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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녀님이 두 번째 삶을 사는 방법-141화 (141/148)

141화

내 진술이 끝나고 사건은 내 손을 떠났다. 황궁 안은 늘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고 있었고 사건은 고모님께서 계획했던 대로 순조롭게 흘러가는 듯했다.

나는 심적 여유가 조금 생긴 후에 그동안 쌓여 있던 편지 더미를 살폈다.

「From.알테어 폰 크로이젠」

나는 조심스럽게 편지를 열어 읽어 내려갔다.

그러다 곧 잊고 있던 사실이 떠올라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허……! 이걸 진짜 썼네…….”

내가 전에 말했던 그 가짜 편지를 급하게 써서 놓아 둔 모양이었다. 실제로는 내가 보내지도 않았던 편지에 답장을 해둔 것이었다. 이미 열흘이 지난 날짜, 자작령을 여행 중이라는 내용…….

‘이따가 만나면 물어볼까?’

‘보내지도 않은 편지의 답장을 어떻게 알고 보냈을까?’ 하면서 살살 떠보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랬다간 또 싸우게 될 것 같았다.

‘언젠가 말하겠지.’

나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이번에 받은 이 조작된 편지는 무시하고 자작령 출발 전에 받았던 편지에 대한 답장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

자작을 암살하려던 암살자가 누구의 의뢰를 받은 것인지 밝혀진 건 순식간이었다. 한때 뒤 세계에서 유명했던 암살단은 황녀를 건드린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애초에 범죄 집단이라 이런저런 여론을 형성할 것도 없이 곧바로 처형식까지 치러졌다.

한편 그들에게 의뢰하러 간 사람이 태후의 시녀이며 의뢰비로 넘긴 것이 오래전 내가 키옌 태후에게 생일 선물로 주었던 세이렌 액세서리 세트라는 사실까지 밝혀지면서 황도가 한 번 더 발칵 뒤집어졌다.

잘 하고 다니지도 않아서 잃어버린 줄도 몰랐는데 그녀가 훔쳤던 게 분명하다며 급하게 꼬리를 자르려던 태후 역시 유력한 용의자 신분으로 자신의 궁에 갇혔다.

여기까지 설명한 엘비어스에게 아르가 물었다.

“냉궁으로는 언제 간대?”

“네가 알아 와. 전하께 물어보면 바로 알 수 있잖아.”

“책사가 물어보는 것만 할까.”

“그냥 말을 해! 알테어 폰 크로이젠이 나다. 그동안 말 안 해서 미안하다. 그게 그렇게 어려워?”

엘비어스는 동생의 행동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희한하게도 로이드는 이 녀석을 이해하는 모양이지만.

“아, 형! 생각을 좀 해봐. 그러니까 얘는 십 년 가까이 전하를 알고 지냈어, 그치? 옛날에 겨울에 황실 사냥터에 와이번 나왔던 그날, 전하께서 얘한테 꽂혀서 황제 폐하께서 깨끗하게 세탁한 서류며 뭐며 싹 다 뒤져다가 호위 기사로 달라고 졸랐단 말이야?”

“그랬지.”

“근데 얜 옛날부터 상황 폐하랑 할바마마 사이에 있던 모종의 거래를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고 했어. 우리도 몰랐던 그거. 그리고 얘가 오래전부터 원했던 건 딱 하나라고 말했어.

거래가 끝나는 시점에서 적당히 한적한 곳에 별장 하나 하인 하나만 주고 노후만 보장해 달라고. 그러면 복잡하게 할 것 없이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처럼 혼자 조용히 살겠다고. 그러고 싶다고.”

“그랬지.”

“그런데 그때 그 거래 끝났다며. 상황 폐하가 물러난 시점에서 이미 끝난 거라며. 근데도 얘는 그때도 전하 옆에 남아 있었어. 그게 뭘 뜻하는 거 같아?”

그냥 전하께서 막무가내로 검술 예동으로 지목해 버려서 빼도 박도 못하게 된 상황 아닌가? 정황상으로 그런 결론밖에 나오질 않는다.

‘빠져나오고 싶었는데 못 빠져나왔다.’

그것 말고는 다른 답은 생각나지 않는다.

역시나 빠져나오고 싶다는 놈을 쑤셔 밀어 넣고는 저 혼자 자유를 찾아서 쏙 나와 버린 로이드는 내 동생이지만 천하의 개새끼가 분명했다.

그래서 그렇게 얘기했더니 로이드는 한숨을 푹 쉬고는 사람의 심계를 안다고 심리까지 아는 건 아니었나 보다, 하며 혀를 차고는 어디론가 호로록 나가 버렸다.

“형은…… 한참 멀었어. 형수님한테 잘해 드려.”

그러면서 뜬금없이 부인 얘기는 왜 나오느냐 말이다.

역시 두 놈 다 이해할 수 없는 놈들이다. 그나마 아르는 말이 통한다고 생각했는데 최근 들어 그것도 영 아닌 것 같았다. 애가 이상해졌다.

“그래서, 태후는 냉궁으로 언제 쫓겨난대?”

“말 돌리지 말고. 그 말 하는 게 그렇게 어렵냐고!”

“어.”

황녀에게서 온 편지봉투를 집고 앞뒤로 살피면서 희미하게 미소 짓는 것치고는 참 성의 없는 대답이었다.

“대체 왜, 뭐가?”

“형, 형은 전하께 뭐야?”

“그건 왜?”

“뭐, 전하께서 형에게 기대하는 부분? 역할 같은 거.”

엘비어스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책사? 뭐, 전하께서도 책사라고 말했고.”

