구 편인지도 확실하지 않고요.”
볼테르는 시종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어마마마께 충성하는 이 늙은 시종을 곁에 두지 않고 다른 누군가를 가까이하게 된다면 어마마마는 또다시 그를 죽이려 할 거다.
“누님이 먼저 알고 그걸 이용해 어마마마를 함정에 빠뜨린 거야.”
볼테르가 이를 갈았다.
그 말을 듣고 있던 시종은 ‘쩝’ 하는 소리를 내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아마 아닐 겁니다. 황제 폐하께서 먼저 알게 된 건 맞을 겁니다. 그러나 그걸 이용하기 위해서 황녀를 이용하는 것은 전혀 폐하답지 않습니다. 모든 안전장치를 마련해도 황제는 황녀를 그런 식으로 이용할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건…… 아멜리아 황녀가 스스로 행동했다고밖에는…….”
“그 어린 게?”
볼테르가 인상을 찡그리자 시종이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요, 전 황녀가 더는 아이 같지 않습니다. 겉으론 아이같이 행동하고 있으나 생각보다 아주 영악한 계집앱니다. 태후 폐하께서 황녀에게 자작극 누명을 씌우기 위해서 준비한 시나리오를 완전히 말아먹었을 정도니까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처음 사건이 터졌을 때 황녀의 목격자 진술을 받는 사건 조사관을 태후 폐하께서 직접 꽂아 넣으셨습니다. 사건을 황녀의 자작극으로 만들려고요. 그런데 제가 듣기론 황녀가 그 조사관을 협박했다더군요. 무슨 협박을 했는지 내용은 저도 잘 모릅니다. 황녀의 그 목격자 진술서 때문에 상황이 우리에게 불리해졌다는 것만 압니다.”
“어쨌든 그들이 어마마마를 냉궁으로 쫓아내는 데 그치지는 않겠지?”
“그들에게는 모처럼의 기회입니다.”
태후의 권한을 모조리 빼앗기고 냉궁으로 쫓겨났다고 해도 그녀가 황족으로서 휘두를 수 있는 권력은 조금 남아 있다. 냉궁에 있어도 태후는 태후였다. 그러므로 에오넬도 아멜리아도 거기서 그냥 그치지는 않을 거다. 피바람이 불 거다.
‘나도 위험해.’
이러다 어마마마가 죽기라도 하면 자신의 위치도 장담할 수 없다.
그동안 이곳에서 군대를 잘 육성했다. 이곳이 국경이라는 이유로 군대를 크게 육성해도 의심 같은 건 받지 않을 수 있었다.
공국 귀족의 도움도 받아 무기도 실제 황도에 보고한 것보다 훨씬 많이 가지고 있고, 자신을 황제로 옹립하려는 귀족들은 군대가 황도까지 지나갈 수 있도록 영지를 터서 길을 열어 주기로 했다. 황도 안까지 군대가 몰래 침입할 수 있도록 황도 검문소의 대문을 열어 줄 조력자도 구했다.
준비는 완벽했다. 체리에 후작가와 연이 깊어 자신을 따르는 귀족도 있고, 황제가 여자라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신을 지지하는 귀족은 더 많았다.
“어마마마가 말씀하셨던 때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