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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녀님이 두 번째 삶을 사는 방법-138화 (138/148)

138화

로맨틱이라고 하면 로이드가 정석이 아닌가. 그러나 형제라고 하기에 둘은 너무 달랐다.

로이드처럼 여심을 자극하는 섬세하고 부드러운 매너, 꿀처럼 달콤한 눈빛이나 사랑스러운 눈웃음과 함께 들리는 버터 향 진한 목소리의 아르라니! 그건 도저히 상상되지 않았다.

나는 끔찍한 상상을 털어 내려 머리를 휘휘 내젓고는 다음 줄을 서둘러 읽었다.

그러나 그 밑으로는 더 가관이었다. 아무리 내가 요구 목록을 보내도 좋다 했어도 그렇지, 그는 정말로 전혀 거리낌 없이 요구 목록을 작성해 두었다.

「원하는 것을 말씀하라 하셨으니 서로 피곤하거나 서운할 것 없도록 지금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약혼 선물로 인구 1만 이상, 황도에서 마차로 나흘 이내의 거리에 만 평 이상의 농경지가 포함된 영지 한 곳. 결혼 선물로는 국서의 본궁과는 별도로 서월궁을 추가로 내어 주시길 바랍니다.」

나는 잠시 멍하니 편지를 쳐다보았다.

이게 로맨틱한 연애혼도 원한다면 노력해 주겠다는 사람의 말투가 맞나 싶었다.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설마 내가 말한 거 그대로 돌려 치고 있는 건가? 나 멕이려고 그러는 건가? 왜?’

이게 뭔가 싶어 얼떨떨하다가도 화가 울컥 치밀었다.

편지지 맨 아래 마지막 한 문장을 눈에 새겨 넣듯 읽었다.

「ps. 지금 당장 생각나는 건 이게 다입니다. 갖고 싶은 것이 더 생각나면 또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건 쉬고 싶으니 놓아 달라는 그에게 내가 겨우 일 년짜리 휴식으로 끝내고 돌아오라며 협박했던 것에 대한 복수가 분명했다. 게다가 그러던 중간에 로이드가 돌연 국서 자리를 걷어차면서 그 일 년의 휴식마저 제 뜻대로 되지 않자 나를 약 올리려는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그런 생각도 잠시였다. 아르가 그럴 리 없다. 그렇게 속이 좁은 놈이 아니다.

그는 내가 먼저 말을 거는 것이 아니라면 먼저 입을 여는 경우가 없을 정도로 과묵했고, 답답할 정도로 원하는 것을 잘 말하지 않았다.

내 앞에서는 언제나 자신이 조금 손해를 보는 듯 굴었고, 내가 한 발자국 다가서려 하면 언제나 그만큼 물러나 항상 일정하게 거리를 벌렸다.

그는 아직도 내가 아르와 알테어를 다른 인물로 안다고 생각하고 있다.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런 그가 일이 제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내게 화풀이를 할 만큼 치사하지 않다.

오히려 한숨을 쉬면서 묵묵히 받아들이는 편이 더 그다웠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가 그토록 원했던 휴식을 내가 방해한 것 같아서 미안해지기 시작했다.

‘아니, 그러게 진즉 사실대로 말했으면 내가 이랬겠냐고……. 적당히 굴리다가 원하는 대로 쉬게 해줬지.’

애써 나는 잘못 없다고 합리화를 시도해도 자꾸만 양심이 찔렸다.

그러다가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정보 길드의 길드장이 내게 사기를 쳤거나 뭘 잘못 알고 있던 게 아닐까?’

진지하게 고민되기 시작했다.

그런 내 얼굴을 보곤 벨이 조용히 물었다.

“전하, 대체 무슨 내용이기에 이렇게 심각하세요?”

그녀의 질문에 내 눈길이 다시 편지지로 향했다. 나는 편지 내용을 다시 가만히 살펴보다가 벨에게 그냥 넘겼다.

“읽어 볼래?”

“어머, 크로이젠 공작가의 셋째 도련님의 편지잖아요. 그럼 연애편지 아니에요? 읽어도 돼요?”

벨이 놀란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정말로 읽고 싶어서 호기심이 가득한 표정은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나는 그런 벨의 눈앞에서 편지를 살살 흔들었다.

“연애편지 아니고. 어디까지나 정략혼이니 협상을 해야지. 그러니까 이건 협상문이야.”

“협상문이요?”

벨이 떨떠름하게 대답하고는 편지를 슬그머니 가져갔다. 그러면서 이어 말했다.

“그래요. 그렇다고 쳐요. 그나저나 전하, 요즘 그분에 대한 소문이 조금씩 돌더라고요.”

“알아.”

사실은 죽었던 게 아니라 어릴 때 영지에 내려가서 자랐다더라 하는 소문, 워낙 시끌벅적한 걸 싫어하고 내성적인 데다가 장남이나 차남도 아니라 공작도 굳이 억지로 사교계에 데뷔시키지는 않았던 거라더라 하는 소문들을 말하는 것이리라.

벨은 내가 읽어 보라고 넘긴 편지를 대강 훑은 다음에 접혔던 선을 따라 다시 곱게 접어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약혼식 전까지 사적인 만남이 필요 없다는 걸 보니 소문대로 낯을 많이 가리시는 분인가 봐요. 그래도 낯을 가리신다고 하기에 소심하고 욕심 없는 분이실 줄 알았는데……. 예상했던 것치고는 뭐랄까, 음…….”

한참 인상을 찡그리며 말을 고르던 벨이 싱긋 웃었다.

“시원시원하고 배포가 크시네요!”

