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황제의 생일 파티장 후원에서 로이드와 민티아 사이에 있었던 일들에 대한 소문이 퍼질 대로 퍼졌다. 그러자 예상했던 것처럼 슬슬 앞으로 황실과 크로이젠 공작가는 어떻게 되는 거냐는 소리도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소문이 돌기도 전에 에오넬 황제가 입장을 표명했다.
“황실의 사돈으로 크로이젠 공작가를 염두에 두었던 건 사실이지만, 국서를 로이드 폰 크로이젠 공자로 내정했던 건 아니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세간의 소문을 황실과 엮어서 황가를 모욕하지 말라.”
#그 발언 이후 사람들은 황실과 크로이젠 공작가 사이의 더 큰 불화를 예견했지만, 정작 크로이젠 공작은 알고 있었다는 듯 개의치 않았다.
‘공작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 맞긴 하지.’
나는 크로이젠 공작가에 보낼 편지를 잘 실링했다.
그때 제니가 멀리서 슬쩍 물었다.
“의외네요.”
“뭐가?”
“공작 각하께서 가만히 계신 것 말예요.”
“그야 이미 고모님과 공작 사이에서 합의된 일이니까.”
그러자 제니는 입 모양을 ‘오!’ 하고 벌리면서 소리 없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전하, 편지 다 쓰셨으면 저 가까이 가도 돼요?”
“응. 와.”
그녀가 기다렸다는 듯 생글 웃더니 뽀르르 다가와서 옆에 앉았다.
“전하께선 괜찮으신 거 맞죠?”
“응. 안 괜찮을 이유는 또 있나?”
“괜찮으시다니 다행에요. 무슨 편지예요? 파티 초대장이에요? 그래요, 이럴 때일수록 전하께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걸 파티를 열어서 알리는 것도 좋은 방법이에요.”
“아니, 청혼서야.”
“예?”
제니가 깜짝 놀라며 나와 편지봉투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지금 이 상황에 청혼서요?”
그녀가 말한 ‘이 상황’이란 게 로이드와 민티아에 대한 소문이 도는 상황이라는 건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나는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방금 실링한 봉투의 실링 왁스가 잘 말랐는지 손으로 한 번 톡 건드려 보곤 봉투를 뒤집었다.
“물론 황실에서 보내는 공식 청혼서는 아니야. 내가 개인적으로 미리 보내 놓는 거지.”
보내는 이와 받는 이의 이름을 자리에 맞추어 정갈하게 쓰곤 잉크가 마르도록 잘 놓아두었다.
“알테어 크로이젠? 크로이젠 공작가에 이런 분이 있어요? 방계 쪽인가?”
“직계야.”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날이 꽤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보 길드장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전하의 예동입니다.”
제니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엥?”
“곧 소문이 나겠지.”
크로이젠 공작이 로이드에 대한 소문을 덮기 위해서라도 셋째에 관해서 소문을 낼 거다. 알테어 폰 크로이젠은 멀쩡히 살아 있다고. 그리고 그의 성격이 조용한 걸 좋아하고 나서는 걸 싫어한다는 둥 둘러대며 그간 셋째의 존재를 숨겼던 핑곗거리를 만들어 낼 거다.
왜 숨겼는지는 사실 나도 잘 모르겠지만 그건 후에 당사자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알겠지.
‘말해 줄지 모르겠지만.’
“설마 죽었다던 셋째예요?”
“알고 있었어?”
“잘은 몰라요. 저도 너무 어릴 때 들었던 이야긴데요. 어느 날 갑자기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셋째 공자가 있다고는 들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부터 안 보였는데도 공작가가 워낙 조용해서 사람들은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나 보다 한 모양이에요. 원래 너무 어릴 때 원인 모를 병으로 죽는 아이들은 장례식도 안 치르곤 하니까요. 그런 건 안 물어보는 게 예의기도 하고.”
소위 말하길 불길하다 한다. 그래서 아마 내 나이 또래 이후로는 나처럼 그의 존재 자체를 몰랐을 거다.
제니처럼 그때 당시에 살았던 사람이라고 해도 당시에는 쉬쉬하다가 지나갔을 거고. 그러다 문득 뒤돌아보니 너무 자연스럽게 흘러간 일이 되어 버려 별로 중요치 않은 사건처럼 기억 저편에 묻혀 버린 걸 거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죽었다는 거 공작가의 공식 발표였어?”
“그건 아니지만 보통 이런 상황은 너무 어릴 때 잘못된 경우라…….”
“보통은 그렇지. 그런데 저번에 전 공작 만나고 왔을 때 듣기론 살아 있긴 하다던데.”
물론 공작가도 그때 당시엔 세간에 그렇게 소문이 나도록 노렸던 거겠지만.
“네? 그럼 살아 있다는 ‘말만’ 들으신 거예요? 직접 만나 본 적도 없으면서 청혼서부터 보낸다는 말씀이세요?”
‘직접 만나 본 적이라…….’
“얼굴이야 알지.”
나는 피식 웃었다. 만나 봤다고 해야 하나?
그보다 잘 알고 있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잘 모른다고 해야 할까.
내 모호한 웃음을 가만히 지켜보던 제니가 입술을 내밀며 미간을 찌푸렸다. 걱정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전하, 정말…… 괜찮으신 거 맞으시죠?”
“어디 언제까지 버티는지 봐야지.”
내 알쏭달쏭한 말에 제니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
볼테르는 어렸을 적 황궁에서부터 자신의 곁을 지킨 시종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 시종은 옆에서 민트티를 우려내고 있었다. 늘 보던 것인데 오늘따라 그 모습이 영 어색했다.
‘다 어마마마가 시킨 건가?’