“그럼 나는 뭘까.”

“어……. 엄청 많을 것 같은데…….”

대답해 놓고 나니까 위화감이 들었다.

이 녀석이 황녀에게 주는 의미는 많았다. 황녀의 검이기도 하고 황녀의 예동이기도 했다. 황녀에게는 오랜 친구이기도 했고…….

황녀가 직접 정한 약혼자였다.

어떤 부분에서 위화감이 드는지 알 것 같은데 설명하기 힘들었다.

그렇게 생각해 보니 이건 상당히 철학적인 질문이었다. 이론적으로 정답이 도출되거나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문제를 좋아하는 엘비어스에게는 꽤 당황스러운 질문이기도 했다.

로이드가 필요했다. 그것도 매우 절실히.

그때였다.

“야, 아르! 태후가 자기 궁에서 갇혀서 근신 중이고 냉궁으로 가는 게 오늘내일한다는 거 진짜…… 야? 형이 왜 여기 있어?”

“야, 너 마침 잘 왔다. 네 생각엔 황녀 전하한테 얘가 누구인 거 같아?”

“엥?”

“하아- 둘 다 내 방에서 나가, 그냥!”

그러나 두 형은 물러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동생 놈이 축객령을 내리든 말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형들이었다.

“아아, 그거 고민하는 중이었어?”

로이드는 나가기는커녕 아예 들어와 엘비어스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고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하다가 말했다.

“전하께 얘는…… 크로이젠의 셋째 공자. 그리고 아르. 넌 둘 중에 뭐가 더 좋은데?”

“그걸 모르겠어. 전하한테는 둘 중에 누가 더 중요할까?”

엘비어스는 막냇동생이 이중인격이 아닌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알면서 뭘 물어? 객관적인 시선에서 정치적으로 봤을 때는 당연히 아르보다 크로이젠 공자라는 이름이 가지는 중요도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지. 아마 누군가 전하께 둘 중 하나 더 중요한 사람을 골라 보라고 한다면 전하께서는 크로이젠 공자 쪽을 선택하실 거야.”

“역시 그렇지?”

그렇게 수긍하는 알테어의 표정은 영 개운하지 않았다.

엘비어스는 뭔가 잘못된 것 아닐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동생들을 관찰했다. 그러나 로이드는 그런 알테어를 보며 피식 웃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데…… 누가 물어도 겉으론 그렇게 대답하실 건데, 사실 진짜 속마음은 어떨지 모르지. 어쨌든 전하께서는 아르를 더 오래 알고 더 가깝게 두고 지내셨으니까.

실제로 전하께서 극한에 몰렸다고 했을 때, 행동으로는 누굴 선택할지는…… 막상 닥쳐 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야.

너 그거 알고 싶어서 일부러 전하를 곤란하게 만들 건 아니잖아? 그럼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다, 생각하고 형 말대로 빨리 얘기나 해버려. 전하 마음 떠보려고 하지 말고. 그거 정말 못난 짓이다.”

머릿속에 사방으로 흩어져 정처 없이 떠돌기만 하고 구체적인 언어로 끄집어내기 힘들었던 것들이 조금 뚜렷해진 것 같았다.

“알고 있어.”

지난 생까지 통틀어 20년이 넘도록 곁을 맴돌았다.

그녀가 지난 삶에서 로이드와 약혼했을 때도 아무렇지 않았다. 그러려니 했다. 그녀의 마음 한 자락이라도 얻는 걸 바란 적은 없었다.

이번 생에도 그랬다. 물론 이번에 아멜리아가 로이드에게 마음을 준 적은 없었다. 그렇다고 그 약혼을 무를 생각이 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적어도 로이드가 먼저 파투 내겠다고 하기 전까지는 철저히 정치적인 목적으로 약혼할 생각이 있어 보였다.

그건 그녀의 약혼 대상이 로이드에서 알테어로 바뀌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여전히 철저하게 정략혼을 할 생각이었다. 본인이 대놓고 직접 그렇게 말했다.

그래서 앞으로도 역시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다. 오히려 좀 더 기쁠 것 같았다. 그러나 그건 오산이었다.

처음 몇 번 의무적인 느낌으로 주고받던 편지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의 아기자기한 일상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정원에 핀 꽃이 예쁘다고 따서 보낸 꽃잎이나 나뭇잎은 이 편지를 주고받기 전까지 한 번도 받아 본 적이 없는 것들이었다.

정성 어린 편지 위로 놓인 애교 섞인 문체나 공작저에서 가장 예쁜 꽃을 보고 싶으니 황궁으로 한 송이만 보내 달라는 등 그런 사소하고 귀여운 요구들.

편지로는 그랬지만 얼굴을 마주했을 때는 조금 달랐다.

“그대는 내 검이야. 다른 건 신경 쓸 필요 없어. 주제 넘는다. 그대는 지금도 이미 충분히 잘하고 있어. 원하는 건 뭐든 들어줄게. 작위든 영지든 그게 아니라 다른 거라도 좋아. 그대에게 주는 것은 무엇이든 아깝지 않으니.”

그녀는 원하는 게 뭐든 말하라고 했지만 세상에는 절대 말할 수 없는 것들도 있다.

‘내게도 손편지를 써주세요. 아침 출근길에 황궁 정원에서 가장 예쁘게 핀 꽃의 꽃잎을 따다 달라고 해주세요.’

그런 말조차 감히 꺼낼 수 없는 아르는 절대로 알 수 없었던 것들. 그것들이 그 편지 속에는 늘 있었다.

그게 화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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