나는 그런 벨의 표정과 단어 선택이 이해가 될 것 같았다.

요구 목록 작성에 거리낌이 없는 모습이 당혹스러웠겠지.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국서가 되실 분이 아닌가. 그러니 편지 내용만 봐서는 욕심 많고 음침하고 이상한 사람처럼 보여도 그녀로서는 그걸 지적할 단어 선택에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을 거다.

나는 벨이 테이블에 내려놓은 편지지를 주워 봉투에 다시 잘 넣어 두었다. 그러고 나니 괜스레 짜증이 또 솟구쳤다.

“어린애도 아니고 그 나이 먹어서 낯가림은 무슨…….”

절로 달력으로 눈이 돌아갔다.

아르가 궁에 돌아오겠다고 했던 일 년째 되는 날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

평화로운 계절이 몇 번 바뀌었다.

그 사이에 아르도 황궁으로 돌아왔고, 그것 말고 특별한 일은 없었다.

그는 황궁 안에서 공식적으로는 예전처럼 내 예동으로 행동했고 이따금 비공식적으로는 섀도 나이트에서 했던 일도 이어나갔다. 그러다 쉬는 날이 오면 자취를 감추었다. 아마도 황도의 크로이젠 공작 저택에 조용히 가 있는 듯했다. 그런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내게 알테어 폰 크로이젠의 편지가 왔다.

처음에는 어차피 곧 드러날 진실이라 빨리 밝힐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니었다. 대체 언제 말을 하려는 것인지, 말하지 않고 있는 의도가 무엇인지 가만히 지켜보던 것도 몇 해뿐이었다. 이제는 그런 그의 이중생활에도 익숙해져 버렸다.

그리고 그러는 사이에 오랫동안 손꼽아 온 일이 어느새 성큼 다가와 있었다.

곧 다가올 가을, 황궁에서는 드물게 커다란 행사가 열리는 해였다. 내 생일이었는데 평범한 생일이 아니라 성년을 맞이하는 날이라 더욱 특별했다. 성년이 되면 황태녀 책봉식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볼테르와 키옌 태후에게는 물러날 곳이 더는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래서 권력자들에게는 어느 해보다도 제국 안팎으로 긴장감 넘치는 해였다.

봄부터 시작된 내 성년식 준비는 늦봄과 초여름 사이에 완벽한 계획이 짜였고 그 무대로 지정된 황궁의 대정원이 대대적인 꽃단장에 들어갔다. 수도의 유명 의상실과 미용실, 액세서리 공방은 작년에 이미 예약이 마감되었다.

그리고 오늘, 작년에 예약했던 의상과 액세서리들이 황궁에 도착했다. 파티 당일까지 외부에 공개되지 않을 드레스들을 고모님과 함께 착용해 보고 조금 늦은 점심을 먹으며 시시콜콜한 대화를 했다.

“드레스는 마음에 들었니?”

“드레스가 도안보다 훨씬 예쁘게 나온 것 같아서 마음에 들었어요. 작년에 사이즈를 쟀을 때랑 조금 달라져서 드레스가 작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잘 맞아서 다행이에요.”

“내가 처음 주문할 때부터 조금 길게 해달라고 했단다. 큰 건 줄이면 되지만 처음부터 작은 건 고치기 힘드니까.”

그런 일상적인 대화를 하다가 후식이 나오고 시종 시녀들이 밖으로 물러나자 방이 고요해졌다. 그리고 곧 고모님이 입을 열었다.

“제론 자작을 아니?”

“제가 숙부 옆에 심어 둔 사람입니다. 무슨 일 있었나요?”

“태후가 죽이겠다고 하길래.”

나는 아이스크림을 떠먹던 숟가락을 소리 나지 않게 내려놓았다.

“왜요?”

“볼테르가 자작을 너무 의지한다고.”

“고, 고작 그게 다인가요?”

“맞아. 고작 그게 다야. 볼테르가 그녀가 딸려 보낸 시종보다도 자작을 더 신임하기 때문에. 네가 시킨 일을 자작이 너무 잘한 거겠지.”

고모님의 말씀이 끝나고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눈을 감고 차분히 생각했다. 자작이 볼테르나 태후에게 첩자라는 사실을 들키는 등 위험해졌을 경우를 대비해서 엘비어스와 짜둔 계획이 있었다.

“태후라면 자작을 죽이겠지요. 귀족을 살해한 황족은 이유 불문하고 일단은 냉궁으로 보냅니다. 그러나 태후라면 자신 대신 누명을 써줄 누군가를 마련해서라도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을 겁니다. 아니면 자작에게 뭔가 죄를 뒤집어씌워서 재판을 통해 죽일 수도 있고요.”

“그전에 내가 자작을 죽게 내버려 둘 생각이 없어.”

“제가 말씀드린 건 우리가 손쓰기 전에 자작이 잘못되는 경우입니다.”

“그럼 우리가 먼저 알면?”

“자작보다 더 영향력 있을 사람을 자작 대신 죽을 뻔하게 만들면 됩니다. 키옌 태후라도 쉽게 빠져나가기 힘들 정도로 제국을 발칵 뒤집어 놓을 수 있을 만큼 큰일로 만들면 돼요.”

“그래서 자작 대신 바칠 희생양이 대체 누군데?”

“이런, 찝찝하신 모양이네요. 안심하십시오. 안전할 겁니다. 그게 누구냐면…….”

나는 회상을 끝마치고 고개를 들었다.

“고모님, 저 성년식 전에 생각을 정리할 겸 여름 휴양지에 좀 다녀와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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