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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녀님이 두 번째 삶을 사는 방법-132화 (132/148)

132화

“당연히 로이는 황실과는 파혼할 생각으로 나선 거고요. 자유로운 연애가 하고 싶다나? 이건 황녀 전하와도 합의한 내용입니다.”

“유혹한다고 그렇게 막 넘어와요?”

의아했다. 로이드가 워낙 로맨틱하고 여자에게 인기 많을 상인 건 알고 있지만 이런 건 또 다른 문제 아닌가?

“쉽게는 안 되죠. 하지만 수많은 사람에게 정황상 합리적인 의심이 들게 보여 줄 수는 있습니다. 옆방에 황녀 전하께서 리엘라를 위해 방을 잡아 주었지 않습니까. 그리고 리엘라는 황녀가 잡아 준 귀빈실을 자랑하는 척하며 영애들을 엄청 초대했고요.”

“하긴, 너도나도 그 방을 구경하고 싶다면서 달려들더라고요. 사실 저도 결혼 전이었다면 들어가고 싶어서 그 무리에 붙었을 거예요.”

그녀가 작게 키득거렸다.

“민티아도 황후 도움 없이는 스스로 그런 방을 잡을 수 없고, 설령 황후가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고 해도 누군가를 그 방으로 초대한 적이 없으니 다들 부인처럼 궁금했을 겁니다. 그래서 황녀 전하께 최대한 큰 방을 잡으라고 했어요.”

“당신이 황녀 전하께 방을 잡아 영애들을 초대하라고 했다고요?”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던 엘비어스는 문득 대화가 샛길로 빠지고 있다는 걸 느끼고는 서둘러 말했다.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저걸 최대한 많은 영애들에게 목격하게 하려고 그런 겁니다. 그래서 황녀 전하께서는 평소 이곳에서는 제대로 볼 수 없는 후원이 잘 보이도록 정원사들에게 불을 환히 밝히라고 명하신 거고요. 후원 야경이 궁금하다는 건 핑계셨지요.”

엘비어스가 시선을 창문 밖으로 던졌다. 그런 엘비어스의 시선을 따라서 실비아 역시 절로 고개가 돌아갔다.

“체리에 영애?”

“체리에 영애는 태후가 불러내서 가는 겁니다. 그런데 실제로 불러낸 건 황녀 전하고요.”

“그게 가능해요?”

“원래라면 불가능하겠지만 황녀 전하를 모함하려던 작전이 실패했으니 가능한 겁니다. 하녀 하나 붙잡고 뒷돈을 좀 쥐여 준 다음 ‘태후께서 하문할 것이 있어 부르신다.’고 전달하라 하면 걸려들 가능성이 충분했거든요.”

“그게 되는군요…….”

“다른 누구도 아닌 태후가 작전 실패를 문책하겠다고 불러내는 거니까요. 사실 저도 체리에 영애를 불러내는 데 실패할 가능성은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쉽게 나오다니 많이 불안했던 모양이군요.”

엘비어스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이 사람은 뭐가 즐거운 걸까.’

역시 사람들 말대로 황녀의 책사로서는 음흉한 사람이 맞는 모양이다.

“실패하면 어쩌려고 했어요?”

“실패해도 상관은 없어요. 손해날 게 별로 없으니까요. 로이는 혼자 산책했던 것이 되고, 리엘라는 황녀의 위세를 등에 업고 황녀의 예동이라는 타이틀을 굳건히 할 기회가 된 것이니까요. 우리는…… 부인께서 보고 싶어 했던 그레이트 에메랄드 홀의 귀빈실을 구경했군요.”

간신히 진정되었던 귓불이 다시 뜨거워졌다. 심장도 들썩였다.

실비아는 심호흡을 크게 하고는 창문을 열었다.

“좀 덥네요.”

밤바람이 방으로 들어오자 뜨거워서 멍한 머리가 조금 깨는 것 같았다.

창문을 열어 선명해진 시야로 후원의 한적한 벤치에 앉은 로이드가 더욱 또렷하게 보였다. 그리고 후원을 천천히 걸어가는 체리에 영애도 보였다.

