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나는 오랜만에 로즈벨리아 거리에 나왔다. 오늘은 몰래 나온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황궁 문으로 나왔다. 그렇다고 특별한 행사가 있는 건 아니었다. 황궁 출입 기록에는 그저 기분 전환 삼은 외출로 적혀 있다.
예약한 브런치 카페에서 호위들은 멀찍이 떼어 놓고 혼자 한가하게 샐러드와 토스트를 먹었다. 그런 다음 과일 주스로 유명한 룸카페에서 전망 좋고 조용한 3층의 방을 잡았다. 거리가 한눈에 보이는 곳에 앉아 밖을 내려다보니 몹시 평화로웠다.
‘이렇게 혼자만의 시간이라니…… 행복하다.’
한 시간 정도 그렇게 주스를 마시고 다음 주스를 또 주문했을 즈음이었다. 노크가 들리고 방문이 슬며시 열렸다.
이곳에서 만나기로 했던 사람이 약속 시각에 딱 맞춰 들어왔다. 정보 길드의 길드장이었다.
“절 부르시는 방법도 가지가지군요. 기발했습니다.”
그는 내 눈앞에 종이를 한 장을 흔들었다.
“아, 그거? 어차피 못 막을 거 이용이나 해먹으려고.”
종이의 출처는 내 방 쓰레기통이었고 내용은 간단했다. 오늘 외출해서 하고 싶은 목록을 적어 둔 거였다. 그리고 그 목록 사이에 지금 시각, 지금 이 장소에서 살포시 만 골드짜리 거래처와 약속이 있다고 적어 두었을 뿐이다.
아마 그날 내 방 청소를 하면서 쓰레기통 비운 하녀가 황녀에게 만 골드짜리 은밀한 거래처가 있다니 이게 웬 횡재냐며 정보 길드에 냅다 팔아넘겼겠지. 조만간 그 하녀는 다른 곳으로 보내 버리든 해야겠다.
“그런데요, 전하. 하녀가 너무너무 성실해서 저한테 이거 안 팔았으면 어쩌려고 하셨어요? 그럼 오늘 외출 공치셨을 텐데.”
“혼자만의 시간과 여유를 만끽하는 거지. 나 같은 사람에게 이렇게 숨통 트이는 기회는 흔치 않거든.”
나는 살짝 웃으며 그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나저나 그대는 꼴이 그게 뭐야? 염색에 컬러 렌즈에 귀족 도련님 같은 옷차림이라니.”
“아, 이거요? 이 색깔 누구 안 떠오르세요?”
그는 배시시 웃으면서 자신의 검은색 머리칼을 정수리 부근에서 손가락으로 배배 꼬았다.
“……아르, 알테어 폰 크로이젠?”
“맞아요. 여긴 꽤 유명한 곳이고 전망이 좋은 창가 자리라 맞은편 건물에서 본다면 전하께서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는 곳이죠. 자세히 알 수는 없어도 성별이나 머리 색 정도는 보일 거리잖아요? 카페 입구에서는 제가 3층으로 올라오는 모습을 몇몇 사람들이 보았을 거고요.”
“별걸 다 신경 쓰는구나. 얼굴은 하나도 안 닮았으면서.”
나는 코웃음을 치면서 주스를 마셨다.
“어차피 크로이젠의 셋째 공자님 얼굴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어요. 시간이 꽤 지나면 딱 한 번 봤을 뿐인 이목구비는 쉽게 잊힐 거고요. 머리 색과 눈 색깔만으로 소문이 나더라도 크게 오해받지는 않을 모습이죠. 나름대로 전하를 배려한 거랍니다. 물론 그런 상황이 오면 진짜 크로이젠 쪽은 전하께서 알아서 하실 거라 여깁니다.”
그렇게 대답하며 그는 메뉴판을 뒤적거리다가 토마토주스를 주문했다.
그렇게 햇살 비치는 따뜻한 창가에서 우리는 진짜 대화를 시작했다.
