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일방적으로 황실에게 청혼을 당하셔서 당황스러우셨을 심정을 이해해 보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이건 뭔 소리람?’ 예의상으로라도 ‘이해한다.’ 말하는 게 아니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라니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래도 입바른 소리는 죽어도 못하는 걸 보니 편지에 담긴 게 진심은 진심인 모양이다.
「대신에 원하는 건 뭐든 맞춰 드리겠습니다. 만남을 원한다면 그렇게 하죠. 황도에서 만나도 좋고 저를 크로이젠 공작령으로 불러도 가겠습니다. 약혼 선물로 원하는 게 땅이든 물건이든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가지든 그것도 다 좋습니다.」
「더불어 원하는 결혼관이 있다면 그것도 개의치 말고 말씀하세요. 철저하게 실리를 추구하는 정략혼을 원하신다면 황실과 크로이젠 가문 사이의 이해관계 말고도 우리 사이의 이해관계를 우리끼리 협상하도록 하죠. 만약 로맨틱한 연애혼을 원한다면 그것도 노력해 보겠습니다.」
「PS. 약혼 안 하겠다는 것 빼곤 다 들어드릴게요.」
참으로 단도직입적인…… 청혼서였다. 청혼서의 탈을 쓴 협박문 같았지만. 그도 그럴 것이 문장 하나하나가 전혀 설레지 않는다.
그래도 어쨌든 청혼서는 청혼서였다. 편지를 보낸 사람이 직접 그렇게 적었으니 그렇다고 쳐주자. 그렇게 생각하며 아르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황실에서 온 것 맞죠? 무슨 편진데요, 도련님? 혹시 제가 알면 안 되는 겁니까?”
“청혼서. 정식으로 온 건 아니고 곧 황실에서 정식으로 청혼서가 올 것이니 그 전에 미리 개인적인 인사차 보낸 거라는군.”
그러자 하인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아하! 연애편지군요.”
그 순간 삼키던 침이 잘못 넘어가고 말았다.
“쿨럭!”
아르는 하인의 말을 못 들은 척하며 편지를 다시 접어 봉투 안에 넣었다. 그러고는 책상 앞으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그는 곧 뭐가 좋은지 싱글벙글 웃고 있는 하인을 향해 말했다.
“편지지와 펜 좀 가져와 줘. 황녀 전하께 올릴 것이니 좋은 종이로.”
잠시 후 하인이 빨리 마르고 번짐이 적은 고급 잉크와 펜 그리고 연둣빛 실크를 뒤에 덧댄 빳빳한 종이를 가져왔다. 펜과 잉크는 그렇다 치는데 이런 편지지는 어디서 난 건지 도무지 감도 안 온다.
“이런 종이는 대체 어디서 난 거야?”
“1층 거실에 주인 나리의 친구라는 어르신께서 계시길래 부탁 좀 드렸습니다. 그 어르신은 늘 이런 예쁜 종이에만 글을 쓰시더라고요.”
상황 폐하께 편지지를 삥 뜯었다는 소리를 너무 해맑게 하는 하인 덕에 아르는 아까보다 더 크게 사레가 들렀다.
“쿨럭! 켁켁!”
그는 편지를 쓰자마자 폐하께 찾아가 결례를 범했다고 말씀 올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뭐라고 하고 얻었는데?”
아르가 떨리는 손으로 펜을 들며 묻자 하인이 자랑스럽다는 듯 대답했다.
“어디에 필요하냐고 물으시길래 도련님께서 연애편지를 쓰실 거라고 말씀드렸더니 엄청 즐거워하시면서 흔쾌히 주시던데요?”
역시 세상만사 뜻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
볼테르는 찻잔을 들어 코로 민트 향을 깊게 들이마셨다.
‘뭘까?’
분명 길게 봐서 한 달만 참으라고 했는데 열흘밖에 되지 않아서 무언가 이상한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늘 구역감, 구토감, 어지럼증이 느껴졌고 그것이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이따금 몸을 움직이면 식은땀이 흐르기도 했다. 마치 온몸의 혈관이 늘어진 고무줄처럼 출렁거리면서 심장이 뛸 때마다 느릿느릿 뒤틀리는 것 같았다.