실비아는 평소 멀리서 보아 왔던 민티아 드 체리에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민티아는 도도하고 자신감이 넘쳤다. 당연했다. 사교계에서 미혼 귀족 영애 중에서 그녀에게 견줄 만한 이는 없었으니까. 제대로 된 적수가 없었기에 그녀는 더욱 콧대 높이 굴었고 주변에 그녀에게 잘 보이려는 영애들도 꽤 꼬였다.

그녀는 그렇게 꼬인 인맥을 칼같이 관리했다. 서로 주고받는 것이 늘 확실했다. 그녀와 친한 사람들은 그런 민티아를 두고 시원한 사람이라고 말했지만 일각에서는 계산적이고 날카로운 사람이라는 말도 간혹 나왔다.

마치 키옌 태후의 축소판 같은 분위기가 늘 그녀 주변을 압도했다.

그런 그녀가 이제 곧 몇 분 안에 로이드와 염문설에 엮일 예정이라니! 실비아는 그 광경을 실시간으로 보면서도 믿기 힘들었다. 게다가 그게 전부 순수해 보이기만 하는 황녀 전하와 내 남편이 짠 계략이라니!

곧 민티아가 로이드가 있는 곳까지 도착했다.

멈칫!

멀리서도 그녀가 당황한 몸짓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러자 이내 로이드가 반갑게 손을 흔드는 장면이 보였다.

곧 민티아가 양옆과 자신의 뒤를 이리저리 돌아보았다. 그러더니 천천히 로이드 앞으로 다가갔다.

“의심할 법한데 생각보다 잘 걸려드네요. 놀라서 여기저기 둘러도 보는 것 같던데…….”

실비아가 감탄 비슷하게 중얼거렸다.

“평소에 민티아 체리에가 내려다보던 후원은 캄캄했을 테니 위쪽은 아예 신경 쓸 생각도 못 하는 거겠죠. 게다가 내 동생이지만 말을 꽤 잘하거든요. 정신을 차리고 보면 말려들어 있어요.”

“말씀을 그렇게 잘하셨던가요?”

“제 동생이 부인과 말장난을 할 일이 얼마나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저야 로이하고는 평생 한집에서 같이 살았고 로이가 옹알이할 때 전 말을 했으니 로이가 대화하는 방식을 잘 알아서 그럴 일은 없었지만…….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걸 지켜보다 보면 곧잘 있는 일입니다.”

아마 민티아가 의심하거나 눈치채기도 전에 특유의 언변으로 판단력을 흐려 놓았을 거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로이드의 그런 말재간은 여자들에게 특히 잘 통했다.

***

“실례가 안 된다면 만나기로 했다는 분이 누군지 여쭤 봐도 되나요?”

민티아는 곤란한 듯 입술을 오물거렸다. 태후를 여기서 만나기로 했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 그건…….”

“여기 꽤 명당이라 좀 더 있고 싶었는데……. 여기서 다른 분을 만나기로 이미 약속했다 하셨으니 어쩔 수 없군요. 제가 양보해 드리겠습니다. 그럼 영애께서는 제게 뭘 해주실 수 있나요?”

“아, 감사…… 예?”

자리를 양보할 테니 무언가 대가를 달라니. 상상해 본 적 없는 상황이었다. 민티아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태후와 만나기로 했다고 하면 ‘아차!’ 하면서 쉽게 비켜주겠지만 그건 절대 말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황녀의 가장 유력한 약혼자로 거론되는 크로이젠의 둘째 공자에게 대가 따윈 없고 무작정 비키라고 하기도 좀 그랬다. 어쨌든 이곳에 그가 먼저 와서 자리를 잡고 있던 건 사실이니까.

“제가 지금 당장은…… 그러니까…….”

이런 경우가 처음이라 민티아는 어찌할 줄 몰랐다.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제가 혼자 산책하니 좀 심심했거든요. 마침 메인 홀 쪽에서 무곡 하나 끝난 모양인데 왈츠 한 곡?”

곧 건물 안에서 새로운 왈츠가 흘러나왔다. 곡 길이가 1분을 조금 넘는 아주 짧은 왈츠였다.

사실은 잔느에게 바깥의 감시를 부탁해 놓고 타이밍을 재던 아멜리아 황녀가 때맞춰서 가장 짧은 왈츠곡을 신청해 둔 것이었다.