“그나저나 왜 부르셨습니까?”
“잘 진행되고 있나 물어보려고. 북쪽에서는 연락이 왔거든. 숙부가 돌연 남몰래 약을 끊었다가 이상 증세를 보이고는 그대의 길드원이 다녀간 이후로 약을 다시 먹고 있다고.”
“아, 그거요? 인사가 늦었네요. 마나 뒤틀림을 이렇게 직접 확인시켜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약속한 대로 볼테르 님에게는 황녀 전하께서 알고 있다는 말도 전했습니다. 그런데 좀 예상했던 것과 다른 점이 있어서 그렇지 않아도 조만간 말씀드리려고 한 게 있어요.”
“뭔데?”
“그가 자신의 피를 의심하는 게 아니라…… 현실을 부정하는 것 같더라고 합니다.”
“흐음…….”
나는 콧소리를 내며 주스를 마시고는 다시 물었다.
“정확히 어떤 반응을 보였다고 하는데?”
“키옌 태후의 고조모인 전전…… 어쨌든 옛날 체리에 후작 부인 중 한 분이 공국의 귀족이지 않더냐며 그쪽에서 기인한 것일지도 모른다고요. 알려져서 좋을 것이 없으니 후작가에서 숨겼던 것이 분명하다면서 자신을 의심하는 자들은 죽이겠다고 화를 내더랍니다.”
“아주 예상치 못했던 건 아니다만 가장 가능성이 작다고 생각했던 거네. 그나저나 후작가에서 감히 유전 질환을 숨기고 황실에 딸을 시집보낸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 없을 텐데.”
나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도 그게 태후가 황자의 씨를 속인 것만 하겠습니까?”
“그건 그렇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나는 그가 조만간, 몇 년 안에 반역을 일으킬 것이라는 계산을 끝마쳤다.
곧 길드장이 물었다.
“그런데 정말 궁금한 게 있는데 대체 저한테 시키신 일의 목적이 뭡니까? 단순히 볼테르 님을 충격 먹이려고 그런 건 아닌 것 같고, 태후와 모자 사이를 이간질이나 하려고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은데요.”
나는 가만히 생각하다 대답했다.
“힌트 한 단어에 오백 골드.”
“단어 하나가 뭐가 그렇게 비쌉니까?”
그가 툴툴거렸다.
“비싼 정보니까. 그러는 그대는 ‘황녀의 예동’이라는 고작 다섯 글자짜리 정보 값으로 만 골드씩이나 받아먹었지 않나? 상도덕도 없는 인간이구나. 싫으면 말아.”
어차피 눈앞의 이 자에게는 나와 고모님이 볼테르의 반역을 일부러 유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줄 생각이 없었다. 그도 내가 말해 줄 생각 없이 장난이나 쳤다는 걸 알아채고는 곧 말을 돌렸다.
“그냥 알려 주기 싫으면 싫으시다고 말씀하십시오. 그나저나 크로이젠 막내 도련님한테는 왜 얘기 안 하셨어요? 저는 전하께서 바로 불러서 왜 속였냐고 따지실 줄 알았거든요. 나중에 따지시게요?”
“내가 말 안 한 건 또 어떻게 알았대? 그냥 지켜볼 거야. 언제까지 나를 기만하는지……. 그러니 너도 말해 주지 마.”
“어라, 이거 찍은 건데…… 진짜로 말 안 하셨던 거라고요? 알테어 도련님이 황도로 올라왔다는 소식이 없길래 대충 예상은 했지만 진짜였군요. 뭐, 걱정하지는 마세요. 말 안 할 겁니다.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3대 볼거리를 놓칠 리가요.”
“3대 볼거리?”
“불구경, 싸움 구경. 그리고…….”
길드장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
“스캔들! 황녀님과 그녀의 그림자 호위 사이에서 벌어지는 은밀한 스캔들이라니 너무 짜릿하지 않습니까? 히히힛!”