‘독인가? 아니, 어마마마께서 내게 독을 먹일 리는 없어. 그보다 이게 아바마마께서 날 냉대하는 이유였다는 건 대체 무슨 소릴까?’
깊이 생각하려 하자 다시 심한 멀미가 나는 것처럼 관자놀이가 아찔해졌다.
“윽!”
“괜찮으십니까?”
옆에 서 있던 제론 자작이 의자 옆으로 넘어지려던 그를 부축했다. 생각을 멈추자 머리가 다시 편안해져서 볼테르는 다시 허리를 세우며 자작을 부드럽게 밀어냈다.
“괜찮네.”
볼테르는 자신이 차를 마시는지 확인하려는 시종을 내보내는 대신에 제론 자작을 이따금 방으로 불렀다. 제론 자작은 그런 시종에게 볼테르가 차를 마시는 걸 확인했다고 말하며 볼테르의 입맛에 맞게 굴었다.
사실은 모든 것을 아멜리아 황녀에게 일러바치고 있었지만 볼테르는 그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그는 설마하니 이런 촌 동네 영지에 그녀의 스파이가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마마마의 사람이라면 모를까. 그래서인지 그는 더더욱 제론 자작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신뢰했다.
그런 제론 자작이 볼테르를 향해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차를 다시 드시는 건 어떠십니까? 태후 폐하께서 황자 전하께 먹이는 것이 설마 독이겠습니까?”
“흠…….”
볼테르는 잠시 머뭇거렸다.
자작의 말처럼 어마마마가 저더러 죽으라고 준 건 아니겠지. 하지만 어마마마의 성정을 가만히 되짚어 보면 자신을 말 잘 듣는 고분고분한 아들로 만들려 일부러 약을 먹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담배처럼 중독성, 금단 증상이 있는 어떤 것일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그것이 말도 안 되는 자신의 망상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이런 생각이 합리적인 의심이라는 믿음이 어느덧 더 커져 버렸다.
그때 자작이 다시 볼테르에게 슬쩍 등 떠밀듯 말했다.
“정 이 차의 정체가 궁금하시다면 그때 왔던 그자를 몰래 불러 물어보면 될 것 같습니다. 그가 무언가를 알고 있고 알려 줄 생각이 있었으니 먹지 말아 보라는 말도 해주었을 겁니다.”
“그래, 그거 좋겠군. 그자를 다시 몰래 불러올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자작이 시원스럽게 대답하자 볼테르는 차를 후루룩 마셨다.
어차피 평생을 마셔 온 차였다. 끊기 전까지는 더 멀쩡히 살아왔다. 더구나 아직 이 차가 몸에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정체를 알기 전까지 조금 더 먹는다고 별일 있겠나 싶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밤이 되자 제론 자작이 정보 길드의 길드원이라는 사람을 데려왔다. 그가 예를 갖추어 인사하고는 말했다.
“저런, 꽤 일찍 증상이 나타나신 모양입니다.”
“역시 자네는 내가 그 차를 마시지 않으면 무슨 일이 생길지 그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던 모양이로구나. 대체 그게 뭐기에 금단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지?”
길드원은 본부에서 지시 받았던 대로 볼테르에게 전했다.
“금단 현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차가 그동안 있던 증상을 완화하는 것이었지요. 직접 증거를 확인하셨으니 다시 복용하셔도 됩니다. 아니, 복용하셔야 합니다. 혹시 마나 뒤틀림이라는 병을 들어 보셨습니까?”
볼테르가 미간을 찌푸렸다.
“희귀 유전병이 아니냐? 공국에서, 특히 고대 마법 시대부터 이어진 뿌리 깊은 귀족 가문에서 많이 나타난다는……. 황실에서도 그렇고 어마마마의 후작가에서도 딱히 들어 본 적은 없는데…….”
“당연하지요. 황실에서 타국의 공주나 귀족을 황후로 들일 때는 유전 질환을 몹시 철저히 조사합니다. 체리에 후작가에도 공국의 귀족 출신이셨던 후작 부인께서 계셨던 것은 사실이지만…….”
“너무 까마득한데 여기까지 내려올 수도 있나?”