그러나 언제 키옌 태후가 올까 부담스러웠던 민티아는 왈츠가 몹시 짧은 곡이라는 걸 알고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인적도 드문 곳이었다.

곧 로이드가 부드러운 자세로 손을 내밀고 허리를 숙여 춤 신청을 했고 민티아가 재빨리 로이드의 손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아무도 없는 후원 한복판. 그곳은 별빛도 시선도 무수히 쏟아지는 곳이었다.

***

소문이 난 건 그로부터 며칠 뒤였다.

워낙 본 사람이 많았다. 그날 내가 리엘라에게 잡아 준 귀빈 휴게실에서 그걸 내려다본 귀족 영애들이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목격자가 많으니 따로 몰래 뒷말이 오갈 것도 없었다. 그들의 목격담은 누군가의 눈치를 볼 것 없이 대놓고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그리고 황궁에서는 황제와 태후의 궁에 한여름의 서릿발이 휘몰아쳤다.

어느 때보다 찬바람 부는 황제의 응접실에서 나는 여유로운 척 굴었다.

“화낼 줄 알았는데 꽤 침착하구나.”

나는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전 고모님이 곧바로 약혼을 재고하겠다고 말씀하실 줄 알았어요.”

“그럴 생각이야. 그러나 그걸 공식적으로 말하는 건 또 다른 문제거든. 무슨 일이 되었든 내게 아무리 유리한 상황이 되었든……. 공식 발표는 내가 충분히 냉정해졌을 때, 뒤처리까지 고려한 다음에 해야 하는 거란다.

같은 뜻이라도 생각했던 단어라도 한 마디 달라지는 게 생각보다 큰 파장을 부를 수도 있단다. 그 약간조차 뭐든 내 말을 곡해하려 드는 무리에게는 물어뜯기 좋은 먹이가 될 수도 있거든.”

“명심하겠어요.”

겉으로 보기엔 몹시 차분했지만 지금 고모님은 충분히 화가 나신 상태였다. 나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입을 열었다.

“이번 사건 말인데요. 설명하자면 길지만,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제가 벌였어요.”

고모님의 눈가가 아주 살짝 꿈틀거렸다.

“그럼 긴 설명을 해보렴.”

“제 혼담이 들어간 것은 크로이젠 가문이지 로이드 크로이젠 개인에게 들어간 건 아니라고 알고 있어요.”

“그래서?”

“황실과 크로이젠 가문의 입장에서는 이해관계가 맞을지 몰라도 로이드 님과 저는 개인적으로 뭐랄까…… 결이 맞지 않아요.”

고모님은 내 말을 잠시 듣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결이 맞지 않는다는 표현은 너무 추상적이구나. 해석하는 사람 마음대로 해석해 버릴 수도 있을 정도로. 방금 말했을 텐데? 그런 표현 좋지 않다고.”

“고모님이 제 뜻을 곡해하려는 사람은 아니잖아요.”

내가 그녀의 말을 그대로 빌려 반박하자 고모님은 재미있다는 듯 피식 웃음을 보였다.

“알았다. 듣다 보면 느낌이 오겠지. 계속 설명해.”

“얼마 전 도서관에서 귀족 계보를 뒤져 봤어요. 크로이젠 공작가에 셋째가 있더군요.”

“그 가문에 셋째가 있었다는 사실은 꽤 많은 귀족이 알고 있었지. 그런데 아주 어릴 때 갑자기 사라졌거든. 실종되어서 찾고 있다느니 사실은 어린 나이에 죽었는데 너무 어렸어서 일부러 조용히 지나간 거라느니 말이 많지. 하지만 아직 공식적으로 실종 처리도 사망 처리도 되지 않았단다.”

“황도에 거주하지 않고 사교계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영지에서 곱게 자란 도련님이라더군요. 나름대로 조사를 좀 했습니다. 정보의 출처가 로이드 님은 아니지만요.”

“그래서 결론은 약혼 상대를 그쪽으로 바꿔 달라?”

고모님께서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아직 처음의 생각이 바뀐 건 아니지만 내 이야기가 재미는 있으신 모양이다.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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