정확한 기억도 없을 때부터 매일 정해진 시간만 되면 마시던 차였다. 이따금 블렌딩 된 재료들이 조금씩 바뀌곤 했지만 스피아민트가 차의 베이스인 건 변한 적 없었다. 스피아민트 향이 꽤 강해서 사실 블랜딩 재료로 뭐가 들어갔는지는 잘 몰랐다.
그건 평생 너무 익숙해진 일이라 딱히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돌연 의심스러워진 건 정보 길드의 길드원이라는 사람이 다녀간 이후였다. 그는 길드의 북부 지부가 자금난에 시달린다며 중요한 정보를 팔고 싶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웬 비렁뱅인가 싶었으나 정보 길드의 길드원이 확실하다는 건 사람을 시켜 미행해서 알아냈다. 그가 정보 길드의 북부 지부 건물로 들어가는 것을 미행 보낸 기사가 확인하자 볼테르는 그를 다시 영주성으로 불러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차를 한 달만 마시지 말아 보라고?’
볼테르는 시종이 다 우려내서 앞으로 내밀어 준 차의 향을 코로 한 모금 들이마셨다.
“향이 진하구나. 재료가 뭐지?”
“늘 마시던 스피아민트입니다.”
“스피아민트 말고 또 뭐가 들어갔는지 궁금해서.”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태후마마께서 몸에 좋은 차니 저녁마다 챙겨 먹이라고 하셨기에…….”
“흠…….”
볼테르는 조금 뜸을 들이며 찻잔을 조심스럽게 휘둘렀다. 뜨거운 차를 식히려는 동작처럼 몹시 자연스러운 연기였다.
“스피아민트는 뭐에 좋은데?”
“향이 상쾌하고 진하여 스트레스 해소에 좋고 입 냄새를 좋게 해주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몸에 좋아 챙겨 먹이라는 것치고는 정말 쓸데없는 효능이었다.
시종도 그걸 눈치챈 모양인지 어쭙잖게 덧붙였다.
“아마 들어가는 다른 블렌딩 재료의 효능도 뛰어날 겁니다.”
이 시종도 정확한 레시피는 모르는 눈치였다. 더는 시종을 쪼아 봐야 의미도 없고 어마마마의 의심만 사기 딱 좋다는 판단이 서자 볼테르는 그에게 이만 나가 보라며 손짓했다.
“그렇겠지. 오늘은 차를 좀 천천히 즐기고 싶군.”
곧 시종이 방을 나가고 문이 닫히자 볼테르는 찻잔을 들고 일어나 발코니로 향했다. 시원하게 뻗은 긴 발코니에는 커다란 화분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볼테르는 찻잔을 든 손을 화분 위로 뻗어 그대로 뒤집었다.
주륵-
맑은 찻물이 넓적한 이파리 위로 흘러내렸다. 진한 허브향이 흙 속으로 촉촉하게 스며들었다. 향이 잦아들 즈음, 잎 끝에 대롱대롱 매달렸던 방울이 하나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
연홍빛 편지봉투에 익숙한 필체, 자주 보던 단정한 글씨였다. 돌이켜 보니 그 글씨를 이렇게 바로 세워서 본 적은 없었다. 기억 속에 있는 건 늘 기울어진, 옆에서 보거나 맞은편에서 거꾸로 보던 글씨였다.
「To. 알테어 폰 크로이젠」
행동력이 좋은 건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다짜고짜 편지를 보내는 건 예상 밖이었다.
사실 황도에서 도는 이야기까지는 전해 들어 알고 있었다.
황실에서 크로이젠 공작가를 사돈으로 점찍어 뒀다는 입장을 부정하지 않고 있으니 로이드에 대해서 필요 이상으로 허무맹랑한 소문은 감히 돌지 못했지만 민티아 쪽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들었다.
더불어 이미 오래전 사람들의 기억 속에 묻혀 있던 알테어 폰 크로이젠에 대해서 슬금슬금 소문이 올라오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게 사실 황제와 크로이젠 공작의 합작이라는 것도 눈치는 채고 있었다.
역시 세상만사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
“휴우.”
한숨을 쉬며 편지를 열어 차분히 읽기 시작했다.
편지 첫머리, 황실과 크로이젠 공작가 사이에 정식으로 이야기가 오가기 전에 이야기나 좀 하자며 보냈다고 서두를 밝혔다. 그러나 서두에서 예상했던 것처럼 단순히 친분 먼저 쌓자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었다.
영지의 본성에서 이곳 별장까지 편지를 가져온 하인이 물었다.
“뭡니까, 도련님? 무슨 내용이기에 표정이 그렇게…….”
공작가 안에서도 그를 아는 몇 안 되는 하인 중 한 명이었다. 차마 도련님의 표정이 썩어들어 간다는 이야기는 하지 못하고 하인이 따라서 인상을 찌푸렸다.
“전하께서 원하는 것이 있거든 미리 말하라고 하시는군.”
그녀에게서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하라는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다. 익숙한 듯하면서도 오늘따라 조금은 낯설었다.
「로이드 폰 크로이젠과 있었던 일은 지금 보시는 현황과 같으니 사연을 길게 이야기하진 않겠어요. 그래도 자세한 이야기가 궁금하거든 저 말고 로이드 님에게 여쭙길 바랄게요. 혹시 이런 갑작스러운 상황에 불만이 있으시다면 그것도 제가 아니라 공작님과 이야기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어차피 이번에는 로이드 님처럼 무르는 것도 불가능할 텐데 약혼하기도 전에 싸우는 건 싫거든요. 게다가 이건 싸우자고 보내는 편지가 아니라 일단은 청혼서니까요.」
아멜리아의 목소리가 편지지를 타고 넘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