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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녀님이 두 번째 삶을 사는 방법-131화 (131/148)

131화

엘비어스는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부인과 함께 전망 좋은 귀빈 휴게실에서 후원을 내려다보았다.

은은하게 불을 밝혀 둔 후원은 수풀이 높게 벽을 이루고 있어 얼핏 미로 같아 보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 길이 일정한 규칙을 가지고 있고 중간중간 이정표도 있어서 길을 잃을 일은 없었다.

“에메랄드 홀에 이렇게 전망이 좋은 곳이 있는 줄은 몰랐어요.”

창문에 매달리다시피 붙어서 후원을 내려다보던 그녀는 엘비어스가 뒤돌아 소파에 앉자 따라와서 맞은편에 앉았다.

“부인께서는 이 방에는 처음이겠네요. 평소보다 후원에 불을 많이 밝힌 겁니다. 원래는 이런 밤에 내려다보면 칠흑같이 어둡습니다. 여긴 사실 별이 더 잘 보이거든요. 오늘은 후원을 밝혀 놓아 별은 잘 안 보여서 아쉽네요. 다음에 또 기회가 되면 오도록 하죠.”

“정말요? 사실 매번 황궁 파티 때마다 귀빈실은 거의 자리가 없다고 해서 그런 건 잘 몰랐어요.”

매번 자리가 없는 건 아니다. 다만 인기가 워낙 많아 그녀가 우선순위에서 밀렸던 것뿐이다.

이런 곳을 쉽게 차지하고 앉아 있을 수 있는 귀빈은 외국 왕족이나 황실의 친인척, 또는 공작쯤 되어야 했다. 나머지는 1층 홀의 작은 테라스에나 머무는 게 가능했다.

실비아 로렌티카 백작 영애에서 실비아 크로이젠 작은마님이 된 지금, 그녀에게 이제 이런 귀빈실은 쉽게 발들일 수 있는 곳이 되었다. 정확히는 그녀의 남편 덕이었지만 아무렴 어떤가. 이런 게 권력 좋다는 것 아니겠나?

옆방에는 리엘라가 꽤 많은 영애와 함께 쉬고 있다. 그쪽은 아멜리아 황녀가 힘써 준 덕분에 방이 비워지자마자 일찌감치 들어가 있었다. 물론 아멜리아 황녀가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들여보낸 건 아니었다. 리엘라 역시 자신이 그 방에 들어가서 해야 할 일을 잘 알고 있었다.

엘비어스가 앞으로 계획된 수를 천천히 되짚으려던 찰나 실비아가 불쑥 말했다.

“고마워요. 여기 꼭 와보고 싶었거든요.”

그는 순수하게 좋아하는 부인을 보고는 희미하게 웃었다.

“음……. 사실대로 말하자면 부인을 위해서 이 방을 빌린 건 아니었습니다.”

뭐라고 대답할까 하다가 그냥 있는 그대로를 말했다. 역시 로이드처럼 상대방을 배려해서 입에 발린 말을 하는 건 낯이 너무 뜨거웠다. 그리고 그는 여전히 부인이 조금 어려웠다. 집안에서 맺어 준 정략혼이라 그런가 싶다.

어렵긴 해도 그게 싫은 건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정해져 있던 상대였으며 그것에 대해 불만을 가져 본 적도 딱히 없었다. 그녀가 약혼녀였을 때부터 부정적인 감정도 전혀 없었고 귀족들은 거의 다 이런 식으로 결혼했기에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특히 장남과 장녀들의 경우 더욱 연애결혼이 드물기도 했고 연애결혼에 환상을 가져 본 적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황녀가 싫은 것도 아니라면서 황실과의 혼인을 걷어차 버리겠다는 로이드를 그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 녀석은 오늘 완전히 황실과 약혼을 물러 버리기로 작정한 것 같았다. 그리고 그 결전을 향해 후원의 미로 같은 벽을 따라서 구석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오늘을 위해 흰 턱시도를 빼입어 이곳 2층에서도 아래를 내려다볼 때마다 몹시 눈에 띄었다.

물론 황녀가 개인실에서 후원의 야경을 보고 싶다는 핑계로 평소보다 환하게 불을 밝히라 한 탓도 있지만.

‘걘 딱히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그런데 내가 왜 이런 작전을 짜주고 있었지? 아, 내가 미쳤지 정말…….’

그렇게 생각할 즈음, 옆에 앉아 있던 실비아가 또 불쑥 말했다.

“그래도 고마워요.”

그녀가 해사하게 웃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니 괜히 미안해졌다.

“부인, 전 제 동생처럼 타인에 대해서 깊이 공감하거나 배려하는 건 잘 못 합니다. 그러니 고마워할 필요 없어요.”

“알고 있어요. 원래 그런 사람이라는 거. 그래도 그건 제가 고마운 거랑은 별개예요.”

그녀의 목소리는 몹시 담백했다. 딱히 그의 말투에 대해서 아쉬워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자 로이드가 늘 해대던 잔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형은 그게 문제야. 형수님이 고맙다고 말하면 형이 의도했던 일이 아니라고 해도 그냥 받아! 멋있는 척 좀 하라고. 이러니 형수님이랑 연애다운 연애도 못 해보고 시간만 질질 끌다가 결혼했지.”

“사람 마음이 사랑해야겠다고 마음먹는다고 다 설레는 거면 너나 황녀 전하랑 파혼하겠단 소리 하지 마.”

“그건 아는데 기왕 결혼한 거 좀 알콩달콩 재밌게 지내보란 말이야. 그러다 보면 두근거리고 그런 것도 생기지 않겠어? 형처럼 굴다간 생길 사랑도 안 생긴다고!”