그림자 호위라니, 이 자는 도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그나저나 밀렌 시켜서 편지 하나 보내는 것으로 말 걸 괜히 불러냈나?
나는 살며시 인상을 찌푸리며 주스를 마저 들었다.
***
외출을 마치고 황궁으로 돌아오자 방 한가운데 테이블의 편지 더미가 눈에 들어왔다. 보낸 사람에 따라서 분류된 편지들이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내가 테이블 앞 소파에 앉자 벨이 따로 빼놓은 편지 한 통을 내밀었다.
“이건 크로이젠 공작령에서 방금 온 겁니다.”
나는 서둘러 봉투에 적힌 발신인을 확인했다.
알테어 폰 크로이젠.
보름 정도 전 즈음 편지를 보내고부터 열심히 답장을 기다렸었다. 그러나 열흘이 훌쩍 넘도록 답장이 없어 기분이 매우 좋지 않다가 이젠 거의 기대도 하지 않고 잊어 가려던 찰나였다.
대체 무슨 말을 적었기에 이리 오랜 시간이 걸린 건가 싶으면서 한편으로는 이제는 솔직하게 말해 주지 않을까 은근한 기대감도 올라왔다.
선이 몹시 부드럽고 유려한 필기체였다. 손끝으로 쓸어 보았다. 어느새 자연스럽게 엘비어스나 로이드의 필체와 비교하고 있었다.
엘비어스의 필체는 선이 끝날 때까지 힘이 있고 진하면서 깔끔하다. 로이드의 필체는 가볍고 화려한 것이 꼭 왈츠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그동안 그런 건 너무도 잘 알고 있었으면서 정작 가장 가까이 두었다고 생각했던 아르의 필체는 잘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이렇게 모르는 게 더 많았는걸…….’
실링을 떼어 내고 편지지를 꺼내자 종이 대신 연둣빛 천이 먼저 보였다. 꺼내어 만져 보니 실크를 덧댄 상당히 고급스러운 편지지였다. 보드라운 감촉에 기분이 좋아졌다.
예상했던 것보다도 그가 이 편지에 상당히 정성을 기울인 것 같아서 괜스레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이렇게 신경 쓰고 있으면서 아닌 척 거리를 두려던 것이 괘씸하기도 했다.
‘여기서도 원하는 거 없다고 하기만 해봐라.’
단단히 벼르면서 종이를 꺼내 접힌 것을 펼쳤다.
그러나 종이에는 조금 전의 기대를 처참히 깨부순 무뚝뚝한 답변이 일목요연하게 적혀 있었다. 그것도 여전히 선 고운 필기체로.
「답장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알고 계셨다시피 지금 상황이 꽤 당혹스러워 생각을 정리하느라 그랬습니다. 저를 이해하도록 노력하겠다고 하셨던 분이니만큼 이 점은 너그러이 양해해 주시리라 여기겠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편지는 잘 지냈냐는 둥, 요즘 날씨가 좋다는 둥……. 그런 예의상 하는 틀에 박힌 인사말조차 싹둑 잘라먹은 채로 본론으로 이어졌다.
「전하께서 제게 만날지 말지 선택할 기회를 주셨으니 제 뜻을 전하자면 굳이 사적인 만남은 필요 없습니다. 전하께서 말씀하셨다시피 어차피 정략결혼이니까요. 그에 따라 필요한 정보는 편지만으로도 충분히 교환할 수 있을 듯합니다.」
「그러므로 앞으로는 특별한 일이 없다면 마지막 편지 날짜를 기준으로 닷새 이내에 다음 편지를 꾸준히 교환하길 원합니다.」
「더불어 저 또한 황녀 전하께서 로맨틱한 연애혼을 원하신다면 노력해 볼 수 있습니다. 아니면 말고요.」
어디서 많이 보았던 문장이 그대로 돌아왔다.
갑자기 손발이 배배 꼬이다가 사라져 버릴 것만 같은 창피함이 밀려들었다.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이……! 로맨틱한 연애혼 같은 소리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