“예, 까마득합니다. 태후 폐하의 고조할머님이시죠. 그분께서 마나 뒤틀림을 앓았다고 알려지거나 기록된 바도 전혀 없습니다. 2, 3대에 한 번은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나타나는 증상이니 사실상 그쪽에서 물려받은 것이라고 보는 것도 거의 불가능합니다.”
길드원은 정말로 안타깝다는 듯 목소리를 흐렸다. 그러자 볼테르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부, 불가능하다니. 말도 안 되질 않으냐? 자네 말대로라면 난 5대 만에 나타난 것이잖나!”
“아니요. 정확히는 5대도 아니지요. 태후 폐하의 고조모님께서도 그 병은 없으셨으니 역학조사 결과 적어도 6대는 더 넘는 겁니다.”
“그, 그건……. 그래, 그렇구나! 나처럼 말이다, 나처럼 병을 숨겼을 수도 있지 않으냐?”
볼테르가 벌떡 일어나 제 가슴을 팡팡 두드렸다. 그것은 마치 어린아이가 자신을 쳐다봐 달라며 어리광을 부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기어이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소리쳤다.
“병이라는 것이 좋은 것도 아니고. 또 이게 유전되는 병이라면서! 그럼 특히 알려졌다간 더 좋은 가문과 정략혼을 맺기도 힘들어지고 그러니 나쁜 것투성이지 않으냐? 그러니 숨긴 것이다!”
“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정 그렇다면 후작 각하께 여쭈어 보십시오. 그럼 더 확실히 확인할 수는 있겠군요. 후에 벌어질 일은 저도 장담할 수 없겠지만 말입니다.”
그가 볼테르를 향해 짐짓 걱정 어린 말투를 흉내 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나 사실은 반쯤 조소가 섞였다는 걸 볼테르도 느끼고 있었다.
분노 위로 배신감과 수치심이 범벅되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유독 자신에게 차갑던 상황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바마마는 나를 아들로 여기지 않았던 거다. 의심하고 있던 거다. 내가 황자라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지 않은가. 내가 황자가 아닐 리 없다. 어마마마가 너무 젊고 아름다우니까 아바마마가 의처증에 걸렸던 것이 분명하다!’
역대 황제들이 황태자가 아닌 황자들에게 으레 쥐여 주곤 하는 노른자 땅도 아닌 변방 영지를 쥐여 준 상황이 대체 왜 그랬던 건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때는 아바마마께서 갑자기 쓰러져 누워 계신 사이에 누님이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자신에게 이 영지를 떠넘긴 것으로 생각했다. 아바마마께서는 아무런 연관이 없었던 건 줄 알았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니 아니다. 아바마마께서 마음만 먹었다면, 그때 “황자에게 주기에 적절한 땅은 아닌 것 같다.”라고 한마디만 하셨다면! 그랬다면 얼마든지 바로잡을 수 있었다.
‘이게 다 누님의 농간이다. 아바마마께서 노환이 드시니 누님이 이간질한 거고 아바마마는 거기에 놀아나셨던 거야!’
“감히, 감히 황자인 나를 의심하다니……! 나를 의심하는 것들은 다 갈기갈기 찢어 죽여 버리겠어.”
볼테르는 현실을 직시하는 대신 열심히 부정했다.
동시에 이대로라면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울 거라는 것도 깨달았다. 그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정보 길드의 길드원에게 물었다.
“이걸 누가 더 아느냐?”
그는 길드 본부에서 내려온 명령에 따라 대답했다.
“저희가 파악하기로는 아멜리아 황녀가 압니다.”
어마마마께서 어째서 그토록 황제 자리에 집착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래서 어마마마께서 아멜리아가 성년이 되기 전에 내게 반역을 준비시킨 것이구나. 나를 의심하는 자를 모두 없애려는 거였어.’
어마마마는 황제 자리의 권력에만 집착했던 게 아니었다. 훗날 위협이 될 만한 자를 죽이는 데에 더 집착했던 거다.
볼테르는 서둘러 정보의 값을 치르고는 그를 내보냈다. 그러고는 혼자 남은 방에서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었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결론을 내리고는 손톱 물어뜯는 것을 멈추었다.
‘날 의심하는 자들은 하루 빨리 죽여서라도 후환을 없애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