“넌 그래서 생겼냐?”

“난 적어도 노력은 했다. 알잖아? 보여 주기식이었지만 그래도 전하랑 주기적으로 만났던 거. 그런데도 우리 둘 다 저어언혀 그런 생각이 안 드는 걸 어쩌냐? 반대로 형은 이미 결혼해 놓고 노력도 안 하잖아!”

엘비어스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미안합니다, 부인.”

“뭐가요?”

“…….”

말문이 막혔다. 이것저것 다 미안했다. 뭐가 미안하냐고 물으니 대답하기 힘들었지만 미안하다는 건 진심이었다.

“뭐가 미안한지도 모르면서 맨날 미안하대…….”

그녀가 드물게 입을 삐죽거렸다.

“어……. 그게 그러니까…….”

역시 어려웠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그녀가 됐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낯간지러운 소리 못 하는 거 다 아니까 그냥 말하지 말아요.”

엘비어스는 가만히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늘 이런 식으로 대답을 회피했습니다. 부인께서 말하지 말라고 했다는 좋은 핑계로.”

그러자 홍차를 마시던 부인이 콧소리를 내며 고개를 갸웃했다.

“흐응?”

“저 때문에 평생 제대로 연애 한번 못 해보게 해서 미안합니다.”

그러자 그런 엘비어스를 가만히 쳐다보던 그녀가 엘비어스 앞으로 고개를 쑥 들이밀었다.

“그럼 앞으로 저랑 할 생각은 없고요?”

“그건 어떻게 해야 설레는 건지도 모르겠고……. 솔직히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자 실비아가 키득거리며 대답했다.

“설레는 게 맘대로 되나요? 됐어요. 어차피 정략결혼 하면서 그런 걸 기대하는 사람이 멍청한 거랬어요. 결혼하기 전엔 다들 저한테 그랬거든요. 크로이젠 공자님하고 연애나 제대로 해봤냐고, 사랑하긴 하냐고. 솔직히 어른들이 이래라저래라 해서 한 결혼에 사랑이 어디 있었겠어요. 그런데 그건 우리 둘 다 마찬가지 아니었나요?”

그녀가 억지 사랑을 갈구하지 않아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동시에 그렇게 생각하는 자신에게 혐오감이 들 것 같았다.

안도와 죄책감이 뒤섞여 복잡한 와중에 그녀가 계속 말했다.

“오래전에 어느 파티장에서 한 영애와 시비가 붙었어요. 제대로 데이트도 못 해본 정략혼, 상대가 바람이나 안 피우면 다행인 거라는 그 여자 말에 그땐 아무런 말도 못 했어요.

다른 사람들은 당신이 아멜리아 황녀파의 실세라서 너무 음흉한 사람일 거로 생각하더라고요. 하지만 사실 너무 올곧은 사람이라 외도 같은 건 꿈도 못 꿀 거 알아요. 그러니까 불타는 사랑 같은 건 몰라도 평생 믿음이면 충분해요.”

엘비어스는 가만히 기억을 되짚었다.

‘우리가 이렇게 진심을 나눠 본 적이 있던가?’

드물었다. 결혼에 대해서 서로 어떻게 생각했는지, 부모님들끼리 주고받은 정치적인 이해관계는 배제하고 우리 둘은 서로 무엇을 주고받을 것인지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눠 본 적이 없었다.

“그건 약속할 수 있습니다.”

엘비어스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리고 이어 다짐했다.

“비밀도 만들지 않을 겁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나가게요?”

“아뇨, 보여 줄 것이 있습니다.”

“뭔데요?”

“로맨틱한 건 아니니 기대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들이 저에 대해 말하길 황녀 전하의 실세라서 음흉하다고 했다고요? 그거 보여 드리겠습니다. 오늘 제가 이곳에서 뭘 하려는지. 사랑하는 여인에게 보여 줄 장면은 아니겠지만 제 인생의 파트너에게는 보여 줘야 할 거거든요.”

엘비어스의 말에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지만 짙은 파티용 화장 밑에 가려서 보이지는 않았다.

곧 둘은 손을 잡고 나란히 창문 앞에 섰다.

귀빈실에서 잘 내려다보이는 후원 한복판에 로이드가 서 있었다. 그런 로이드를 발견한 실비아가 말했다.

“앗! 아직도 저기 계시네요. 오늘 산책을 자주 하시는 것 같던데 사색보단 파티를 더 좋아하시는 분이 웬일이죠?”

“부인께서는 모르셨겠지만, 오늘 전하께 꽤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엘비어스는 오늘 아멜리아에게 있던 일, 일어날 뻔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어머나!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는군요…….”

“후에 공작 부인이 되면 오늘보다 더 심한 경우를 더 자주 보게 될지도 모릅니다.”

“저, 그런 거 솔직히 잘 대처할 자신이 없어요.”

“괜찮습니다. 미래의 크로이젠 공작 부인을 건드릴 만큼 간덩이 부은 인간도 없을 거고, 제가 부인더러 혼자 해결하라고 내버려 두지도 않을 거니까요.”

두근-

그 순간 실비아는 숨이 턱 막히고 얼굴이 달아올라 두 손을 들어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부인?”

“……낯간지러운 소리 못한다면서…….”

‘내가 낯간지러운 소리를 했나?’ 엘비어스가 고개를 갸웃하자 그녀는 서둘러 말을 돌렸다.

“그래서 어떻게 하려는 건데요?”

“로이가 민티아를 유혹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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